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


"...."


사오리의 머리 옆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그곳에는 선명한 탄흔이 정확히 두 개 새겨져 있었다.

이어지는 싸늘한 침묵에 모두가 말없이 침을 삼킬 뿐 이었다.


"...미소노 미카."

"날... 쏘려고 한건가?"


"후후... 후후후..."

"이건... 좀 아프네요... 후후..."


가까스로 벽에서 빠져나온 와카모.

평소답지 않게 온 몸의 중심이 무너져 후들거리는 상태임에도 그녀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오리를 발견한 그녀는 이내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쿨럭... 미카 씨.. 라고 하셨나요?"

"거기 있는 조마에 사오리가 어떤 짓거리를 했는지, 저는 알고 있다구요?"

"번거로울 필요 없이 제가 직접 말씀 드릴 수ㄷ..."


"쉿. 조용히."

"조용히 닥치고 짜져있어."


"후웃?"


탕. 타당.

불현듯 날아와 급소에 박힌 총알에 와카모는 속수무책으로 기절하고 말았다.

잠시 뒤, 총구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불어 날리며 미카는 말했다.


"삿짱."

"방금 저 불여시가 한 말이 사실이야?"


자신을 애칭으로 부르며 미소짓는 미카.

그러나 그녀의 총구는 결코 내려가는 법이 없었다.

서서히 떨리는 미카의 두 팔을 본 사오리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총구를 내려주지 않겠나."


"응? 삿짱. 대답해야지?"

"선생님을 죽였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으응?"

"난 우리 삿짱을 믿고 용서했는데... 지금 장난해?"


"..."


"저기, 빨리 대답해주지 않을래?"

"더 이상 뜸 들였다간 나 정말 미쳐서 삿짱을 어떻게 해버릴지도?"


"..."

"대가를 치뤘다고 생각했건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군... 선생."


"후훗..."

"대답해. 좋은 말로 할 때."


미카는 서서히 방아쇠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험악한 분위기에 어느 누구 하나 섣불리 그녀들을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리지 않았다. 


에덴 조약의 건 때문에 한껏 비호감의 이미지가 쌓였던 탓일까.

미사키를 제외한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사오리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상의 방관이나 다름 없는 상황.


이에 사오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선생님의 미소. 아츠코와 히요리, 미사키와의 행복.

흔히 주마등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녀의 눈 앞을 스쳐지나갔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사오리는 천천히 입을 때었다.


"..."

"사실이다."


"...뭐?"


"선생님을 향해 두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한 발은 그의 등을 관통하여 간을 비롯한 여러 장기를 꿰뜷었고, 다른 한 발은 그의 종아리를 터트렸지."

"그래. 내가 선생을 죽였다. 이제 됐나?"


정적.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사오리를 향해 쏠렸다.

한없이 잔인하고도 끔찍한, 살의와 증오만이 가득한 눈빛.


모두가 숨죽인 그 순간.

그녀들의 틈 사이로 불현듯 미사키가 튀어나와 외쳤다.


"ㅁ...뭐하는거야 리더!!!!!"

"지,지금 제정신이야???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말을...!!!!"

"...!"


모두가 자신을 적대하는 상황,

그러나 사오리는 퍽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이를 본 미사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제자리에서 떨 뿐이었다.


"...삿짱."

"다시 한 번 기회를 줄게. 그거 거짓말이지?"

"지금 나를 시험하는거지? 이거 몰래 카메라인거지? 응, 그런거지?"


"아니, 진실이다."

"...그리고 하야세 유우카는 죄가 없다. 오로지 나만의 선택과 행동이었ㄷ"


콰앙.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사오리의 몸이 하늘을 향하여 떠올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갈팡질팡하던 아루는 미카의 주먹에 묻은 붉은 선혈을 보고 나서야 겨우 사태파악을 할 수 있었다.

튀어오른 여러 파편들과 함께 땅으로 떨어진 사오리를, 미카는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크...크아아아악!!!!"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한없이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

흩뿌려지는 선혈과 처참한 효과음으로 하여금 듣는 사람마저도 그 고통에 공감하며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사오리는 목이 찢어지도록 수차례나 끔찍한 비명을 질렀지만 미카의 손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극히 차분한 손놀림으로 차례차례 그녀의 급소만을 노려 가격할 뿐 이었다.


"아...아아아악!!!! 리더!!!!!"

"이,이거 놔!!!!! 도대체 왜 말리는건데!!!!!"


자신을 붙잡은 학생들을 향헤 절규하는 미사키.

그러나 그녀들의 시선은 한없이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전범의 처형을 바라보는 포로 수용소의 피해자들 처럼.

그 눈매에는 광기마저 맴돌고 있었다.


"너희들... 리더를 죽게 내버려 둘 셈이야...?"

