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 잠시 생각할 시간 좀 갖자."


오랜 침묵 끝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차가워진 그녀의 태도와 뜸해진 연락주기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어째서.


적어도 이유 정도는 알고 싶었다.


"...왜?"


"그야 우리도 이제 곧 3학년이고... 너도 그렇지만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진로를 준비해야하잖아."

"무엇보다 프로 선수가 되려면, 나에게 있어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기거든."


"...그렇구나. 알겠어."


"..."

"미안해. 하지만 우리 둘의 미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료스케... 난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너도 알지...? 내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러니... 이해해줘..."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말이 틀린것도 아니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입시를 준비해야하고, 그녀는 다가올 드래프트를 준비해야했으니까.

명분도 충분하고, 결과도 나쁘지 않다. 연애 기간도 짧지 않았다.


행복했으니 됐어. 깔끔한 마무리인것에 만족하자.

그렇게 수없이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내어도, 고통스러운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목끝까지 올라온 감정을 애써 억주르며,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알겠어."

"...꼭. 꿈을 이루길 바래."


"...응. 너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


미련이 남았던걸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뜸을 들인탓이겠지.


그렇게 끝났다. 허무하게, 그리고 건조하게.


1년하고도 3개월. 


나와 그녀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연애는 그렇게 잠정 이별기에 들어섰다.


과연 우리가 다시 결합할 수 있을까?

모든것이 다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만약 희망의 끈이 사라진다면, 그땐 정말로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


그녀와의 첫 만남은 다소 인상적이었다.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공부를 마치고 하교를 하는 길.

어째서일까. 그 날 만큼은 평소 가던 길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었다.


발걸음을 틀어, 평소 지나갈 일도 없던 체육관 앞을 지나치던 그때.

그녀는 내게 일말의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어어... 어어...!! 거기 조심해!!!"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드러누워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안절부절하며 처다보고 있었다.


"허억... 허억... 괜찮아? 미안... 사람이 지나갈 줄은 몰랐어!"


인중 위로 느껴지는 따뜻한 느낌.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닦아보니, 이는 다름 아닌 피였다.

그것도 쌍코피.


"힉...! 코피... 코피...!! 어떡해... 미안!!! 정말 미안...!!!"


내 옆을 지나치며 천천히 굴러가는 배구공.

그제서야 나는 내게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 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는지, 아니면 죄책감에 시달렸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나를 기어코 보건실까지 대리고 갔다.

몇번이나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그녀의 완력은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처치를 모두 받을 때 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 어지간히 미안했었나보다.


피가 모두 그쳐 보건실을 나서려는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저,저기... 괜찮아?"


"어? 으응. 괜찮아. 멀쩡해."


"그래? 다행이다... 평소 이 시간엔 아무도 사람이 없어서... 고의가 아니었어. 정말 미안해..."


살면서 이성과 그토록 길게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몇마디 대화를 나누며 나는 나와 그녀 사이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져감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앗...! 저기,나 너무 오랫동안 체육관을 비우면 안 되어서... 먼저 가볼게!"


"엇... 그,그래? 알겠어! 어서 가봐."


"아깐 미안했어! 그럼 안녕!"


인사를 마친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듯 눈 깜짝할 사이에 계단 윗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도 나는 여운에 잠겨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또 만날 수 있을까 와 같은, 바보 같은 망상에 잠긴 채.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이미 그녀에게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와 그녀의 인연은 그렇게 짧고도 '매우' 인상적인 만남으로 시작된 것이다.


***


그녀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평소에는 서로 대화할 일이 없어서 나도, 그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자주 마주치기 시작했다.

조별과제를 시작으로 교과서 옮기기 당번, 청소 당번, 급식 당번까지.

사과로 시작된 대화는 어느덧 서로간의 안부를 묻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그녀는 어느샌가 내 일상속에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다.


아이자와 하나에.

그녀의 이름은 아이자와였다.


나는 그녀를 아이자와라고 불렀고 그녀는 나를 미나즈키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자와면서 동시에 아이자와가 아니었다.


서로간에 이름을 불러준다는것은 상당히 친해졌다는 의미일터.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있어 그녀는 하나에였고, 나는 료스케였다.


