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붕이와 후순이가 있었다.


후붕이는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상냥하고 웃음이 많은 화목한 가정안에서 자라 마음이 따뜻하고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허세부릴줄도 모르고, 어설프고 서투르더라도 한결같이 올곧은, 깊이 들여다볼수록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후순이는 후붕이를 사랑했다.


후순이는 경제적으로는 충만했지만, 가정에서의 분위기는 냉랭했고, 걸핏하면 험악한 표정과 고성이 오가는 부모밑에서 자랐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쪽도 후순이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다.


상처받고 황폐해진 마음은 자연히 학교에서도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붕 뜨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걸 어려워했고, 상대방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것도 껄끄러워했다.


학교가 파하고 모두가 돌아갈때면, 후순이는 숨막히는 집으로 가능한 늦게 돌아가기 위해 교내를 헤매거나 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하는게 후순이의 시간을 보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후순이가 후붕이를 만나는건 필연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매일 방과후만 되면 이름만 올려두고 활동은 전혀 하지않는 유령부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활동하는 후붕이만 부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후붕이는 화가를 꿈꾸었다.

천재는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재능이 있었고, 온화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후붕이의 풍부한 감성은 그림에 녹아들어 작품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을 그리는것이 즐거웠다.


그런 후붕이에게 어느날 찾아온 후순이는 뮤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쭉 뻗은 아미, 오뚝한 코, 분홍빛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 후붕이를 마음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어두운 밤바다 같은 눈동자.


후붕이는 후순이와 만난지 오래 지나지 않아 반해버릴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후붕이의 예술적 영감을 쉴새없이 두드리는 우상이었고, 요정이었고, 여신이었다.


후순이 역시 후붕이가 무척 좋았다.


아무 생각없이 거닐던 별관 복도에서 우연히 들여다본 부실 안쪽에서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봤을때 후순이는 걸음을 덜컥 멈출수밖에 없었다.


반쯤 쳐진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순간.

캔버스위로 펼쳐진 노을빛의 그림을 본 순간.

차갑고 적막했던 후순이의 마음속으로 따뜻하고 다정하게 스미어들어오는 그 감정을 느낀 순간.


후순이는 후붕이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둘은 머지않아 연인이 되었고, 서로가 서로와 함께할것을 결코 의심치 않았다.


후붕이가 그렸던, 후붕이와 후순이가 함께 앉아있는 그림은 후순이의 보물이 되어 간직되어졌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녹록치않았다.


후붕이의 가정형편은 넉넉치 않았고, 아무 생각없이 그림만 그리며 꿈을 꿀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후순이의 집은 잘 사는 편이었지만, 후순이의 부모님은 냉정하고 메마른 성격이었으며, 현대미술을 꺼려하는 사람이었다. 후순이의 부모님은 후붕이와 함께하려 하는 후순이를 도우려 하지 않았으며, 때때로 헤어질것을 종용했다.

후순이 역시 공부를 손에서 놓은지 오래인지라 그럴듯한 비전이 없었다.


후붕이와 후순이는 집을 나와 동거를 하면서도 현실의 벽 앞에서 허덕이기 시작했다.


둘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월세를 내고 둘이 지내는 공간을 유지해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둘이 함께 지내는것만으로도 좋았지만, 시간은 점점 후순이를 지치게 만들었다.

후붕이와 후순이가 얼굴을 마주치는 시간도 무척 적었으며, 대화조차도 누적된 피로때문에 토막토막 끊기기 일쑤였다.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아도, 마땅히 해소할 배출구도 없었다.

점점 후순이는 날카로워졌고 날 선 태도는 후붕이에게 향해지기 시작했다.



가볍게 쏘아붙이는 말.

짜증어린 목소리.

푹 눌러쓴 인상과 불쾌해하는 태도.


후붕이는 후순이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전부를 수용했다.


후순이가 오직 후붕이를 믿고 그림을 그리게 해주기 위해 내조해주고 있었으며, 후붕이 본인도 후순이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붕이는 후순이를 너무 사랑했다.