"장난해?? 빨리 가서 말려야 할거 아냐!!!!"


"...우린 널 살리려는거야 미사키."

"못 느끼겠어? 저기 끼어들면 죽음 뿐이라는 것을."

"사오리는 사오리의 선택을 한거야. 미사키, 너도 알잖아..."


"미사키 씨..."

"안돼요... 가지 마세요..."

"지금 가셨다간 사오리 씨와 공범으로 몰려 똑같이 끔찍한 꼴을 당하실게 분명해요...!!"


"놔... 이거 놔!!!!"

"리더는 무슨일이 있어도 날 살리겠다고 했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런데... 그런 내가 리더를 구하지 않는다는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미사키...!!"


"너가 그러고도 아리우스의 학생이야?? 사오리는 너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던거야?"

"그러니 이거 놔... 난 설령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리더를 살려야겠으니까!!!"


"미...미사키!!! 잠깐!!!!!"


자신을 붙잡은 노아와 아즈사의 팔을 뿌리치며, 미사키는 달려나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각오는 미카가 휘두른 주먹 한 번에 무력화되고 말았다.

단순한 주먹 한 번일 뿐인데, 그녀는 온 몸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끅... 아아아아악...!!!!"

"미.... 미ㅅ.... 미사ㅋ....."


"시끄러워."


"쿨럭, 후끄우으으윽....!!!!!"

"욱....!!!! 쿨럭,끄으윽... 아아아악!!!!"


사오리를 향한 미카의 구타는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뼈가 조각나고 장기가 터지는 소음이 모두의 귀를 찬찬히 괴롭히던 그 순간.

그녀들 사이로부터 누군가가 튀어나가 미카의 손을 재빨리 붙잡았다.


"크윽.... 큭...!!!"

"정신차려 미소노 미카...!! 넌 지금 이성을 잃었어!!"


"...하아? 넌 누구야?"


아루였다.

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루는 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 물며 그녀를 버텨내었다.

당황한 미카를 향해 아루는 처절하게 외쳤다.


"사오리의 죄는 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가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자격은 없어!!!!!"


"장난해? 지랄말고 꺼져."

"아님 너도 죽고싶은거야? 응? 그런거야?"


"크윽..... 그,그래도 안돼... 물러날 수 없어...!!"

"그녀를 죽이면 너도 똑같은 살인자가 되는거야....!!!!!"


"살인자? 후후... 그래, 그런거네."

"하지만 난 내 친구를 이미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이야. 문제될건 없어."


"ㅁ,뭐라고...??"


미카가 아루를 향해 손을 휘두르려던 그때.

또 다시 어디선가 누군가가 튀어나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 안됩니다...!!!"


"하아? 너희들 지금 뭐하는거야?"

"어이, 여우꼬리. 비켜."


"사오리씨가 비록 주군을 해쳤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건 본심이 아니었잖아요!!!"


"난 나기 짱을 죽일 때 본심이었겠어? 응?"

"모두 똑같아... 똑같은 살인자라고. 그러니 괜찮지 않겠어? 한 번 더럽힌 손, 또 한 번 더럽히지 뭐."

"방해되니까 빨리 비ㅋ... 어라라?"


이번에는 다리였다.

불현듯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에 미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130cm도 채 되어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의 어린아이가 미카의 다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있었다.


"멈추게...!! 한 번 선을 넘으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네!!"

"자네의 살인이 비록 처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번은 다르지 않은가!!"

"세뇌가 아닌 본심으로 저지르는 살인... 그건 정말로 안될일이네!!"


"뭐야, 이 꼬맹이는? 이거 안 놔?"


"절대로...!! 이 육신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놓을 수 없네!!"


미카는 반대쪽 다리를 들어 그녀를 때어내고자 했으나, 어째선지 그것마저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에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있는 힘껏 그녀의 다리에 매달려있는 하루카가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똑바로 미카를 바라보며 외쳤다.


"아...아루님을 해치지 마세요...!!"

"그 누구도... 더 이상 그 누구도 상처입어선 안 되니까요!!"


"..."

"..."

"하아... 지금 장난하자는거지?"


미카는 한숨을 쉬더니, 가볍게 두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방금 전 까지 사력을 다해 그녀를 붙잡았던 모두가 추풍낙엽처럼 쓸려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큭... 어이, 거기 여우! 팔을 잡아!!"


"안된다...!!! 살인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짓이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녀들은 끊임없이 미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리 내던져지고 상처를 입어도 멈추는 법이 없었다.


"...노아. 우리도 돕자."


"..네? 그치만 어떻게..."


"몰라... 하지만 이대로 사오리를 죽게할 순 없어..."

"나 때문에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뭐야 그게...!!!"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더 이상의 희생은 없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그녀들은 몸을 내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덧 기절한 미사키와 와카모, 잠든 세리나를 제외한 모두가 달려들어 미카를 막기 시작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미카가 성을 내며 말했다.