단순한 친구라기엔 너무 가깝고, 연인이라기엔 다소 먼.

그런 애매한 관계가 지속될 무렵, 사건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하교시간, 갑작스레 쏟아진 소나기.


다행히 나는 우산을 준비했기에 비를 맞는 일 없이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서 누군가가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는게 보였다.


흠뻑 젖은 긴 흑발 생머리에 비교적 큰 키. 

아이자와였다.


"뭐해?"


"...?"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아이자와의 뒤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이자와의 상태는 영 말이 아니었다.

흡사 물에 빠진 생쥐처럼 폭삭 젖은 아이자와는 힘없이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안녕."


"어...그래. 안녕."

"...우산 없어? 씌워줄까?"


아이자와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그녀의 발걸음은 멈출줄을 몰랐다.


"우산은 있어."


"있다고? 근데 왜 안 써? 젖으면 춥잖아."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아무 것도."


어째선지 아이자와는 대화를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꽉 막힌 벽에 가로막힌 것 처럼.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아무 일 없기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이 이러고 다녀?"


나는 아이자와의 걸음에 맞춘 속도로 그녀 옆에 붙어섰다.

물론, 계속 우산을 씌워주는것도 잊지 않았다.


"...넌 왜 계속 나를 따라다녀?"


"ㅁ,뭐? 그게... 친구니까?"

"미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그런 뜻이 아니야."

"넌 내가 싫지 않아?"


그녀의 눈빛은 공허함 그 자체였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공허.


아이자와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지금 몹시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은근 슬쩍 아이자와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가 왜 싫어..."

"대체 누가 널 싫어하겠어? 넌 배구도 잘하지, 성격도 친절하지. 공부...는 좀 아니어도."


"...농담할 기분 아니야."


"미안... 재미없었구나..."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건데?"


나는 아이자와의 감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이자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왜 말해줘야해?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너랑 내가 친한 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해줘도 넌 모를거야."


아이자와는 나를 피해 다시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말해줘. 말해주면 되잖아."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너가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료스케."


문득 걸음을 멈춘 아이자와는 뒤따라가던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넌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어느새 나의 바로 앞에 우뚝 선 아이자와는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뿐이잖아. 넌 내 가족도 아니고 그냥 친구일 뿐이잖아."

"...너무 많은걸 알려고 하지마 료스케. 때론 그냥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것 일 때도 있으니까."


아이자와는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나는 그저 무력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문득 그녀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동안 내린 비로 인해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등.

그 날 따라 유독, 나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야위어보였다.


"...따라오지 말랬잖아."


"싫은데. 그런 몰골로 말 해봤자 설득력 없거든."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거라니.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도움을 줘?"


"료스케 제발. 돌아가..."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나보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데, 나도 알건 다 알거든?"

"너 배구부인거 모를줄 알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든!"


"...!"


순간 아이자와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지만 그 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래도. 그것뿐이잖아."

"내가 배구부라는거. 그건 모두가 알거야 아마... 너도 똑같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도와주겠다는거야?"


"아무것도 모르니까 너가 알려줘야지."

"...당연한거 아니야? 내가 텔레파시가 있는것도 아니고."


나는 아이자와에게 다가가 우산을 건냈다.

아이자와는 받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내가 우산을 씌우는 것 까지 막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신경 써주는거야? 내가 뭔데?"


이윽고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눈물인지, 아니면 단순히 얼굴로 떨어진 빗방울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이 눈물로 느껴졌으니까.


"친구?"


"...친구?"


"그래, 친구. 친구가 힘들 때 돕는건 당연한거지."

"그리고 도와주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해? 그냥 내가 돕고 싶으면 돕는거야."

"무엇보다... 적어도 내 눈에는 네 모습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 처럼 보였거든."


"...칫. 지랄..."

"무슨 만화 대사처럼 말한다 너..."


돌아온것은 핀잔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그녀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지는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머지않아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우리는 잠깐 동안이지만 소소한 웃음을 참으며 킥킥거렸다.

덕분이었을까. 방금전까지 아이자와를 둘러싸고 있던 어두운 기운도 어느 정도 풀린 것 처럼 느껴졌다.


"...료스케."


"응?"


