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23편


***


"허억... 허억..!!"

"자, 잠깐... 잠깐마아안...!!"


지친 숨을 고르며, 아루가 말했다.


"시간이 없어! 곧 있으면 저게 다시 살아날지도 몰라!"


"그, 그래요...! 저렇게 작살을 내놔도 1~2분 정도면 금방 다시 살아날거라구요!"


"자, 잠깐만 알겠는데...!!"

"일단 그 전에 무슨 상황인지부터 좀 설명해줘!"

"너희들은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하는거야? 눈도 아직 붉은 그대로잖아!"


아루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

이오리는 잠시 동안 고민한 끝에 한 가지 대답을 내놓았다.


"넌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하는데? 헤일로도 검은색 그대로잖아."


"나, 난 그야 처음부터 제정신이었으니까...?"


"아니 내 말은, 하... 시간 없으니 곧이 곧대로 말할게."

"돌아왔어. 신체는 영구적 변형인 것 같고..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으려나?"


"여, 영구적...? 돌아와? ㅁ, 뭐라고...??"


여전히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한 아루의 표정에 이오리는 깊은 짜증을 느꼈다.

이를 옆에서 가만 지켜보던 아코는 이오리를 말리며 아루에게 말했다.


"이오리의 말이 맞아요. 우린 모종의 이유로 변했다가 방금 막 돌아온 참이에요."

"흔히 당신들이 붉은 눈이라고 부르는 광폭화 상태가 끝났다는 의미죠."


"그... 그런..."

"다행..인건가? 다행인거겠지?"


"...다행이라."

"만약 우리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면 차라리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는... 계속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어... 바뀐건 오로지 인식 뿐이라고..."


"인식 뿐이라니... 설마 너희들도..."


"...응. 모두 기억하고 있어."

"내가 아코에게 한 일... 히나 부장에게 한 일까지 모두..."


이오리는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한 채 조용히 눈물만을 삼켰다.

우왕좌왕하던 아루도 그제서야 그녀들의 뼈아픈 통증을 깨닫고는 조용히 말을 삼갈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미, 미안..."


"...미안할 필요는 없어. 애초에 우리들도 각오하고 온거니까."

"모두에게 욕먹는 일 따위... 우리에게 주어진 형벌이라 생각하면 그만이야."


"아루... 씨라고 했나요?"

"혹시 히나 부장님의 행방을 알고 계신가요...?"


넌지시 그녀를 향해 묻는 아코.


"어... 조금 전에 해어졌는데."


"...그런가요."

"다행... 이다..."


말을 마친 아코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아루와 이오리는 그 광경을 그저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저는... 저는 히나 부장님께서 저에게 실망하신 줄 알고..."

"제가 그런 폭언을... 배신자... 라는 폭언을 하는 바람에..."

"그래서 떠나신 줄 알고 얼마나...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아코..."


"아까 이오리가 말했죠? 저에게 한 일을 기억하고 계신다고..."

"전... 저는 괜찮아요. 전 용서할 수 있어요. 다만 히나 부장은..."

"...흐윽, 흑 히나 부장님은...! 흐윽... 저희들을 어떻게 보실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서..."


무너져버린 아코와 그녀를 곁에서 말없이 보살피는 이오리.

이 모든 광경을 보며 아루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왜 다 내 앞에만 오면 멘탈이 무너지는거지...?'

'어라...? 나 혹시 그런 역할...?? 타인의 트리거를 자극하는 그런...?'


"크흠, 흠...!"

"저기... 괜찮다면 연락... 시켜줄까?"


"...네? 뭐라구요...?"


"어, 어어? 내 말은 그러니까..."

"히나랑 무전... 하고 싶지 않냐고. 나 이래 뵈어도 직통 무전 라인이 있거든... 헤헤."


"...아니요. 거절할게요."


"에? 어째서?"


"그야 저는..."

"히나 부장님께 그런 폭언을 한 저는 그럴 가치조차 없으니까요..."

"또 히나 부장님께서 절 반기실지도 유분수이고... 그냥 안하고 말죠."


"그, 그래도 과거의 인연인데 환영해주지 않을까...?"


"아뇨. 저라면 용서 못할것 같아요."

"아무리 세뇌니 뭐니 해도 결국은 본인 의지로 저지른 일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거구요."


천천히 흙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코.

이를 말없이 바라보던 아루는 품속에서 무전기를 꺼내 연결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아루??]


"으, 으응~! 히나 짱! 나야. 아루."


"...!!!!"


[...뭐야, 그 어색한 히나 짱이라는 호칭은?]