"정말... 뭐하는거야?"

"왜 계속 나를 막으려고 드는건데? 이 년은 선생을 죽였다고?"


"윽... 이,이런다고 선생님이 돌아오진 않아!!"


"그래서... 용서해주자고? 내가 뭔데? 너희들이 뭔데 얘를 용서해??"

"그게 용서될거라고 생각하는거야? 누가 하는데? 누가 이 년을 용서해 줄건데!!"


.

.

.


[내가 할게.]


"...어?"


그 순간 또각 또각 들려오는 구두소리.

이윽고 문이 열리고, 굳은 인상의 누군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총학생회장이었다.


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미카를 한 번 짧게 노려본 뒤, 천천히 싯딤의 상자를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선생이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매우 차가운 인상을 한 채로 말이다.


"서...선생님?"

"정말... 선생님이야?"


[오랜만이야 미카.]


"서,선생님... 어떻게..."

"죽은거 아니였어...?? 그,그게 난 말이야..."

"난 선생이 죽은줄 알ㄱ... 힛??"


총학생회장은 미카를 지나쳐 곧바로 사오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큰 상처를 입었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숨은 붙어 있는 상태였다.

선생은 크게 상심한 듯 사오리를 걱정하며 말했다.


[사오리... 괜찮아?]


"... ..... .."

"...쿨럭, 쿨럭!! 허억... 허억... 선ㅅ,선생...인가?"


[그래, 나야. 사오리.]

[늦게와서 미안... 아로나가 잠이 많아서 말이야.]


이윽고 총학생회장의 연락을 받은 세리나가 급히 달려와 사오리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뼈는 박살나고, 내출혈이 너무나도 심해 온 몸이 붉게 물들었을 정도지만 다행히도 회복은 가능할 수준이었다.

세리나가 그녀의 치료에 집중하는 사이, 미카가 선생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말했다.


"선생님... 다행이다. 이렇게나마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난 있잖아, 선생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그런데 삿짱이 그 범인이라는 말을 듣고 그만..."

"알아... 한심한거 아는데 너무 화가 ㄴ"


[미카.]


"으,으응?"


[방금 전 사오리에게 한 일. 진심이었어?]


"ㅇ,어어? 그,그게...."

"진심... 이긴 했는데 뭐랄까, 그래도 어느 정도 힘 조절은 했어..."


[미카. 사오리는 죽을 뻔 했어.]

[사실 지금도 어떻게 될지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수준이야... 그렇게 되면 난 또 한 명의 학생을 잃는거고.]

[날 걱정해준건 고마워. 하지만 수단이 잘못됐잖아.]


"선생님..."


[생명의 목숨은 지상 무엇보다도 소중해. 그것이 설령 악인의 목숨이라고 할지라도.]

[한 번 꺼진 생명의 불씨는 두번 다시 되돌릴 수 없어. 생명은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거야.]


"아,알겠어 선생님... 난 그러니까...!"


[사오리는 본심이 아니었어. 색채의 세뇌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벌인 일이야.]

[비록 그것 때문에 내 목숨을 빼앗는데 일조하긴 했지만, 본심이 아니었다는걸 알기에 난 용서할 수 있었어.]

[...하지만 미카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어.]


"...에?"


순간, 미카는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이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것도 미카의 행동을, 미카 자신을 향하여.

그녀의 두 손은 덜덜 떨렸고, 눈물은 차올라 어느새 그녀의 눈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듣는 선생의 적대적인 말.

그것이 미카에게 준 충격은 정말이지 어마어마 한 수준이었다. 

이윽고 미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을 꺼내었다.


"ㅁ,뭐라고? 방금 뭐라고... 한...거야?"

"용서... 할 수 없다고...? 내가...? 나를...??"

"ㄱ...거,거짓말...이지? 난 선생님을 위해 싸운거라고...??"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할지라도 미카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 할 수 없다는 말이야.]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미카는 멈추지 않았을거잖아? 내 말이 틀려?]


"아....아니야... 아니야 선생님...."

"그...그러니까 나는.... 그러니까....!"


[아무리 포장에 포장을 거듭해도, 미카.]

[결국 너가 사오리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아.]

[...나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살인을 가르친 기억이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선생은 지긋이 한숨을 내쉬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안타까움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듯 한 탄식 소리.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그의 한숨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 했다.

이에 가슴이 철렁한 미카는 총학생회장의 다리에 매달려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 아아,아니야... 선생님... 내가 잘못했어..."

"ㅁ,미안해.... 미안.... 사과할게...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나쁜년이야... 정말로...!!!"


[...]

[사과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사오리야.]


"그,그렇지만...!! 선생님... 내겐 선생님 뿐인걸? 선생님 밖에 없는걸?? 응?"

