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regrets/63021359
내가 쓴 소재인데 결국 자급자족하노;;;
------------------------
"...오빠, 나 진짜 발레학교 갈 수 있는거야?“
”응, 당연하지”
”진짜로? 장난치는게 아니라?“
”거짓말 아니라니까, 후순이 부모님이 너 기숙사까지 보내주신다고 했어. 너 하고 싶은거 다 해보래.“
“진짜야? 신난다! 오빠! 나 기숙사 가면 친구들이랑 코노도 가보고 그리고 음... 애들이랑 밤새는 것도 해보고...”
“너는 어떻게 벌써 놀 생각부터 하냐?”
------
시작은 사소한 계기였다.
우리 남매는 어렸을 때 사고로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 맡겨진 세상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런 남매.
그나마 위안인 것은 혼자인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에겐 동생이 있었다는 것.
보육원장님이 좋은 분이셨다는 것.
부모님이 그리운 날도 있었지만 그렇게 나쁜 일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주변에서 봉사 활동 오는 것.
그냥 그 주말도 또 어디선가에서 봉사활동을 왔겠거니 생각했다. 한번 보고 말 사람들.
후챈병원에서 왔다고 했다. 의료봉사를 하겠다고, 이사장 가족도 왔다고 했나? 근데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집 딸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으니까.
왜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 날 내내 그 애를 눈으로 좇고,
몸은 그 애를 쫓고 있었다.
사고는 단순한 이유였다.
아이들이 책장을 사다리 마냥 타고 올랐던 것, 보육원장님이 내려오라고 한번 꾸짖으면 없던 일이 되는 그런 사소한 일.
근데, 그 날따라 모두가 정신이 없었고 특히나 장난 가득한 아이들을 제지할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아이를 보았고
몸을 던졌고
내 세상은 모두 검정으로 칠해졌다.
-----
눈을 뜨니 온통 흰색이었다.
흰 바닥, 흰 벽지, 흰 천장, 흰 침대
심지어 내 옆에 있는 여동생조차 얼굴이 흰색이었다.
어디냐고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다 기억나니까.
“오빠, 오빠도 나 두고 가지마...“
”괜찮나 자네?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딸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나는 이 병원을 운영하는 이사장이고, 자네 수술은 내가 직접 집도했다네. 걱정말게, 많이 부러지고 심장이 갈비뼈에 찔릴 뻔 했지만... 재활만 잘 한다면 문제 없을거네. 재활도 내가 직접 도울거고“
그 집 딸, 후순이는 기적과도 같은 아이라고 했다.
극심한 난임이던 부부에게 10년만에 찾아온, 수없이 많은 시험관 시술 끝에 찾아온 아이.
그런 아이를 내가 몸을 던져 구했다고 한다.
“저기... 고마워, 난 후순이라고 해. 우.. 우리 친구 하지 않을래?“
“그래 좋아, 우리 친구하자“
-----
난임이라 어렵지만 후순이네 부모님은 항상 아이들로 북적이는 집을 원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를 반쯤 거두어, 은혜도 갚는 겸, 아낌없이 지원해주기 시작하셨다.
내 동샌 후진이는 그렇게도 원하던 발레 학교에 들어갔고 나도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후순이와 나는 항상 붙어다녔다.
나는 후순이를 좋아했다. 보육원에서 처음 본 그 날부터 쭉-
후순이도 날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 감정은 남매로서 좋아하는걸까?
아니면 그냥 나의 착각일까, 그래도 난 네 옆에 있는게 좋아.
우린 항상 붙어다녔고,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새 우리는 같은 의과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너는 너희 아버지를 따라서
나는 너를 따라서
후진이도 발레에 엄청난 두각을 보여서 해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시차 때문에, 그리고 서로 바빠서 연락은 뜸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잘했으니까 앞으로도 잘하겠지.
-----
”네? 아저씨, 정치 하신다고요?“
새학기 시작 전, 저녁 밥상에서 들은 소리는 다소 뜬금 없었다.
”글쎄, 그이가 원래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공천 제의도 들어오고.. 후순이도 의대 갔겠다, 후순이 병원 물려주기 전까지는 경영인 두어서 하면 되는거고...“
“아저씨 진짜 정치 하시려고요?”