"다, 당장 그만두세요!! 제가 안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곧바로 아루에게 달려들어 무전기를 뺃으려드는 아코.

아루는 그런 아코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히나와의 무전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괜찮은거야? 선ㅅ...아니, 색체는?]


"당연히 괜찮지! 색채는 지금 일어나지도 못해!"

"다름이 아니라 바꿔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ㄷ..."


"하지! 말라구요! 악!! 제발 그만!!!"

"저를... 저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드시려고!!"


[잠깐. 잠깐만...]

[이 목소리는... 아코? 설마... 그런...!]

[아루. 잠깐이라도 좋으니 바꿔줄 수 있어? 부탁이니까!]


"...에?"


아루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아코에게 무전기를 넘겨줬다.

얼떨결에 이를 받아든 아코는 떨리는 목소리로 히나의 부름에 응답하였다.


"여보... 세요...? 히나 부장님...?"


[아코??? 너 정말 아코야????]

[응답해 아코!! 정말 아코 맞아...???]


"ㄴ...네... 맞아요..."


[아코...!!]

[너... 돌아온거구나...? 그치...?]


"네에... 일단은 그런데..."


[아코 너....!!]


무전기 너머의 침묵에 아코는 절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마른 침을 목 너머로 삼키며 들려올 말을 기다리는 아코.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히나의 말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 이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정말... 훌쩍, 다행이야....]


"엣, 에엣? 히... 히나 부장님...?"

"제가... 밉지 않으세요...??"


[뭐어..?? 내가 널 왜 미워하겠어...??]

[난 오히려 줄곧 걱정했는데... 흐윽... 아, 그래!]

[미운거 딱 하나 있어. 딱 하나...!]


"뭐, 뭔데요...?"


[왜 그때 날 감싸준거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내가 도망치라고 했잖아!]

[이제와서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어쨋든 아코. 나중에 만나면 엄청 갈굴거니까 각오해.]

[...그리고 잘 돌아왔어 아코. 맞다, 이오리는? 이오리는 어떻게 됐어...?]


"아, 이오리도 옆에 있는데 바꿔드릴ㄲ..."

"...이오리는 괜찮다네요! 그럼 부장님, 나중에 뵈어요...!"


[그래. 바로 그쪽으로 갈테니까. 유우카! 진로를 변경해줘!]


이윽고 끊어진 무전.

무전기를 도로 돌려받으며, 아루가 말했다.


"봐봐. 내가 환영해줄거라고 했지?"


"...네. 정말 그렇네요."

"... ... .... .."


조용히 흐느끼는 그녀를 위로하는 아루.

아루는 말없이 총기를 수입하는 이오리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린 이제 어디로 가는거야?"


"...없어."

"그냥 색채가 쓰러질 때 까지 쏘고, 피해 다니면 돼."


"ㅁ, 뭐어? 그게 무슨..."


"이건 게릴라 전이야, 아루. 전면전은 우리들의 몫이 아니야."

"때가 올 그 순간까지 우리는 게릴라가 되어야만 해... 알겠어?"


"때라니... 그게 무슨..."


"자, 저기! 색채가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아코의 손 끝이 가리키는 곳에서 색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에 아루와 이오리는 즉시 전투에 돌입하여 색채를 향한 무자비한 사격을 가했다.


그의 몸이 찢겨나가고 꿰뜷리며 육편이 되어도, 끊임없이 재생되며 몇번이든 살아나는 모습.

그 모습에 아루는 근원적인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저기, 이오리! 이거 언제까지 해야해?"


"뭘 언제까지야...!! 죽을 때 까지지!!"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나 싶었지만 실제로 그것 외에 별 다른 대처 방안이 없는게 현실이었다.

만약 저것이 깨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랐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깨어나자 마자 도로 눕히는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지속된 전투 덕에 그녀들에게도 서서히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 탄창이야...!!!"

"이오리, 탄약을..!!"


"뭐라고? 나도 이게 마지막인데!"

"그리고 네 탄약도 다 떨어졌어!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뭐어어??? 그럼 이제 어떡해!!"


"말했잖아! 피해다니면 된다고!"


그때, 이오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색채의 공격이 그녀들을 덮쳐왔다.

이미 수차례 재생을 하느라 힘을 써서 그런지, 색채의 몰골은 영 말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오리... 아코... 날 그렇게 속이다니 말이야."

"이거 꽤나 놀라운걸? 그렇다고 칭찬은 해주지 않을거란다?"


미처 재생되지 않은 턱뼈를 움직이며 말을 이어나가는 색채.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비주얼이었지만, 키보토스 전역에 솟아난 성소들 때문인지 그것은 결단코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

아루 일행은 닥쳐오는 색채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이동하였으나 색채는 그녀들을 마냥 보내줄 만큼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었다.