"넌 모든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어?"


***


"...너도 알다시피 난 배구부잖아."

"내 입으로 말하기엔 좀 부끄럽지만 내가 좀 잘하거든... 그런데...야 웃지마."


나와 아이자와는 함께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대로 그녀를 보냈다간 정말 큰일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와 그녀 사이의 벽이 다시금 허물어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자와의 태도도 처음에 비해 많이 유해진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요즘은 약간... 지친다고 해야하나."


"지친다고? 너 배구부 에이스 아니야?"


"그래서 지친다는거야. 생각해봐. 너가 에이스라면 어떨 것 같은데."

"...모두가 너에게 열광하고 인기가 많아진다? 그건 다 헛소리일뿐이야."

"인기가 많아진 만큼 실수는 용남되지 않고... 요구되는 기대치는 점점 더 높아지고..."


"..."


"확실히 요즘은 예전같지 않다고 느껴. 내 기량이든, 내 태도든간에."

"뭐랄까... 약간 더이상 배구를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야하나..."


늘 밝던 아이자와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지했다.


나로써는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히 고통스러웠겠지. 이런 고민을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겠지.


에이스란 그랬다.

고독하며, 항상 최고의 위치에 있어야만하는 존재.


어쩌면 아이자와는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커다란 직책을 강요받은게 아니었을까.


"...바보같지. 이렇게 태평하게 넋두리나 하고 있고."

"하지만 이젠 모르겠어. 내가 뭘 위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지..."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만약 내가 아이자와의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너가 처음 배구를 할 때 세운 목표가 있을거 아니야."

"전에 누가 그러던데, 슬럼프가 왔을때는 목표를 세우면 조금 나아진다더라고."


"목표..."


아이자와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 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덧 갈림길이 나타났다.

보통의 경우라면 우리 둘 다 이곳에서 갈라져 서로의 길을 갈 터.


그녀에게 배웅을 하려고 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고뇌하던 그때, 아이자와가 말했다.


"왼쪽으로 가자."


"왼쪽? 어... 너희 집 방향인데?"


"왜? 도와주겠다며?"


꼼짝없이 아이자와의 손에 붙들려 끌려간 길.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아이자와의 집 앞이었다.


"비... 그쳤네."


아이자와의 말 처럼, 정말로 비는 이미 그친지 오래였다.


"하하... 정말이네. 왜 몰랐지..."

"흠흠... 어쩌면 하늘도 감동한게 아닐까?"


"...방금 너, 굉장히 재수 없어보인거 알아?"


"엣."



"큭큭큭... 아... 이렇게 웃은게 얼마만이지... 이야기 하니 좀 낫네... 뭔가 편해진 기분이야."

"고마워, 료스케."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아이자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온것처럼 보였다.

이전의 어두운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다시금 바라본 아이자와는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곳에는 오직 웃음. 또 웃음만이 존재했으니까.


***


"료스케. 이번 주 주말 바빠?"


쉬는시간에 꾸벅꾸벅 졸고있던 나에게 아이자와가 다가와 말했다.


"아,아니? 왜?"


"그게, 이번 주에 소년체전이 있거든."

"어때 좀... 보러오지 않을래?"


딱히 스포츠에 관심은 없었지만 주말에 약속도 없겠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거기다가 그 때까지 아이자와가 실제로 배구를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 다행이다..."


"응? 뭐라고?"


"아,아니! 아무것도."

"그,그래...! 라인, 라인으로 알려줄게. 대회 장소라던지 그런건 알아야할거 아니야?"


기분탓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아이자와는 유달리 들떠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이후 그 주 주말, 나는 아이자와가 알려준 경기장으로 가 그녀의 경기를 보았다.

경기장에서의 아이자와는 그동안 내가 알던 아이자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이자와는 열정에 불타올랐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운동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던 나지만, 그 순간 그녀들의 움직임이 "아름답다" 는 것 쯤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열정에 차 있었고, 머지않아 나도 그렇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내가 진심으로 경기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기결과는 25 대 10. 우리 학교의 완승이었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나를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것이 들렸다.

아이자와였다.


"정말 와줬구나, 료스케."


"그야 너가 와달라고 했으니까."