“그래 뭐, 그렇게 됐다. 병원도 할만큼 했고, 나 없이도 잘 굴러갈 것 같고. 이 나이에 새로운 도전 하는것도 나쁘지 않지“
”그냥 후붕이 너도 후순이랑 빨리 결혼해서 병원을 물려받는게 이 아저씨 맘이 편할텐데...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개뼈다귀 같은 놈한테 딸 줄 바엔..“
“아이 참, 그런 소리 마세요... 저희 이제 대학교 들어갔는걸요”
아저씨는 결국 공천을 받아내 출마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
“후붕, 너 무슨 과 선택할거야”
“정형외과?”
“왜?”
“그냥, 너희 아빠가 정형외과잖아”
내 눈을 한참 바라보는 후순이
그리고 한 마디
”나도 정형외과나 갈까, 아빠도 좋아할 거 같고“
“그래? 진짜? 그렇게 막 정해도 돼?”
“너도 그냥 우리 아빠 정형외과라서 고른거 아냐?”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후순이 너는 무슨 이유 있어서 그래?”
”그냥 뭐 가고 나서 생각하는거지“
”...그리고 후붕이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
‘나비효과’
아주 조그마한 변수가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나중에 떠올리면 기억도 나지 않을 평범한 날이 됐어야 했는데.
새내기로서의 삶을 산지 한달 정도 됐을 무렵.
지하철에서 내가 성추행을 했다고,
여자와 그녀의 친구들은 나를 지목했다.
다른 목격자도 나왔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공갈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난 성추행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목격자라는 사람들이 짠 것 마냥 모든 진술이 똑같았으니까.
당연하게도 집에 연락이 갔다.
“너... 너 이 새끼, 키워준 은혜가 있는데 지금 이 타이밍에 그런 사고를 쳐?!”
아저씨에게 살면서 처음으로 손찌검을 당했다.
얼얼했다.
마음보다 뺨이.
“너 당장 짐 싸서 나가, 나가서 다신 돌아오지 마! 어디가서 우리 가족이 키워줬단 말 티끌도 내뱉지마!”
“넌 네 동생 인생 네가 망친거야, 아저씨는 너한테 크게 실망했다“
”후붕아, 이게 무슨 소리야? 성추행을 했다고? 너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나 정말로 안했어, 내가 왜 성추행을 해? 제발 내 얘기 좀...“
-짝
고개가 또다시 돌아간다.
얼얼했다.
뺨보다 마음이.
”듣기 싫어!”
”처음엔 공갈이라도 당한건가 싶었거든? 근데... 목격자도 많다면서, 너 지금 대놓고 거짓말 하는거야?“
”왜 들킬 거짓말을 하는거야? 너 내가 우스워? 내가 느끼는 배신감 생각도 안해?“
“그래도 솔직하게 얘기하면 한번 실수했구나 생각하고 하려 했어, 근데... 어떻게 그런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목격자도 있다잖아! 그것도 여러명이나!”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나가서 어디 구석에서 혼자 뒤지든 말든 알아서 해”
“너랑 나랑은 이제 모르는 사이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눈물이 흐른다.
후순이가 저런 말도 할 수 있는 애였구나.
새삼 몰랐다.
말하고 싶지 않은데, 더 아플 것을 아는데
”후순아, 너 어떻게 그런 말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너는 날 믿어 줘야지“
”듣기 싫고, 나가라고 했어“
없던 호랑이도 세 사람이 모이면 만들 수 있다고 했나, 하루 아침에 나는 성추행범이 되어버렸다.
평소 같으면 끝까지 억울하다 하면 다들 믿어줬겠지.
끝까지 억울하다고 하고 싶어.
내가 무죄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아저씨는 곧 출마하고,
양아들 같은 놈이 성추행을 했다 걸렸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질거고,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냥 믿을테니까.
내가 무죄인게 뒤늦게 밝혀져봤자 아저씨는 이미 낙선한 이후겠지.
무엇보다도, 내가 몸 던져 바친 후순이조차 날 버려서 더이상 목소리를 낼 힘 조차 없어.
그래도 부디 후진이, 후진이만큼은 모르게 하고 싶어.
-----
아저씨의 마지막 호의로 피해자와 간신히 합의했다.