"푸슉"


"아악!!!"


거친 숨소리만 가득하던 정적을 깬 것은 아코의 귀를 찢는듯한 비명.

고통에 몸부림치며 부들거리는 그녀의 복부는 색채의 공격에 의하여 꿰뜷려 있는 상황이었다.


"....!!"


"아코!!!"

"....으아아아아아아!!"


이오리는 곧바로 총구를 돌려 개머리판으로 색채를 후렸으나, 그것의 두개골을 박살낼지언정 숨통을 끊지는 못했다.

잠시 뒤, 피튀기는 저항을 반복하던 이오리 또한 끝끝내 아코처럼 촉수에 꿰어 꼬챙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쿨럭...!!! 끄흑..."


"이, 이오리...!!!"


"오... 오지마...!!!"


달려오는 아루를 향해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들어올리는 이오리.

타오르듯 빛나는 그녀의 붉은 동공 너머로 느껴지는 의지에 아루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벌어진 성대 너머로 골골 거리며 흘러나오는 혈액을 말없이 삼키며, 이오리는 말을 이어나갔다.


"쿨럭... 어, 어차피... 우리가 치뤄야할 대가야..."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우리들이... 켈록.... 흐으... 쿨럭..."


"이... 이오리... 아코...!!!!"


아루는 턱밑까지 올라온 울분을 애써 삼키며 증오에 떨었다.

물론, 그녀도 바보같이 자리에 서서 마냥 이 광경을 바라보고만 싶은 것은 아니었다.


"크흑... 이, 이오리..."

"싫어... 어떻게 만났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왔는데 그런...!"


"아루...."

"부탁이야... 제발..."

"말했잖아...? 애초에 각오 했다고...."


"...크흣...!!!"


다만 지금 섣불리 다가갔다간 개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들의 마지막 각오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루는 너무나도 더럽고 치사했지만 몸을 돌려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멀어지는 아루를 보며 이오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서로 말없이 눈빛을 교환한 그녀들은 품속에 숨겨두었던 나이프를 꺼내어 색채를 향해 박아넣었다.


"...크흑!"


예상치 못한 고통에 잠시 주춤거리는 색채였지만, 그뿐.

곧이어 수많은 촉수들의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들의 몸통을 꿰뜷었다.


"...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이오리와 아코였으나, 그럼에도 그녀들의 눈빛은 빛을 잃지 않았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색채는 빈정거리는 듯한 어투로 그녀들을 향해 말했다.


"뭐야? 뭐가 그렇게 즐거운거야?"

"아프지 않아? 일부러 급소만 찔렀는데, 너희들은 왜 정신을 잃지 않는거지?"


"..."

"아직... 쿨럭, 아루가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어..."


"응? 그게 무슨 소ㄹ..."

"...젠장!!!!!"


순간, 이오리의 찢어진 셔츠 너머로 보이는 검은색의 블록들.

수많은 전선들이 한데 얽혀있는 가운데 어렴풋이 드러나는 기폭장치.

그리고 이는 아코도 마찬가지였다.


"ㅁ, 뭐하는거야!!!!! 너희들 진짜 죽고싶어???"

"바보들아!!! 너희들은 이제 신비도 없다고!! 진짜 죽는다고!!!"


"이제와서...? 흐흐..."

"흐흐.... 흐흐흐흐....!!!!!"


"하하.... 하하하하!!!"

"뭐어... 이제 충분히 멀어진 것 같네... 헤헤..."


자신을 향하여 분노섞인 광소를 퍼붓는 그녀들의 모습에 색채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물론 그녀들이 두르고 있는 폭탄은 그것에게 있어 극히 미약한 피해밖에 입힐 수 없음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녀들이 보여준 의지와 눈빛.

그 한없는 악의와 순수한 분노로 가득찬 눈빛이 색채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 '공포' 말이다.


"자, 잠깐... 멈춰!!!! 멈추라고!!!!"


"흐흐.... 흐흐흐.... 싫은데?"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아... 안돼... 그만둬..."

"그만둬!!!!!!!"


.

.

.


"안돼애애애애애애!!!!"


그 순간, 한 순간 외침과 함께 느껴지는 거대한 충격.

그 충격에 아코와 이오리는 그만 기폭장치를 놓치고야 말았다.


"끄흑.... 우와아아아악!!!"


이윽고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에 이오리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뿌연 시야 너머로 쓰러진 아코와 색채의 모습이 보였다.

이와 동시에 색채의 가슴팍을 꿰뜷은 거대한 창 또한 시야에 들어왔다.