"모르겠어... 모르겠어..!!! 사오리는 몰라도 선생님이 없는 삶은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응? 제발..."

"ㅂ...부탁이니까 제발... 제발 날 싫어하지 말아줘...!! 착한 아이가 될테니까..."


[하아...]

[그동안 잘 이겨 냈잖아 미카. 그런데 어째서 또 폭력을 휘두른거야?]

[다른건 몰라도, 생명이 직결된 사안인 만큼, 이번 만큼은 절대로 그냥 못 넘어가.]


"...선생님?"


[미카.]

[...너에게 정말로 실망했다.]


"엣."


그녀를 바라보는 선생의 눈빛은 냉담하기 그지 없었다.

이전의 사랑과 애정이 넘치던 시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채, 오직 경멸만이 남아 있을 뿐 이었다.


이내 미카의 두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총학생회장은 그런 그녀를 발로 걷어낸 뒤, 경멸의 시선으로 째려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선생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총학생회장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멀어졌다.


"아... 아아...."

"그,그런... 그럴수가... 아아아...."

"어,어어떻게 이런... 이런일이...."

"거,거짓말이지...??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이게 뭐야...??"


결국, 미카는 무너지고 말았다.

또 다시 선을 넘었고, 또 다시 그의 호의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에덴 조약 사태 당시,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한 자신을 향해 마녀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던 그가.

남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하게 호의만을 보내주었던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향하여 강렬한 혐오와 경멸의 뜻을 내비쳤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보듬어주던 유일한 보호자가 사라진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피. 오직 붉은색 피 뿐이었다.


공주님에서 마녀로.

또 다시 타천을 하고 만 것이다.


[와카모는 깨어나는 즉시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줘.]

[그리고 미카...]


"..."


[...]

[다시 한 번 너의 행동의 무게에 대해 잘 생각해보길 바래.]


그 말을 끝으로, 부실의 문은 완전히 닫히고야 말았다.

선생이 사라지고 오직 적막과 흐느낌 만이 남아버린 부실.

그 순간, 주저앉아있던 미카가 불현듯 일어나 무기를 집어들었다.


"저,저기...? 미카씨? 끼야아아앗!!!"


순식간에 세리나를 밀쳐낸 뒤, 사오리를 향해 총을 겨누는 미카.

이에 모두가 당황하며 그녀를 말리고자 하였으나, 미카는 저번처럼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움직이지마!!!!"

"지금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때면 사오리의 머리통은 날아갈거야... 알겠어?"


"...꿀꺽."


미카의 눈빛은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상태.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광기의 눈빛에 어느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지,진정해 미카... 아까 선생님의 말씀 못 들었어??"


"선생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난 이미 끝났어. 이제 선생님은 더 이상 나를 바라봐주지 않아..."


"그래도... 그래도 이건...!!"


"닥쳐!!!!!!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래!!!!!"


타다다다당!!

미카의 총구가 하늘을 향해 불을 뿜었다.

갑작스런 총성에 아루를 비롯한 모두가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는 사이, 미카는 다시금 사오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후후... 후후후...!!!"

"이젠 다 필요 없어. 내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그러니 너... 너도 사라져야해... 너라도 사라져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거든...?"

"그러니까 삿짱, 부디 죽어주지 않을래? 부탁이야☆"


"미,미카...!!!! 멈춰!!!"


"조용히 해!!"

"너희들이 뭘 안다고 지껄여... 아무 것도 잃어본 적이 없으면서...!!!!"

"난... 흐윽, 난 이제 더 이상 티파티도 아니고... 나기 짱도 죽어버렸고.... 친구라곤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데....!!"

"그래서 남아있는건 오직 선생님 뿐이었는데... 이젠 그 마저도 사라졌어... 응? 뭔 말인지 알겠어??"


"그,그치만 미카 들어봐..!!!"

"나 역시도 친구들을 잃었어... 하루카는 죽음의 문턱에 있고 흥신소 맴버들은 연락조차 닿지 않아!!"

"너만 홀로 고통받고 있는게 아니라고...!!!"


"...그래서 어쩌라는거야? 너희들이 내 고통을 대신 짊어줄 수 있어? 아니잖아?"

"모르겠어... 지금 당장 이 녀석을 죽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

"그러니 꺼져줘, 제발. 아님 너희들까지 죽고 싶다는 뜻인줄로 알테니까."


"미카... 그래도..."


철컥.

미카는 말없이 총을 재정전했다.

협상 결렬의 의미였다.


"더 이상 날 말리지마."

"부탁이니, 제발."


"...으으. 으,으으..."


주변이 시끄러웠던 탓일까.

사오리는 천천히 두 눈을 떠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를 바라보았다.


"어라, 삿짱. 일어났어?"

"언제부터 깨어있었던거야? 응? 말을 하지."