시간은 더욱 흐르고, 감정이 폭풍에 몰아치는 격랑처럼 수위를 높여가던 어느날


후순이는 마침내 돌이킬수 없는 선택을 했다.



"이제, 나, 더는 못버텨! 그 놈의 빌어먹을 그림!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건데? 언제까지 이렇게 거지같이 살아야 하냐고!"

"다 필요없어, 너 같은거! 필요없다고!"

"꺼져! 꺼져버려어엇!"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부모밑에서 돈에 대해서는 모자람 없이 자라왔던 후순이었기에 더욱 버티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다정한 말보다는 폭언과 욕설이 난무하는 가정에서 자랐기에 더욱 후붕이와 가정을 꾸리는 미래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찌이이익-



떨그렁-...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충동적인 후순이의 행동은 둘 사이에 다시는 건널 수 없을 깊은 골을 만들어냈다.

후붕이가 학창시절 그려줬던 두사람의 스케치를 찢고, 후붕이가 알바비를 아껴가며 산 싸구려 반지를 면전에 집어던진 그 순간에.




후붕이와 후순이는 갈라섰고, 자취방에서 함께 쓰던 둘의 물품은 둘이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과 같이 버려졌다.


후붕이에게 후순이와의 이별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마음속이 깊이 패인것처럼 쓰라리고 고통스러웠다. 얼마간 이유도 모를 열에 시달렸고, 헤어지는 그 날의 광경은 악몽이 되어 때때로 꿈속으로 찾아들어왔다.


지독한 이별의 후유증 속에서, 후붕이는 또 다시 붓을 잡았다.

그림마저 놓을수는 없었다.


새하얀 캔버스위에 어른거리는 후순이의 모습을 지우려는듯이 덧칠해가던 후붕이가 마침내 붓을 멈춘순간,


세상에 길이 회자될 후붕이의 최초의 '명작'이 탄생했다.



반짝이는 영감을 한없이 부어주며 후붕이를 화가로서 성장시켜가던 뮤즈는, 마침내 이별로서 후붕이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완성시켰다.


따뜻한 마음, 온화한 감성, 사랑에 대한 시각, 공허한 내면, 슬픔어린 표현.

전부가 뒤섞여 모자이크 되어버린 후붕이의 붓은 거침이 없어졌고, 더없이 아름다워졌다.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붓을 그으면 그을수록.


후붕이는 캔버스위로 전부 쏟아내었다. 감정을 털어냈고 아픔을 퍼부었다.

쉬지않고 몰두해서 그림을 그려나가는 후붕이의 팔뚝위로 땀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물방울이 떨어진 어느순간, 후붕이는 끝내 마음속의 후순이에게 작별을 고할수 있었다.



반면 후순이는 달랐다.


후붕이를 쳐내고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온 후순이는 처음에, 자신이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미래가 불안한 후붕이의 옆에서 함께 해야한단 말인가. 지쳐버린 후순이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을거라고 되뇌었다.


후순이의 부모님은 돌아온 후순이를 환영하고, 후순이를 어르고 달래 맞선자리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후순이도 언제까지고 후붕이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맞선을 보기 시작했다.


후붕이보다 잘생긴 남자도 있었고,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편인 후붕이와는 달리 위트있고 유머감각이 좋은 남자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부분 안정적인 직장과 재산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이들과의 만남이 나쁘지는 않았다.

불안하고 앞길을 알기 어려운 후붕이의 옆에서 걷던 때와는 달리,

그들의 옆자리에서 맞이할 미래에 대한 전망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남을 거듭할수록 후순이는 점점 알아차릴수 밖에 없었다.


후순이의 마음속의 모든 공간은 이미 후붕이로 가득해서, 이제와서 다른 누군가를 결코 들일수가 없었다.


다른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볼때마다

후붕이는 어땠는지, 어떤 배려를 해줬는지, 어떤 눈으로 바라봐줬는지.

계속해서 생각나서 버틸수가 없었다.


후붕이가 생각나는 주기는 갈수록 짧아졌다.


