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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카톡에 대답하려 폰을 손에 들자 예리는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누구야? 여자친구?"


"아내."


"어... 너 결혼했었어?!"


눈이 동그래진 예리. 놀랄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녀에게는 결혼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었다. 그녀가 준비하는 전시전이 있었고, 그녀의 커리어에 직결되는 일이었다. 괜히 알려줬다가 친구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하다며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이런 일에는 굉장히 민감하다. 내 생일날을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늦은 생일 선물과 함께 진지한 목소리로 사과한 적도 있을 정도로. 그때, 조금이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렸었다.


"내가 말 안 했던가?"


"안 했어! 어떻게 말 한마디도 없이 결혼을 하냐, 너는!"


내가 농담으로 넘기려 하자 예리는 테이블을 통통, 작은 손으로 쳐대며 항의했다. 진심으로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친구가 결혼식에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는 건 그게 배려였다고 해도 기분이 나쁠 수 밖에 없겠지. 


"아니, 뭐, 나도 바쁘고 너도 유학중이라 바쁘고 해서 그랬" 카톡


[친구지?]


"잠깐만 대답 좀 하" 카톡


[자기야]


아내의 톡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대학교때 동기]


"그리고 청첩장을 보냈어도 너 못 왔을걸? 그때 너 전시전이다 뭐다 바빴잖아"


"기억하고 있었네... 아니.... 아, 어쨌든 말도 안하고 결혼을 해버리냐 넌... 그때 여자친구 있다는 말도 안 했었잖아."


이제야 진정이 된건지, 아니면 화내기도 지친건지 예리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딱히 그" 카톡


[갈거야]


[어디로?]

[집에?]


"야, 잠깐만 나 가봐야" "여보."


뒤를 돌아보자 아내가 생긋 미소지은 채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웃고 있는 건 맞을텐데, 조급한 표정이였다. 그제서야 그녀의 반응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무어라 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옆의 의자를 꺼내어 - 그녀의 엉덩이가 내 엉덩이에 닿을 거리였다 - 앉았다. 그리고 마치 예리에게 과시라도 하듯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내 오른손에 깍지를 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해명할 기회는 이미 없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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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그렇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 나는 그녀에게 예리에 대해 설명했다. 내 설명에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예리에게 마음이 있지 않을 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듣고, 이해했다면서 넘어가는 건 아마도 그녀의 죄책감때문이겠지. 


"걱정 할 거 없다니까, 내가 쟤한테 넘어 갈 거 같았으면 진작에 넘어갔겠지."


"...여자로 생각 안한다는 거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느냐, 솔직히 말해, 그녀에게는 연애적 감정을 느꼈었다. 하지만 나와 그녀의 길은 분명히 달랐고, 각자의 길을 위한다면, 함께할 수 없었다. 


"그렇지, 뭐."


눈을 살짝 돌려, 그녀를 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불안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잠시 머뭇거린 동안 그녀는 눈치챈 것 같다. 내가 예리에게 연애적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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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했던 거, 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소주잔 깨질라, 잔 꽝꽝 내려놓는 거 하지 말래도 10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아 이 기집애는. 예리는 술에 취해서는 벌개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말 안 해줬을거다. 그래서 정말 아무도 말 안 해줘서 얘가 몰랐던 거고.


"너, 걔 많이 좋아했잖아."


"그러니까, 그런데 왜 말 안 해준거야?!"


"아, 가시나 거 술버릇 보소."


나는 예리가 테이블을 두들겨서 쏟아진 소주병을 일으켜 세웠다. 화장실로 도망간 친구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거 친구 좀 챙기고 도와줘야지 혼자 살자고 도망가냐. 


"들었으면 다 때려치고 와서 깽판쳤을 거잖아. 어떻게 알려줘."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아마. 그런데도 말해주면 학습능력이 없다는 소리지. 


"그래도... 계속.... 참고 버텼는데... 이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테이블에 쳐박고 청승을 떨기 시작한다. 미치겠네 진짜. 


"...아, 진짜, 이런 거 얘기 해주면 안 되는데..."


한숨을 푹 쉬고, 잠깐 고민을 해본다. 이걸 말해줘도 되는 건가. 그 녀석의 결혼 생활이 겉으로는 깔끔하고 완벽했는데 속은 완전 문드러진 개판이라는 건 최근에야 밝혀진 사실이었고, 그것에 비춰볼때 끝은 별로 멀지 않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녀석을 보듬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건 내가 같이 당구장 같이 가고 술담배 같이 하는 그런 걸로는 부족하다. 연인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예리 이 기집애라면. 충분히 그 녀석을 보듬어 줄 수도 있을 거고. 