"...모두 들었다."

"그렇게나... 내가 증오스러운가...?"


"음? 당연하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너는."


"미안... 하다..."

"너는 이전에 나를 한 번 용서해 주었지... 그런데도 나는 또 다시 너를 배신하고 말았다..."

"또 한번 너의 기대를 저버린거나 마찬가지... 미안하다."


"조용히 좀 해줄래? 때늦은 고해성사 따위 듣고싶지 않거든?"


"만약... 만약 나를 쏘아야 한다면...."

"정 나를 쏘아야 네 직성이 풀리겠다면... 그렇다면 나는 괜찮다."


사오리는 천천히 손을 뻗어 미카의 총구를 잡고 자신의 머리로 가져다 대었다.

벌벌 떨리는 손과는 달리, 그녀의 숨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한 상태였다.


"ㅁ...뭐하는거야?"


"자..."

"방아쇠를 당겨라. 나는 피하지 않는다."


"지금 뭐하는거냐고 물었어."

"쏘라고...? 지금 쏘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거야? 장난해 지금??"

"내가 그 정도로 한심해보여? 응? 그런거야??"


"...미안하다. 나는 이런데 익숙치 않아서..."

"어떻게 미안함을 표출해야할 지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그래서 뭐, 숭고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겠다 뭐 그런거야?"

"지금 나 동정해???? 내가 불쌍해보여? 비참하고 막 초라해보이고 그런거야? 응?"

"대체... 대체 날 뭘로 알고 있는거야? 뭐... 이렇게라도 하면 널 살려줄 줄 알고??"

"착각하나본데... 넌 어차피 죽을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미카..."


"죽을땐 죽더라도......"

"너만은 함께 대러갈거라고...!!!!!!"

"흐윽.... 흑... 그러니 제발... 내 손에 얌전히 죽어줘..."


미카의 눈가로부터 눈물이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분노와 악에 받힌 그녀의 눈빛으로 보며 사오리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윽고 미카는 다시 한 번 방아쇠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


"..."


"..."

"...난 괜찮아. 미소노 미카."


"..."

"....크윽!!!!"


결국,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미카는 성을 내듯 총기를 집어 던진 뒤 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하탈한 표정으로 말없이 불타오르는 창밖을 바라보던 미카의 눈가 주위로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그녀를 다른 모두들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뿐 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토록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거야..."

"응? 말해줘. 어째서 그런 일을 겪고도 그렇게 편한 얼굴을 할 수 있는거야?"

"난 널 죽이려고 했단말이야... 진심으로 널 죽여버리려는 심산이었는데... 두렵지도 않았던거야...?"


"..."


"나는... 나는 모든걸 다 잃어버려서... 나쁜 마녀가 되어버려서어..."

"그래서 널 해치려고 한건데... 어째서 날 비난하지 않는거야? 내가 밉지도 않은거야??? 널 죽이려고 했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난... 나는.... 흐윽, 나는....!!"

"이기적이고... 쓰레기고... 한꺼풀도 바뀌지 못했는데에에...."


"...미안하다."


사오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되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카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숨겨왔던 속내를 꺼내어 놓았다.


"선생, 선생님이 그러셨어... 날보고 실망했다고... 처음므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하셨다고... 훌쩍."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재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어...? 응? 안 그래...?? 당연한거지?? 난 모든걸 잃어버린거지??"

"이젠... 모르겠어...! 이 투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난 널 죽일 용기도 없고... 그냥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기 만족의 욕구 때문에 널 죽이려고 하고..."

"정말... 난 이제 어떡해야해...?"


"..."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

분홍빛 머리는 헝클어지고 날개는 흐트러져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지직거리는 헤일로와 더불어, 눈물을 닦아낸 미카는 불현듯 아루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저기, 빨간머리. 넌 알거 아냐..."

"듣자하니 사오리가 한 짓을 미리 알았다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는거야?"


"ㄴ,나? 나 말하는거야??"

"...그러니까 나는...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걸 알았으니까."


어물쩡하게 대답하고 넘기려는 아루였지만, 미카가 이에 순순히 속아넘어갈 리가 없었다.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미카와 한껏 지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오리의 눈빛. 그리고 모두의 시선.

한참동안 고민을 하던 아루는 이내 결심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도 머리로는 항상 용서를 해야지, 하면서도... 쉼지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사오리를 용서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어찌되었든 간에 선생님을 해친건 사실이니까."


"..."


"...하지만. 그건 선생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야."

"우리들은... 물론 우리들도 아예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야... 그래도, 그건 선생님의 제량이라고."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그럼 넌.... 훌쩍, 너는 저 년을 용서할 수 있어?"


"선생님꼐서 용서하셔다면, 응. 난 용서할 수 있어."