밥만 먹어도

눈만 감아도

숨만 쉬어도


계속해서 후붕이가 생각났다.


곁을 떠나고 나서야, 후붕이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돌아가야 해.

돌아가야만 해.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쉬지않고 메아리쳐, 마침내 후순이는 후붕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후붕이의 집앞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과해야해. 후붕이라면...후붕이라면 받아줄거야. 다시 시작할수 있을거야....."



주문처럼 되뇌이며, 후순이는 선보는 자리에 나갈때보다 한층 더 치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멀리서 후붕이가 보이고 마침내 가까워졌을때, 후순이는 속으로 당황했다.


만나기만 하면 피곤한 와중에서 웃어주던 후붕이였는데, 지금은 그 얼굴위에 냉막한 표정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심호흡을 한 후순이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잘...지냈어...?"


"어."



단답.


칼같은 대답을 내뱉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딱딱해서, 마치 바위같았다.


후순이의 마음이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때 했었던 말, 있지? 그, 그거 진심이 아니었어..... 그, 냥... 조금 힘들어서..."


"....."


"내가 잠깐, 미, 미쳤었나봐... 미안. 미안해."


"....."


"후, 후붕아...?"



아무런 답이 없는 후붕이의 모습에 후순이는 천천히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이런 후붕이의 모습은 몰라... 내가 아는 후붕이와 너무 달라...'



"후붕, 후붕아... 나, 용서, 해주면 안될까...? 응?"


"....."


"내가, 내가 바보라서... 잠깐 시, 실수 한 번 한거야. 그러니까 우리...다시...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니...?"



눈물이 핑 돌고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왔다.


감정없이 바라보는 후붕이의 눈초리가 온몸을 난자하는것만 같았다.



'그런 눈빛, 견딜수 없어...'



당장에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걸 애써 참으며, 애절하게 두손을 모았다. 


후순이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어졌다.


그때, 후붕이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몇번인가 접힌 하얀 종이. 손때가 조금 탄 종이가 천천히 펴졌다.



"흡...!"



그건,


헤어지던 그날


한때 후순이의 보물이었으며,


후순이가 후붕이의 눈앞에서 반으로 찢어버렸던


둘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반으로 갈라진 그 선은,


마치 후붕이와 후순이의 사이를 나타내듯


정확히 둘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후순아."


"아, 아아....후...후붕아....."


"내가 오늘 나온건, 네가 원하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냐."


"아, 안돼에... 제, 제발 한번만... 기, 회를 줘.....흑, 으흑, 응?"



후순이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후붕이의 얼굴도, 둘이 그려진 그림도, 온 세상도


모두 흐릿해졌다.



"나는 마음 정리 다 끝냈다."


"그, 그만... 그러지 마아... 그러지 마! 제발!"



후붕이가 그림을 든 손의 반대쪽 손에 무언가 들려나왔다.


라이터였다.



치익- 칙-


화르륵



"...........어...?"



후순이의 눈 앞에서


한때는 보물이었던,


그러나 제 손으로 찢어버린


그림이 불타올랐다.



".....이걸로 끝내자. 이제."


"에...아, 아아, 으우아아아......!"



덜덜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간신히 버티고있는 후순이의 눈에


두사람의 추억,


두사람의 사랑,


두사람의 미래.


모든게 불타올랐다.




"아, 아아아, 아아으아아아....."




후붕이가 떠나고,


어둑해진 모래사장에서


뮤즈였던 여자는 


불이 꺼지고 잿가루가 되어버린 조각들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으고,


아주 오래도록 잿가루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거라는 듯이.














ps 원래 이 뒤에 시간이 몇년 흐르고 


후붕이가 젊은나이에 화가로 이름날려서 유명해지고


후붕이를 못잊은 후순이가 후붕이 전시회 찾아갔다가 만나서


다시 시작하자는 엔딩 내려했는데


원래 2~3천자로 끝내려던게 계속 길어져서 


그냥 여기서 끊었음...


해피엔딩 원하는 사람들은 위의 전개가 이어졌을거라고 생각하면될듯


글쓰는거 진자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