만약, 이걸로 이 두 녀석들이 좋게 지낼 수 있다면. 말해줘도 좋지 않을까.


"걔 마누라, 2년동안 바람폈어. 보통이면 이혼할 거야 아마."


"무슨 소리야, 오늘 낮에 봤을 때는 깨가 쏟아지던데."


"그 멍청한 놈이 호구처럼 넘어가줬나보지, 뭐."


"뭐... 걔가 착하긴 한데... 2년이라니, 그건..."


"두 번이나 당했으면 봐준다고 말은 해도 속은 안 그럴거다."


아마도 부글부글 끓고 있겠지. 한번이야 뭐, 기말에 과제에 바빠죽겠는판에 있었으니까. 마침 군대 간다고 여유부리던 나하고 둘이서 미친 듯이 술푸고 다녔으니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그 일을 겪고도 또 그러면 아마도 제정신으로는 못 있겠지. 일부러 술마시자는 소리도 안하는 건 사고칠까봐 자제하는 모양이고.


"두, 두번?!"


"2학년 겨울방학때 그래서 걔 여친이랑 헤어진거야. 몰랐냐?"


"아니, 그, 어, 두번... 좀... 심했다, 진짜..."


"말문이 막힌다, 그지?"


나도 말문이 떡 막히더라고. 어떻게 한 놈한테 두번이나 그런 일이 생기는 지 원. 


"솔직히. 그럴 바에는 네가 그 놈 채가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예리는 테이블에 얼굴을 턱 얹어놓고, 소주병 뚜껑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있었다.


"모르겠다, 나는."



+



"걔, 아내분. 어디에서 일하는 지 알아?"


"... 내가 너 깽판칠까봐 결혼식때 안 불렀다고 안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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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남편보다 먼저 퇴근 하는 날.

남편이 좋아하는 메뉴를 생각하며, 업무를 마치고 회사를 나왔다. 마침 내리는 눈을 보니, 오늘 운전해서 출근한 그가 생각난다. 운전 조심해야 할텐데. 추우니까, 그가 좋아하는 스튜로 해볼까?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릴테지만, 오늘 그보다 조금 빨리 퇴근 하니까 적당할지도 모르겠네. 목도리를 입가로 끌어올리며, 내가 만든 스튜를 먹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연애할때 자주 해줬는데.


"저기요."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나를 불렀다. ...어제 들었던, 목소리였다. 


"어제 뵈었던..."


"네, 세훈이 대학 동기인, 한 예리라고 해요."


화려한 갈색 머리칼, 끝이 치켜올라간 고양이같은 눈. 한 겨울인데도 두껍지 않은 코트, 가죽치마, 검은 스타킹에 힐. 그렇게 얇게 입고, 추운 날씨에도 그녀는 춥지 않은 것처럼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그 입가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시간 되시나요?"


"아뇨, 바로 가서 저녁 준비할 거라서요."


그녀는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았다. 


"... 이제와서, 좋은 아내인 척 하는 거에요?"


그 짧은 말과 눈물맺힌 눈은, 비난도, 질타도, 지적도,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증오. 그건 증오였다. 남편을, 상처입힌 나를, 정말, 증오하는... 순수한 증오였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녀가 맞다. 난... 이제와서 좋은 아내인척, 하려 했던 것이다. 그를 처참하게, 상처입히곤, 이제와서... 내 좋을대로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거다.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눈 앞의, 울고있는 남편의 친구에게 화라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세훈이는 이미... 이미, 당신 같은 여자한테 한번 속았었다구요! 그런데 당신이 또..!"


"이미, 라니...."


"대학생때, 사귀던 여자가 바람을 폈었다구요, 당신이 했던 것처럼!"


남편이 받은 상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더 깊었다. 낫지도 못했을 그 상처를 다시 긁어, 헤집은 건... 나였다. 2년이라는 긴 시간만큼, 그 상처는 처음의 그 상처보다도 더, 깊고, 넓게, 그를 할퀴었다.


"... 됐어요, 이제라도 세훈이한테 잘 하셔야 할 거에요."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리곤, 당당하게, 나따위와는 다르게, 나가와 나를 쳐다보며 선언했다.



"세훈이, 제가 뺏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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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예전에 썼던 분량


전개 어케할지 뇌정지 와서 내버려둔지 좀 됐는데 마저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