"피해자인 선생님께서 용서하시면 그걸로 된거야. 우리가 그에 반발을 표하던, 성을 내던 선생님의 일이니까..."

"사적제제는... 결국 또 한번의 증오의 연쇄라고 생각해."


"...리쿠하치마 아... 루..."


사오리는 힘없이 되내었다.

이윽고 힘이 빠져버린 사오리를 염려하는 아루.

이를 잠자코 바라보던 미카는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나더니 어딘가를 향하여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혹여나 또 다시 폭력을 휘두르려는게 아닐까 싶어 당황한 아루는 급히 그녀를 말리며 말했다.


"자,잠깐... 내 이야기를 뭘로 들은거야?"


"...갈거야."

"선생님께 사죄드리려 갈거라고."


"...응?"


"말리지마."


아루의 손을 처내며 미카는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무거웠지만, 동시에 이전보다 힘이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비로소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하나 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이윽고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린 아루.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뒤늦게 몰려오는 공포에 몸서리를 쳤다.

트리니티 학원의 최강자와 언쟁을 하여 생존하였다는 그 기쁨, 카타르시스.

이 기묘한 감정의 혼돈에 아루는 몸둘바를 몰랐다.


"끝난...거죠?"

"그,그럼 빨리 사오리씨를 옮기자구요!"


죽어가는 사오리를 들것에 옮기며, 세리나가 말했다.

이에 문득 정신을 차린 그녀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몰려들어 주변을 정리하고 사오리를 옮겼다.

비록 사오리는 맹렬한 거부의사를 밝혔으나, 그녀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ㅈ,잠깐 난 정말로 괜찮..."


"닥쳐, 리더. 내가 리더의 속뜻을 모를 줄 알았어?"

"잘 들어... 리더가 나에게 그랬듯, 나도 리더를 끝까지 살려낼거야..."

"그러니 제발... 죽으려고 하지마..."


"미사키..."

"...미안하다. 미사키..."


"미안하면 사과해..."

"살아서, 사과하란 말이야..."


"..."

"....흑, 흐흑.... 흐으윽..."


'그래... 이런 느낌이었구나, 미사키...'


깊어지는 밤.

사오리는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 이었다.


***


모든 사건이 일단락 된 후.

아루는 숨도 돌릴겸, 말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9시간 후면 작전이 시작된다.

수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또한 수많은 학생들이 그녀를 위해 길을 뜷어줄터.

그리고 그녀는 그 길을 통하여 하루카와 함께 성소를 쓰러트리면 되는, 간단한 작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두려웠다.


'선두? 선두라고?'

'정말로 나 혼자 그 거대한 성소를 부숴야 하는거야...?'

'싫어... 아무리 하루카가 있다 한들 나 혼자선 무리라고...!!'


서지 않는 확신에 머릿속이 절로 어지러워진 그녀.

아무리 명상을 하고 창 밖을 바라보아도 한 번 시작된 긴장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에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한숨만 푹푹 쉬던 그때.


툭툭.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본 그녀를, 체리노가 바라보고 있었다.

체리노는 말없이 미소지은 뒤 아루에게 초콜릿 한 개를 내밀었다.


"이...이걸 왜 나에게..."


"수고했다는 증표이지. 부디 받아주게."

"아까 전, 자네의 그 용기에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네. 자네는 이 초콜릿을 받을 자격이 있어."


근엄한 표정의 남성이 그려진 초콜릿, 체룐카.

분명히 헤어스타일로 보나 외관으로 보나 영락없는 체리노였지만 무언가가 다른 모습을 한 그것의 분위기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에 적잖히 당황한 아루는 자신도 모르게 포장을 뜯길 주저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가? 무언가 맘에 들지 않은겐가?"


"어,어어? 그런건 아니고..."

"이거. 너 맞지? 왠지 뜯기가 꺼려져서...헤헤."


"...어차피 거짓된 선동과 선전의 결과물일 뿐 이라네. 사양말고 뜯어주게. 부디."

"그나저나, 우리 붉은겨울 학원의 명물이니 한 번쯤은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게야."


"아하하... 그,그럼..."


아루는 천천히 포장을 뜯은 뒤, 모습을 드러낸 초콜릿을 한 입 깨물었다.

이내 깊은 카카오의 단맛과 더불어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질맛이 그녀의 혀를 감싸며 맴돌기 시작했다.

사태 발생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음식다운 음식에 아루는 자신도 모르게 감동하여 말없이 눈물을 글썽였다.


"ㅁ,뭐야 이거... 너무 맛있잖아..."


"후후... 말했잖나. 명물이라고."

"방금 것이 마지막이긴 했다만, 그래도 좋은 주인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군."


"이거... 이거 더 없어? 빨리 먹은게 너무 아까운데..."


"아쉽게도."

"이제 더 이상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가 없다네."


"...음? 그게 무슨 소리야?"


