3화 - https://arca.live/b/reader/34909678?category=%EC%B0%BD%EC%9E%91&p=2
다행히 이설화가 몸에 아무 이상 없다고 판단한 건지, 유중혁은 곧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원인 모를 통증이 때때로 물밀듯 몰려올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증상을 말해도 스트레스성 몸살이라 하니, 유중혁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오라버니.."
"둘만 있을 때는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잖느냐. 사실 오라버니라는 딱딱한 호칭보단, 오빠가 더 듣기 좋은데 말이다."
유중혁의 말에, 유미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에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원하시니까 그렇게 부를게요. 오빠."
자신을 귀엽게 올려다보는 유미아의 조그만 머리통에 손을 얹어 살살 쓰다듬어 준 유중혁은 미처 치우지 못했던 커핏가루를 정리하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원체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자신이었기에, 지금의 지저분한 집은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던 유중혁은 곧 쓰레기 봉투를 들고 와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리해 쓰레기 봉투에 넣었다.
"도와드릴까요, 오빠?"
유미아가 물었지만, 유중혁은 그런 유미아를 향해 웃어주기만 할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쓰레기 봉투가 모두 꽉 차자, 유중혁은 계단을 내려가 분리 수거장에 쓰레기를 분류배출하고 칠흑이 깔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울고 있었다.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억해야 하는 무언가를 잊어버린 어떤 이를 가여워하듯.
"우와, 유성우네요."
그런 그의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둠으로 덮힌 그 곳에서도 잘 보이는 은발을 지닌 여자.
"유중혁 씨. 유성우가 왜 떨어지는지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
이설화의 질문에, 유중혁은 짧게 대답했다.
별은 어째서 떨어지는가.
예로부터 별이 떨어지는 것에 대한 전승이 두 가지 있었다.
소원을 비는 것.
그리고, 인간의 운명.
유중혁은 그 두 전승 중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준다는 전승을 믿는 쪽이었다.
"유성우는, 무언가 잃어버린 인간을 위해 하늘이 내리는.. 은혜 같은 거다. 물론 진짜로 소원을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두루뭉술한 유중혁의 말에, 이설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소원을 이뤄주는데요?"
"유성우는 매우 짧은 시간동안 보인다. 그 짧은 순간에도 바랄 만큼 간절한 소원이라면, 언젠가는 이뤄지게 된다."
하늘을 수놓으며 떨어지는 유성우의 꼬리를 응시하며, 유중혁이 말했다.
그답지 않게 감성적이고 비이성적인 발언이었지만 이설화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무언가를 빌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그런 이설화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유성우로 시선을 돌렸다.
".. 소원을 비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설화의 시선을 의식하며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설화는 물었다.
"어떤 소원을 비셨어요?"
"소원은 말하면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자 이설화는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설화의 눈에 유성우가 흐르는 밤하늘이 담겼고, 유중혁은 어째서인지 하늘을 보는 대신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숨막히게 그 투명하고 붉은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리고 이 모든 세계의 결말을 아는 한 사내가 있었다.」
자신이 아는 그 가볍고 능글맞은 사내,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기이한 느낌에 이끌려 다시 한 번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거짓으로 진실을 쌓아올린 여인이, 기꺼이 그의 그림자가 되었다.」
아랫집에 사는 예의없는 여자,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또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이번만큼은 그것을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그녀를 볼 때마다 이런 알지 못할 기억들이 떠오르는지 바로 지금 그 이유를 찾아내고 싶었다.
다시 한 차례, 한 차례 그녀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유중혁의 머릿속에선 잊혀진 기억들이 저마다 형태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인연을 잃고 상처받은 검귀를 만났고」
「그곳에, 정의롭고 싶었던 군인이 있었다.」
「과거와 미래의 틈새에서 태어난 아이가 울었다.」
검은 포니테일에 장난기 어린 표정을 한 소녀가 한 명.
큰 덩치에 순박한 얼굴을 한 남자가 한 명.
갈색 단발 머리에 귀여운 인상의 조그마한 소녀가 한 명.
유중혁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중혁 씨!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이설화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흐릿해졌다.
필사적으로 의식을 유지하려던 유중혁은, 결국 한 순간 아득해짐과 동시에 자신의 몸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그야말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자신이 칠흑처럼 검은 검을 들고 동료들과 함께 싸워나가고 있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숨겨왔던 여인도, 그 곳에 있었다.」
「오랜 웅크림에서 깨어나, 멸악의 칼을 쥔 여인이 웃었다.」
「어미를 잃고 곤충을 손에 쥔 소년이 울었고.」
「돌아오지 않을 가족을 위해 성을 구축한 사내가 포효했다.」
갈색 머리의 산뜻한 인상의 여인이 생긋 웃었다.
희게 새어버린 머리칼의 심판자가 검을 휘둘렀고.
모자를 눌러쓴 한 소년이 자신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
푸근한 인상의, 배가 나온 중년인이 못마땅한 듯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건.."
나는..
나는 누구지?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유중혁은 자신의 모든 기억을 쥐어짜냈다.
"나는.."
「천 번의 생을 살아온 이를 사랑한 여인도 있었고.」
흰 머리칼, 설산에 핀 꽃 같은 붉은 입술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기억해내야 한다.
나는 누구이고, 저들은 누구인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고독한 사내가 있었고.」
「나는 유중혁이다.」
이윽고, 마침내 유중혁의 입이 원초적인 단어를 뱉어냈다.
세상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어린 아이가 말하는 듯, 더듬거리면서도.. 넘어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나는.. 유중혁이다.."
나는 유중혁.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이자,
"회귀자였던, 유중혁이다."
회귀자였던 이.
아아,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그 모든 지옥도를.
"김독자, 한수영.. 이지혜, 이현성, 신유승, 유상아, 정희원, 이길영, 공필두."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그와 지옥도를 헤쳐나온 그 동료들을.
"이설화."
그리고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을까.
자신의 연인이자, 그의 모든 생을 바쳐 사랑했던 여인을.
달빛을 받으며, 유성우가 떨어지는 가운데 이설화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렸다.
유중혁은 지체하지 않았다.
"내가.. 내가 너무 늦었군. 미안하다.. 미안하다..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정말.."
성큼성큼 걸어가 이설화를 끌어안은 유중혁은,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이가 우는 것처럼.
이설화의 부드럽고 향기로운 두 팔이 유중혁을 감싸안았다.
"괜찮아요. 늦지 않았으니까, 지금껏 그런 것처럼. 잘 돌아왔어요, 중혁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