합의를 한다는 것은, 내가 인정한다는 꼴이었고.
그래서 후순이와 가족들의 멸시는 더 심해졌다.
결국 나는 한 겨울 맨 몸으로 쫓겨났고
학교도 제적당한 채 보증금도 옵션도 없는, 햇빛 한 줌 안비치는 냉기가 도는 지하 원룸을 간신히 구해서 나왔다.
내 명예? 안위? 그런건 관심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머릿 속에는 후진이 생각밖에 없었다.
내 동생 후진이, 유일한 혈육, 하나뿐인 내 동생.
내 인생은 이렇게 됐어도 후진이 인생만큼은 망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저승에서 부모님을 뵐 낯이 없기 때문에.
일을 구해야겠다. 가진게 몸뚱아리 밖에 없으니.
-----
“신입, 얼굴은 순딩이처럼 생겨서 잘하겠어? 고생 하나 안하고 자란거 같은데?”
“그래도 단순 노동은 잘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가진게 몸뚱아리밖에 없는 갓 스무살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은 공사판 빼고는 없었다.
내 월세를 빼고 후진이의 등록비, 생활비, 기숙사비 등등을 대려면 내가 일주일 내내 일해야 겨우 맞출 수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공사장으로 1시간을 걸어간다.
버스비가 너무 올라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아침 내내 시멘트를 나르다가 먹는 현장에서 주는 점심, 이게 유일한 내 하루 끼니다.
그렇게 오후 내내 고되게 일을 하다가, 저녁 잔업까지 지원해서 퇴근을 해서 집에 또 걸어오면 어느새 자정.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주린 배를 붙잡고, 몸을 뉘이다가 잠시 쪽잠을 잔다. 그렇게 다시 새벽 4시.
쳇바퀴 같은 삶
돌고, 그렇게 돌고, 계속 돌고, 돈다.
어느새 두달이 지나고
뚜르르-
“어 오빠야? 왜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어?”
“아, 핸드폰 배터리가 다되서. 우리 동생 잘 지내지? 밥은 잘 먹고?“
”체중 관리 해야해서 다이어트 하고 있어! 조만간 콩쿠르 있어서! 이번에도 상 탈거야! 오빠도 봤으면 좋았을텐데“
”그러게, 언젠가 한번 방학 때 놀러갈게. 아프지 말고 그래도 밥은 꼭 먹어“
”아, 맞다 오빠! 생활비랑 등록비 아저씨 이름이 아니라 오빠 이름으로 들어왔던데 이거 뭐야?“
”아저씨 무슨 세금 문제가 있다고 내 이름으로 넣는 걸로 했어, 아저씨 당선됐잖아. 그런거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연습해“
쫓겨날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외롭고 슬프고 힘들어서, 후진이가 보고싶다.
-----
처음엔 샛노랬다.
그 다음엔 퍼렇게 질렸다.
그 뒤엔 새빨갛게 변했다.
내 눈에 보이는 온 세상이.
일하다가 병원에 실려갔다, 내가 일하다가 피를 토하고 피눈물을 쏟더니 쓰러졌다더라.
그럴리가, 난 더 일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하필 후챈 병원에 끌려왔다.
무서웠다.
죽는게 아니라, 돈을 더 못 번다는 것이.
지출해야 할 병원비가 무서워서.
후진이가 알아차릴까봐.
보호자가 있냐는 말에 끝까지 없다고 답했다.
연락두절이라고.
세상 혼자라고.
“그, 환자분. 잘 들으세요. 환자분 최근에 무리하거나, 밥을 잘 안드세요?“
”네, 뭐...잘 모르겠네요“
”자세한 건 검사를 해야겠지만, 제 추측컨대 희귀 유전병이 발발한 것 같습니다. 증상이 100% 똑같아요. 잠복해있다가극심한 스트레스나 영양실조가 오면 발발하는 병이에요“
”현대인은 안걸리지만 영양실조가 만연한 극빈국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지금 당장 검사하고 수술하지 않으면 세달도 못버티고 죽습니다“
“지금 바로 입원하시죠”
입원이 가능할리가 없다.
후진이는? 누가 책임지지?
그 애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연습하고 있을텐데, 차마 그럴 순 없다.
”아뇨,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정말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옛 정에 기대어서 후순이네를 찾아가야 하겠다고 맘 먹었다.