체리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루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재롱을 부리듯, 꺼져가는 불꽃처럼 천천히 뻗어나가는 그녀의 춤사위.

썩 좋은 춤선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춤은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오오... 멋지네."

"그런데 갑자기 춤은 왜..."


"...예전 생각이 나서 말이지."

"이 참에 물어보는건데, 자네는 내가 몇 살로 보이는가?"


문득 아루의 앞에 멈춰선 그녀가, 두 팔을 쭈욱 벌리며 말했다.

빨간 란도셀에 앳된 피부. 당연히 아루보다 한참 어린, 초등부의 그것에 필적할 것이 분명했다.

이에 아루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미안... 너무 귀여워서..."


"자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구만."

"...괜찮아. 이해하네. 어린아이 취급은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으니까."


체리노는 말없이 자신의 수염을 천천히 뜯어내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수염과 더불어, 온 몸을 감싸던 코트를 내려놓자 드러나는 의외의 근육.

그것은 도무지 초등생의 그것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다부지게 발달한 상태였다.


"ㅇ...에? 에에??"


"...발육부진이라고 하지."

"내게 있어선 저주이자 축복,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네."


그 순간, 아루는 체리노의 눈빛이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까지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이 밝고 순수하던 눈망울 대신, 피폐와 고독에 빛을 잃어버린 완폐아의 눈동자.

목소리도 이전과 같은 카랑카랑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아닌, 어둠고 낮은 여성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서야 아루는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중대한 착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체리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루를 바라보았다.

이에 그녀는 불현듯 느껴지는 중압감에 온 몸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ㅇ....ㅇ...왜....?"

"왜 그동안 이 모습을 숨겨온거야...??"


"딱히 숨긴 적은 없다네."

"단지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뿐."


체리노는 조심스레 아루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토모에. 그리고 자네 뿐이라네."

"선생은 물론, 마리나에게도 밝히지 않았지. 나는 나 자신이 진실로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사실을 밝히지 않기에."

"난 자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 선택을 한게야."


"ㅇ..왜?? 너 학생회장이라고 안 했어?"


"학생회장이기에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한게지."

"대중들을 움직이기엔 때때로 능력있는 군주보다는 무능력한 광대가 더 효과있는 법이니까."

"...이야기가 너무 멀리왔군. 내가 그대를 찾아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네."


체리노는 말없이 아루의 두 손을 잡았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난로처럼 따뜻했다.


"난 말일세... 모두를 지키지 못했다네."

"헤일로가 물들어버려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든게 사라진 뒤였지."

"토모에를 잃고... 선생을 잃고... 이미 내게있어 권력따윈 그저 허울에 불과했다네."

"하지만..."


"하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그들에게 보은할 길이 생겼다네."

"알아. 자네가 긴장된다는 것 쯤은. 다만 우리를 믿어주었으면 하네."


"그,그치만 내가 선두라니... 말도 안되잖아..."

"난 약하고... 거기다가 가는 길도 험난할테고... 안돼. 무리야..."


"...리쿠하치마 아루. 걱정하지 말게나."

"내게는 이곳, 샬레에 오면서 대동해온 수많은 전차 군단이 있지... 물론 이들을 조작할 승무원 또한 충분하다네."


"그래도... 내가 그렇게 홀로 가도 되는거야...?"

"다른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은 어쩌고... 솔직히 말해 지금도 두려워."

"작전이 나 때문에 실패하면 어쩌려나... 한 명만이라도 더 붙여주면 안되나... 싶고 막..."


그럼에도 아루는 두려웠다.

자신이 그런 과업을 맡기에는 다소 그릇이 부족하다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세뇌하고 있었다.

그런 아루를 말없이 바라보던 체리노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나. 렌카와 체리노가 붉은겨울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자네를 지켜보이겠네."


"...체리노."


"그러니 자네는 오직 전진하는 것만 생각하게나. 우리들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는 선택받은 사람이야. 자네와 그 보라색 친구를, 우리들은 믿네."


체리노의 눈빛은 이미 결의로 가득차 있었다.

사태가 터진 이후, 피폐하던 그녀의 심신에 처음으로 내리는 단비.

물론 중압감은 여전했지만, 실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의지에 아루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

.

.


'저...저는 아루님을 믿으니까요...!'


'쿠후후~ 나는 아루를 믿는다구?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나~'


'...너 자신을 믿어 아루. 우리들도 너를 믿을테니.'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부장.'


.

.

.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게. 리쿠하치마 아루."

"자네는 자네 생각만큼 여리여리한 인간이 아니니 말이야."


"..."

"...으흑, 흑... 흐윽..."


"...울릴 생각은 아니었다만."

"그럼,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네."


"...으응."

"고마워, 체리노."


"...응."

"부디, 담대하기를."


체리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방을 나섰다.