"뭐야 그게... 진짜로 와줄줄은 몰랐어."


우리는 서로 소소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아이자와의 제안으로 잠깐 동안이나마 함께 걷기로 했다.


"...그때 말했지? 목표를 정하라고."

"조금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 있는데... 내 꿈은 일본 최고의 배구선수가 되는거였어."


곧이어 아이자와는 피식. 하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웃기지. 일본 최고라니."

"알아. 나도 이상한거 아는데..."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솔직히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거잖아."

"그리고 허무맹랑하지 않으면 그게 왜 꿈이겠어? 허무맹랑하니까 꿈꾸고 목표로 하는거지."


이어지는 침묵.


내가 괜한말을 한건가 하고 괜스레 굳어있던 그 때.

갑자기 아이자와는 온 세상이 떠나가도록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그 소리가 컸는지,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돌아볼 정도였다.


뻘줌했던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왜,왜...! 난 진심으로 한 말인데..."


"히히히... 아... 정말 너와 만나고 부쩍 웃는 일이 많아진 것 같아."

"그리고... 배구도 요즘 즐거워졌어."


어느새 어두워진 길거리.

길가의 가로등들이 하나 둘 씩 빛을 내기 시작한 시점, 아이자와가 말했다.


"저기... 고마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사실 나 그때 배구 정말 포기하려고 했거든. 하지만 널 만나고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었어."


아이자와는 천천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차가운 겨울바람과는 다르게.


"너를 만나고 모든게 달라진 것 같아. 뭔가... 다시 한 번 꿈을 꾸고 싶어졌어..."

"모두 네 덕분이야. 료스케."


"엣,ㄴ...나?"


그때, 어디선가 아이자와를 찾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만의 환청인줄 알았으나 이는 아이자와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아이자와!!!!! 어디야!!!!"


"힛...! 나츠키 선배다... 미안! 먼저 들어가볼게!"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 료스케! 다음에 파르페 살게!"


황급히 달려나가는 와중에도 아이자와는 내게 미소 짓는것을 잊지 않았다.

그날 본 미소는 지금까지도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 이렇게 되라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배구공으로 맺어진 기묘한 인연은 그렇게 절정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


"왠 파르페? 너 답지 않게."


"씨이, 날 뭘로 생각하는거야. 나도 일단은 여고생이라고."


여느날처럼 학교를 마치고 아이자와와 함께 하교하고 있을 때 였다.

갑자기 불현듯 지난번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아이자와는 나를 근처 카페로 대려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것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 주문했던 파르페가 나오자 아이자와는 빨대를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빨대? 한 개 시켰잖아...? 나는 괜찮아! 너 많이 먹어."


"먹어. 나 혼자 먹기에 너무 많으니까."


"아니, 정말 괜찮은데... 네 돈으로 산거니ㄲ"


"씁. 먹으라고."


그녀의 강권에 나는 마지못해 파르페에 빨대를 꽂은 채 한 입 홀짝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내가 파르페를 모두 마시지도 않았는데, 아이자와도 내가 마시고 있는 파르페에 빨대를 꽂은 것 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 이었기에 차마 말릴수도 없었다.

직후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때. 맛있지."


"으,으응... 달달하네..."


"그치? 그래서 내가 이 맛을 좋아해."

"담백하면서도 달달하고... 포근하지. 너무 깊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은... 그런 맛이잖아."

"왠지 곁에 없으면 두고싶고... 허전함을 느끼는 그런 맛..."


아이자와가 말을 마치자 우리 둘 사이에는 다시금 어색한 기류가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언제까지나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고 해야하나.


그녀가 미약하게 내뱉는 날숨이 내 콧잔등을 서서히 간질이는 그 느낌이.

그 위화감이 내 심장으로 하여금 고동에 박차를 가해주었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라는 생각이.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한건 없었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속내는 본인이 알고 있을테니까.


그때, 갑자기 아이자와가 빨대에서 입술을 때어놓더니 말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음? 읍...! 콜록콜록... 뭐라고...?"

"음 그게 그러니까... 나도 너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분명히 조금은 심심하지만 중독적이잖아?"


분명히 대답을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자와는 그렇지 않은 듯 했다.

