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대가 벗겨졌다.

나는 지금 제임스의 양조장 정문 앞에 서있다.

내 옆에선 앨리스가 내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다.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돼?"

"아무리 너라도 제임스와의 만남을 방해하면 가만 안둬."

그녀의 말에는 어딘가 살기가 느껴졌다.

"하아아..."


퉁- 퉁- 퉁-


철제로 된 문을 두드리니 둔중한 소리가 난다.

"누구야."

"나야, 제임스."

"아, 아서구만. 잠시만 기다려."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저 그 틈을 비집고 앨리스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제임스!"

앨리스는 제임스에게 달려가 와락 안겼다.

양조장 내부에는 제임스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제임스그동안어디서뭘했던거야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보고싶었어사랑해사랑해사랑해사랑해다시예전처럼돌아가는거야당신이아침에일어나면나는식사를준비하고둘이서같이나란히앉아서오붓하게먹는거야아생각만해도너무행복.."


툭-


하고 제임스가 앨리스를 밀쳐냈다.

밀려난 앨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아서, 대체 어디서 이런걸 달고 온거야?"

제임스가 불편한 기색으로 앨리스를 가리켰다.

"아니, 앨리스가 중간에 날 납치해온거야. 올리버 씨는 여기 오던 중에 앨리스에게 살해당했지. 시체는 밖에 세워둔 트럭에 실려있어."

"....."

올리버가 죽었다는 말에 제임스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 침묵 속에는 부하를 잃은 것에 대한 분노도 섞여있으리라.

"꽤 쓸모있는 놈이였는데..."

제임스는 팔짱을 끼고서 무언가 곰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앨리스, 올리버는 왜 죽였는지 이유나 좀 들어볼까."

"어짜피 당신 위치만 알아내면 쓸모없어질 놈이였어!"

"너한텐 그러겠지..."

제임스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아서, 너가 보기에도 존나 맛이 간 것 같지 않아?"

"그 말에 동의하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제, 제임스... 나한테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는거야?"

"기억나 앨리스? 너 내가 보는 앞에서 그놈이랑 그짓거리를 했잖아."

"그....."

"그래. 네가 그랬다고. 돼지새끼마냥 몸을 굴리면서."

"그만..."

앨리스는 듣기 고통스러운지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누가 집에 왔는지도 모르고 그저 쾌락에 헐떡이면서."

"아아악! 그마아안!"

마침내 참지 못한 앨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흐윽... 내가 잘못했어..."

"넌 그 날 나를 배신한거야."

"그래서 너에게 용서를 구할 방법을 찾은거야!"

"오? 용서를 구할 방법을 찾았다네? 아서? 그래, 그게 뭘까?"

"그 놈을 죽여버렸어.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역시 회계 담당자를 죽인건 예상대로 앨리스였군...

"그래서 뭐? 어쩌라는건데?"

"뭐?"

"네가 그 놈을 죽이고 내 앞에 돌아와서 '오, 제임스! 다른 놈이랑 떡쳐서 정말 미안해! 내 용서를 받아줄래?' 라고 주절거리면 내가 모든걸 용서할줄 알았냐? 이건 뭐 멍청한건지 아님 낮짝이 두꺼운건지."

앨리스는 제임스의 일침에 그저 멍하니 제임스를 바라볼 뿐이였다.

"나가, 마지막 기회야. 지금 바로 네 부하들 데리고 여기서 떠난다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해줄게. 물론... 방금 네가 올리버랑 너랑 떡치고 다닌 놈을 죽였다고 아서 앞에서 자백해버렸으니 경찰의 수배로부터 도망은 다녀야겠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제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앨리스에게 말했다.

제임스의 마지막 경고에 앨리스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어떻게...! 내가 널 다시 만나려고 그 놈까지 죽였는데...!"

"아서, 아까도 말했지만 이 년 지금 완전히 맛이 갔어, 갔다고. 자기가 했던 짓들은 그저 존나 가벼운 거였다고 생각하는거야."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면..."

"없다면?"

"... 이봐! 정문 잠궈!"

앨리스의 명령에 부하 두명이 철문을 닫고 걸쇠를 걸어버렸다.

"... 널 죽여서라도! 내 곁에 두겠어!"

앨리스가 제임스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었다.

"이 미친년이 또 사람을 죽이려고...!"

말리려고 했지만 이번엔 총구가 나를 향했다.

"좀만 기다려 아서, 아직 네 차례가 안됐잖아? 후훗."

"크윽... 미친년..."