처음 마주하는 이방인에게 받는 위로.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 작은 꼬맹이에게라니.

여전히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아루에게 충분히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나도 참. 칠칠맞지 못하게 뭐하는거람."


그러나 그 순간.

아루가 막 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려는 그 순간, 갑작스레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아루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어... 어...??"


적막한 새벽.

시간을 확인해 보니 작전 개시까지 3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던 아루는 그제서야 자신이 깜빡 잠에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ㅁ...뭐야. 꿈이었어...?"


문득 밀려오는 허망함.

도대체가 어디서부터 꿈이고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루는 다시금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한 번 떠나간 잠이 다시 돌아올 리가 없었다.


결국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아루.

밀려오는 긴장 탓일까, 그녀의 눈빛은 퀭함 그 자체였다.

그러던 그때, 어디선가 자그마한 첫기침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크흠... 흠..."

"여기 있었구만! 콤라드."


"...에?"

"너는 어제 그... 체리노...?"


"오옷! 나를 아는가! 영광이군...!"

"크흠, 흠. 아니지... 영광인줄로 알게! 이 몸께서 친히 자네를 위하여 선물을 가져왔으니 말이야!"


체리노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아루에게 초콜릿 한 개를 내밀었다.

어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녀의 모습에 아루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체리노는 자신이 건낸 초콜릿을 홍보하기에 바빴다.


"이 초콜릿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붉은겨울 학원의 자랑이나 다름없는 체ㄹ..."


"...체룐카. 맞아?"


"우와아앗!! 어떻게 알았지...??"

"설마 우리 붉은겨울의 명성이 게헨나까지...?"


"어제 말해줬잖아. 이게 마지막이라면서."

"꽤나 감동이었는데... 그리고 맛있기도 했고."


"...흐음? 내가 어제 동무를 만난 적이 있다고..?"

"이상하군... 처음 듣는 소리이다만, 그건!"


"...뭐...라고?"


"나는 콤라드와 이야기 하는 것이 오늘이 처음인데, 아마 착각을 한게 아닐까 싶네!"

"그건 그렇고 입맛에 맞다니...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역시 체룐카 초콜릿이 아닌가! 맛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네, 음!"


"...정말 꿈이었구나."


"응? 방금 뭐라고 했나, 콤라드?"


"아아니, 아무것도."


체리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초콜릿 홍보를 이어나갔다.

근엄한 학생회장의 모습은 어디가고, 왠 개초딩이 되어버린 그녀.

생각해보니 이쪽이 본체였기에 아루는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아! 그러고보니 초콜릿을 수여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구만!"

"듣자하니 자네가 선두라지? 선두에 나서는 영광스러운 병사에게 사기증진은 필수인 법이지. 암. 그렇고 말고."


"...고마워. 체리노."

"아니, 회장님."


"...ㅁ,뭐라????"

"크,크흠... 이런 존대를 받는게 오랜만이라 감동이긴 하다만... 그,그래도!"

"회장님. 이란 호칭은 올바르지 않다네! 제대로 서기장이라...! 불러주게나. 크흠."


아루는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조용히 초콜릿을 한 입 물었다.

그러자 꿈에서 느꼈던 맛과 동일한, 달달한 카카오의 감질맛이 천천히 느껴졌다.


"고마워, 체리노 서기장."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아루는 말했다.

그러자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체리노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부디 담대하게, 아루 콤라드."


"...?"

"콜록! ㅁ,뭐? 방금 뭐라ㄱ..."


"크흠! 그럼 이 몸은 전차들을 점검하기 위해 이만 떠나보겠네!"


종종걸음으로 떠나가는 체리노.

순간이지만 어둡게 낮아진 체리노의 목소리에 아루는 천천히 그 전율에 몸을 떨었다.


"아, 깼어? 이제 작전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빨리 준비하도록 해."


그녀에게 무기를 넘겨주며, 히나가 말했다.

아루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후 하루카와 함께 작전의 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웅웅 울리는 전차소리와 더불어 그녀의 가슴도 서서히 고양되었다.


"...가자, 하루카!"


"ㄴ,네엡...!!"


두 팔과 다리에 잔뜩 준비된 총알.

이와 더불어 그녀와 함께하는 수많은 학생들의 군단까지.

이제 아루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늦네에... 미움약...

이러다가 저, 흑화를 해버려요...?


체리노 회장님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거야 보는 사람 맘이지 뭐. 개인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이와 별개로 이번 화는 시간에 쫒기며 쓴 탓인지 분량도 적고, 아쉬움이 참 많이 남음.

개인적으로 사오리와 미카의 서사를 더 늘리고 싶었지만... 미움약도 연중인 지금 나까지 연중하면 안되니까...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 번 전체적으로 싹 리메이크 하고 싶네.


다음화 최종장! 파이널 라운드! 많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