나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더니, 잠싯동안 창 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이자와는 내게로 불쑥 다가와 찬찬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응?"


"만약 그런 파르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것 같냐고."


"어... 그러니까..."


나는 섣불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알아차였었기 때문이랴. 지금 상황이 평범하지 않다는것을.

갑작스럽게 경직된 분위기에 한껏 고조된 감정.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뿐 이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제야 막 사춘기에 접어든 고교생의 머리로는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운 그런 감정이었기에.

이것이 나만의 추측은 아닌지, 정말로 아이자와의 진심이 그런 의미인지 등등, 여러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경직된 분위기를 얼버무리고자 떨리는 입을 열어 말했다.


"...아마 붙잡지 않을까...?"

"그토록 소중한 사람은 아마 흔치 않을테ㄴ"


"...그렇다면 붙잡을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덥싹.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자와는 내 손을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나는 그만 입 안 가득 머금고 있던 파르페를 바닥에 뿜고 말았다.

하지만 이도 잠시, 다른 모든것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어째서?" 였다.


"너... 그 말은..."


"...좋아해. 료스케."


수줍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파르페. 아이자와는 남몰래 나를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그 파르페로 여기고 있었던 것 이다.


담백하면서도 달달한, 그렇기에 달리 특출난 매력은 없지만 동시에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는, 기호품을 넘어선 필수품인 존재.

그제서야 그녀가 나에게 열변했던, 그녀 자신이 정립한 파르페에 관한 이론이 천천히 풀리며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어어..."


"...무슨 말 이라도 해봐...! 거절을 하려면 하던지..."


"아,아니 그게 아니라..."

"나 같은것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 해서..."


"...바보. 방금까지 말한건 뭘로 들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연인이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었다. 

강렬한 첫 만남부터 시작하여 서로 물 흐르듯 친해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연인관계로 까지 발전한 그런 인연.


눈 깜짝할 사이 그녀는 내 일상속 깊이 침투해 있었고, 그녀에게 있어 나도 그랬다.

우리 둘은 각자 서로의 마은 속 깊은 곳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며들고 있던 것 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와 함께 파르페 계속 먹어 줄거야?"


"으...으응. 그러자..."


나는 아이자와를 바라보며 어색하게나마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이에 그녀도 수줍은 미소로 화답하였다.


친구로써가 아닌 연인으로써 처음 짓는 미소.

분명히 어색했지만 그 사이에는 풋풋한 첫사랑의 감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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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모두 옛날 이야기.

미소의 감동마저도, 파르페의 단 맛 마저도 모두 퇴색된지 오래.

추억은 허물만이 남아 나 스스로를 천천히 옥죄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녀 앞에서는 애써 멀쩡한 척 했건만 상처가 너무나도 심했던걸까.


시간이 느려지고 공간이 왜곡된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조차도 알 수 없다.

그저 한 발 한 발, 걸음 따라 몸을 맡길 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으로 가면 아이자와의 집. 오른쪽으로 가면 내 집이 나타날것이 분명했다.


그래. 아이자와와 줄곧 함께 걷던 길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 혼자다.

아마 앞으로도 나 혼자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감자기 감정이 북받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뭐야."

"우산 안 들고 왔는데..."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자 나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닦아내고 닦아내어도 눈물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

이것이 빗방울인지, 눈물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이자와를 위해 그녀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바뀌는것은 아니었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위해 기약없는 기다림을 이어나가기엔 나의 마음이 너무나도 여렸던 탓일까.

갑작스런 이별은 며칠이 지나도 적응할 수 없었다.


"으흑.... 흑...."


아무리 울어도 끝이 없었다.

비는 그치지 않고, 그렇게 내 몸은 물론 마음마저 천천히 젖어가고 있을 때.


문득, 비가 그쳤다.



"뭐해?"

"...우산 씌워줄까?"


나츠키 선배였다.


***


빌드업을 빨리 끝내기위해 조금 무리한감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다음 편 부터는 이 정도로 길지는 않을 것 같음.


글이 너무 허전해서 급하게나마 그림판으로 삽화를 그려서 넣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반응 좋으면 다음 화에도 계속 넣도록 하겠음.


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다음 화는 최대한 빨리 써오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