한번만 살려달라고, 염치 없지만
후진이를 위해서라도 나 좀 살려달라고...
-----
너와 내가 살았던 그 곳의 문 앞에서 난 무릎을 끓고 있다.
“아가씨께서 들여보내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안만나도 좋으니까, 이 편지라도 제발 전해주세요“
”그 어떤 것도 받지 말고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한번만이라도 제발...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옛 정을 생각해서 좋게 말할 때 돌아가주시죠”
“후진이를 위해서라도 이 편지를 전해줄때까지 절대 못 돌아갑니다”
“...”
“거기 두 명, 끌고 가서 정신 좀 차리게 한 다음에 차에 실어서 길가에 던지고 와”
경호실장의 말은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이루어졌다.
끌려가서, 두 명에게 실컷 맞은 뒤에, 뒷자석에 피떡이 된 채로 실려서, 던져졌다.
편지가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애석하고 안타깝게도 버려진 곳은 내가 일하는 공사판 앞, 알겠다. 끝까지 일하다 죽으란 계시인가 싶었다.
단 한 점의 후회도 없다.
최선을 다했고, 거부당했다.
아니, 단 하나 후회한다.
사망보험을 들어놓지 않은 것을.
------
유서
진통제 가격이 올라서
이제는 진통제조차 먹지 못해.
일하다가 한 시간에 한번씩 화장실에 가서 먹은 것도 없는데 피를 토하거든.
마음은 무뎌진지 오래였어.
매 순간 온 몸이 분해되는 고통이 찾아오기도 했고.
일이 익숙해질수록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껴지더라.
후순이는 뭐하고 있을까? 내 생각 한번이라도 할까
후진이는 나 없어도 잘할 수 있겠지? 못난 오빠라 미안해.
퇴근하면서 느꼈어, 오늘이 마지막 퇴근이구나.
더이상 나에게 내일은 없구나.
후진이에게 전화하고 싶지만, 아픈걸 들킬까봐 걸지 못하겠어. 사실 공중전화까지 갈 힘이 없어. 미안해.
한 겨울의 맨바닥은 정말 차갑구나
그래도 이 아무것도 없는 방에 있는 건 단 하나
나, 후순이, 후진이가 같이 찍은 사진
이때는 참 좋았었는데
후순아, 사실 나 너 보육원에서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많이 좋아했어.
너도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짝사랑은 여기까지인거 같아. 난 비록 고졸이 됐지만 꼭 내 몫까지 좋은 의사가 되길 바라.
혹시나 후순아, 나중에 내 무고가 밝혀진다면 그때는 후진이를 부탁해. 후진이에겐 넌 친언니 같은 존재잖아. 끝까지 부담만 줘서 미안해.
그래도, 후진아 오빠 부모님한테 안 부끄럽게 최선을 다했어. 나중에 다시 만나면, 오빠 고생했다고 말해줄거지?
꼭, 콩쿠르 우승해.
너무 졸려서 이만 줄일게.
안녕, 또 만나자.
------
후순이는 유서를 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미안해...끅, 내가 믿어주었다면... 이 차가운 바닥에서 얼마나 외롭고 아팠어...“
“다시 만나면, 꿈에서라도.. 나 때리고 욕해도 괜찮아... 정말 미안해... 후붕이 너한테 목숨을 빚졌는데 나는... 나는!”
절대 다시 못볼 것을 알았다. 그는 천국에 가고, 나는 지옥 가장 깊은 곳에 떨어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후붕이가 죽은지 불과 몇 시간 뒤, 성추행으로 공갈하던 일당이 잠복경찰에게 잡혔다고 한다.
후붕이가 합의했던 그 놈들이었고, 우리 집은 온통 뒤집혔다.
아빠는, 후붕이의 목숨을 팔아 당선됐다고 자책하며의원직을 사퇴했고 서재에 박혀 나오시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 더이상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후붕이의 원룸에 처음 들어갔을 때 보았던 모습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우리가 찍은 사진을 쥔 채 잠든 것처럼 누워있는 후붕이었다.
눈엔 눈물 자국이 가득하고,
책상 위엔 눈물로 번진 유서가 있었다.