섣불리 움직였다간 나나 제임스나 앨리스에게 몰살당할 위기였다.

"자, 제임스... 이제 선택할 시간이야. 나와 같이 가던지... 아니면 여기서 뒈지든지. 네 의견은 존중할게."

"....."

제임스는 질렸다는듯 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씨발 말이 안 통하는군."


"친구들!"


제임스의 외침에 럼을 숙성하는 커다란 오크통들 사이에서

남자들이 우루루 나왔다. 양조장 노동자들로 보이는 그들은

전부 손에 웨블리 리볼버를 들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일제히 앨리스와 앨리스의 부하들을 겨누었다.

"하나만 이리 줘봐."

총을 건네받은 제임스가 앨리스의 이마에 총을 갖다댔다.

"제, 제임스... 이게 대체..."

"오후에 이미 아서에게 소식을 들었었지."

"이보게, 저기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는 두 새끼들도 잡아놔."

제임스의 명령에 양조장 노동자 몇 명이 앨리스의 부하들을 에워쌌다.

노동자들에게 사로잡힌 두 명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매복에

꽤나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까 나가라고 했을때 나갔으면 깔끔했을텐데 말이야..."

"....."

"뭐... 날 존나 빡치게 했으니까, 어떻게 될진 예상이 되겠지?"

앨리스도 이 상황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출애굽기에 이런 말이 있더라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라고 말하고는 제임스는 공이치기를 엄지로 당겼다.

"존나 간단하다고."

"잠깐만! 제임스! 설마 진짜로 죽일 건 아니지...? 응? 나라고! 네 약혼녀 앨리스라고! 그러니까... 이거 겁만 주는거지? 그치?"

"....."


제임스가 굳은 표정으로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글쎄... 아닐걸?"


탕-


앨리스도 올리버처럼 뒤로 고꾸라졌다.

"지 목적 달성하겠다고 사람 죽이고 다니는 이런 미친년은 거리에 돌아다녀선 안돼! 안 그러냐, 아서?"

"....."

나는 말없이 앨리스의 뒷통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라보았다.

"그래 뭐... 그리고 배신자는 죽어야하니까."

제임스는 지쳤다는듯 털래털래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프리드먼 씨, 이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흐음..."

제임스는 말없이 앨리스의 부하 두명을 노려보았다.

"....."

"제발... 목숨만은..."

"아니, 그건 안되고... 일단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건지 알려줄게."

"일단 밖으로 나가서 앞에 폐창고로 데려갈거야. 거기서 너희 머리에 각자 한 발씩 쏴줄게. 그러고 나면 몸을 반으로 잘라서 포대에 담아놓는거지. 그렇게 나온 포대 4자루를 둘씩 나눠서 상자에다 넣고 밀봉하는거야. 그럼 상자 하나는 버마로 보내고, 또 다른 상자는... 글쎄... 인도가 좋겠군."

"....."

"인도에 가본적이 있나?"

"아니요..."

"그래? 가보고 싶지 않아?"

"....."

"이쯤하면 됐어. 데려가"

제임스의 말이 끝나자 노동자들이 두 명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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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 써클의 간부, 템스 강에서 숨진 채로 발견!"

오늘 자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1면 타이틀이다.

그 날 밤, 템스 강에 버려졌던 앨리스의 시신은

며칠 후 낚시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시신은 이미 물에 퉁퉁 불어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여서

손가락에 끼운 반지 안쪽에 새겨진 이름으로 겨우 신원이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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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어 봤어? 제임스?"

"그래... 시신을 찾았다는군."

"뚜렷한 증거도 목격자도 없어서 미제 사건으로 처리될거 같아."

"아... 아주 강하게 확신하고 있네, 아서?"

"이미 경찰 내부에서도 그냥 종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뭐, 그럼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도 없겠네."

대화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리버풀로 가는건가?"

"아니. 그 임무는 이제 끝났어. 런던에 남아있을거야."

"잘됐군! 앞으로는 뭘 할 계획이지?"

"얼마 전에 메릴에게 청혼했어. 둘이서 같이 살 집을 알아봐야지."

"아! 그거 정말로 기쁜 소식인데!"

"... 아, 미안. 괜히 네 앞에서 염장질 한거 같은데."

"아냐, 이번 일로 당분간 여자 생각은 안 날거 같으니까 괜찮아."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조만간 청첩장 보낼테니 꼭 오라구."

"그러지! 그럼 다음에 또 보자구 아서!"

"잘 있어, 제임스."

나는 제임스와 악수를 나눈 후 양조장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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