너무 슬퍼 주저앉은 나는 기어가서 후붕이의
손을 잡았다.
“후붕아...? 아니지...? 일어나 봐. 손이 왜 이렇게 차갑지?“
그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집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후붕이의 행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공사장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17시간씩
일했다는 것, 그 이유가 후진이의 학비 마련을 위해서라는 것. 밥 한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1년을 그렇게 살았다는 것.
이런 곳에서 후붕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려진 채 방치됐다.
부검 결과 후붕이를 데려간건 유전병이었다.
진통제 성분 하나 나오지 않았다.
진통제를 먹어도 의사가 매 순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거라고 했다.
진통제도 없이 후붕이는 버티다가 떠났다. 한달만 버텨도 오래 버티는데, 의지 하나로 그 시간을 버텼다. 오직 동생을 위해서.
그렇게 착하고, 속이 깊은 사람을 나는.
말 한마디 들을 생각조차 안하고 뺨을 때리고 내쫓아버렸다. 나는 때려죽일 년이다.
의사가 내게 다가와 종이를 한장 건네줬다.
“후붕씨, 저희 병원에서 진단받은 기록이 있네요? 그때 수술 받았다면 재활하면서 괜찮아졌을텐데...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멍과 흉터가 남아있는데, 시간이 좀 된거라서 죽음과 연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진단? 흉터? 멍? 후붕이가 우리 병원에 왔었다고?
미친 사람처럼 그 종이를 낚아챘다.
날짜를 보자마자,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후붕이가 거지꼴을 하고 찾아온 날, 경호실장에게 내쫓으라고 말한 것. 말을 듣지 않으면 손봐줘도 괜찮다고 말한 것.
후붕이는 자신을 살려달라고 말하러 온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머릿속에서 온갖 끈적하고 더럽고 어두운 것들이 가득해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아냐... 그럼 안돼...!! 아냐! 끄윽, 그럼, 내가 죽인거야? 후붕이를 내가 죽인거야? 아흑....”
“후붕아,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내가 대신 죽었어야 해... 나같은 년이 죽었어야 해...”
”내가 병원에 말 한마디만 했으면 살 수 있었는데“
“우리 다음 생에서도 만나지 말자, 저승에서도 만나지 말자. 나같은 쓰레기보다 너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해, 미안해...“
나는 검시대 위에 누워있는, 차가워진 후붕이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우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다음 생에서도, 저승에서도 후붕이가 나를 다시 만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그게 내 유일한 속죄니까.
-----
“...거짓말 하지마, 누가 죽어? 그럴리가 없잖아“
”오빠가 자기 목숨 팔아서 내 학비 대다가 죽었다고? 당신들이 내쫓아서? 믿어주지도 않고? 어떻게 몇십년을 봐 놓고 그렇게 하루 아침만에 내쫓아?”
오빠의 부고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진이는 후순이 집에 바로 찾아왔다.
후순이네 가족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당신들이 학비 내준게 아니라 오빠가 대준거라고...?”
“...하, 그럼 난 어떻게 살아가야해? 이제 발레만 하면 오빠 생각이 날텐데, 오빠 살려내!!! 당신들이 죽인거잖아!!!”
후진이는 후붕이의 유골함을 붙잡고 그곳에 정말 후붕이가 있는 것 마냥 이야기를 시작했다.
“... 오빠 미안해, 나는... 오빠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었고... 오빠는 나 때문에 죽었는데... 오빠, 나 그래도 오빠 말대로 1등 해왔어! 오빠, 오빠 말 잘 들었으니까 돌아와주면 안될까...? 다시 돌아와줘... 오빠 못하는 거 없잖아, 오빠 항상 해달라는거 다해줬잖아....”
“...당신들은 그 유골함 가지고 있을 자격 없어”
“...그래도 언니는 오빠 믿어줬어야 하는거 아냐? 오빠가 언니 목숨도 구해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가 있어?”
후순이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정말 미안해, 후붕이 데려가. 나같은 년이랑 있으먼 죽어서도 불행할거야. 죽어서라도 사죄할게“
-----
그 날 이후, 후진이는 발레리나로서 성공했다.
오빠를 가슴에 묻은 채,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늘에서도 오빠가 후진이를 볼 수 있게.
다시 만났을 때 오빠한테 부끄럽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