색채의 가슴으로 부터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희멀건 액체.

은은하게 빛을 내는 그것은 혈액과는 다소 큰 차이가 있었다.


천천히 줄기를 이루어 흘러온 그것은 어느덧 이오리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오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빛에 매료되어 천천히 손을 뻗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변이 발생하였다.


가슴에 줄곧 느껴지던 고통이 일순간 사라졌다.

뿌옇게 흐려졌던 눈앞이 말끔해진 것은 덤이었다.


신기함도 잠시,기력이 회복된 이오리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색채의 가슴팍엔 여전히 커다란 창이 꽂혀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윽... 으윽..."

"잠깐... 저건 설마?"


창이라기에는 다소 울퉁불퉁한 모양새.

황금빛 인장으로 장식된, 뭉툭한 끄트머리는 그것이 평범한 창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표상이었다.


"이오리...!!!!"


그리고 잠시 뒤.

익숙한 허당의 목소리가 그녀들의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루...??"

"어째서.... 우리가 분명 도망치라고..."


"너희들, 바보야???"


"아악..!!"


이오리의 머리에 작렬하는 고통.

아루는 성난 울분을 삭히며 당황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그냥 갈 줄 알았어?? 너희들의 그 속셈을 모를 줄 알았냐고!!"


"하, 하지만 아루... 나는 그저... 아얏!!"


"바보... 정말 바보들이야!! 너희들은..."

"그렇게 타인의 피로써 지켜진 목숨... 남은 평생 발이나 뻗고 잘 수 있겠어?? 날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너희들은?"


아루는 천천히 이오리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녀의 타오르는 눈빛에 무언가를 느낀 이오리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젠... 도망치지 않아. 두 번 다시...!!!!"


아루는 색채의 가슴팍에 꽂혀있던 창을 뽑아 들었다.

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총열이 한껏 날카롭게 깎인 그녀의 고유 무기 "와인레드 어드마이어".

그제서야 이오리는 색채를 꿰뜷었던 의문의 창이 다름 아닌 아루의 무기였다는 것을 꺠달을 수 있었다.


"아... 아루...!"


"끄아아아아아악!!!!"


잠시 뒤, 끔찍한 비명과 함께 움직임를 멈춘 색채.

그것의 가슴으로부터 뿜어져나온 물줄기는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은 양은 또 아니었던 그 액체는 이윽고 빗방울처럼 천천히 그녀들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온 몸을 감싸안는 그것의 내음은 여전히 혈액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다소 요사스럽고 신비한 향이었다.


"이... 이 느낌은... 뭐지...?"

"힘이... 몸에 힘이 다시금 나는 것 같아..."


"응, 나도... 뭔가 이상해... 잠깐, 혹시 이게...?"


아루는 재빨리 바닥에 고인 액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이어 찰방, 하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빛이 아루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

"뭐, 뭐야??? 지금 뭘 한ㄱ..."


"...이제야 알겠어. 색채가 그토록 강했던 이유를... 우리가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유를...!!"

"바로 이거야... 이게 그 정체라고!!"


아루는 양손 가득 액체를 담아올려 이오리의 눈앞에 내밀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이오리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에? 이 액체가?"


"응! 이 액체... '신비' 말이야!"

"...이해가 잘 안 되나 보구나. 그러니까 이게 우리들ㅇ..."


"자, 잠깐!!! 아루!!!! 뒤에!!!!!"


"...뒤에?"


다급한 이오리의 외침.

아루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루... 리쿠하치마 아루...!!!"

"너는 그 답을 알고 있구나..? 그렇구나???"


그러자 그곳에는 온 몸이 볼품없이 쪼그라든 색채가 있었다.

몸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입을 있는 힘껏 벌린 채 말이다.


"헉...!!"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오리는 곧바로 바닥에 떨어져있던 아루의 창을 들어올려 색채를 겨누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은 불현듯 자신을 밀어낸 아루의 행동에 가로막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 아루..!!!!!"


덥썩.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색채의 입은 닫혀버렸다.

잠시 뒤 꿀꺽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아루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야 말았다.

남은 것은 오직 정적, 한없이 잔인한 정적 뿐이었다.


"아... 아아아아...."


"하하.... 하하하... 이젠... 이젠 모두 끝났어..."

"드디어..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탐구를 끝마칠 순간이 찾아왔어....!!!!"

"하아.... 하아...!!! 아루.... 리쿠하치마 아루...!!! 헤헤.... 흐헤헤헤헤...!!!!"

"...덕분에 살았다. 덕분에 진리에 한층 더 다가설 수 있었어...!!!"


"아아... 안돼... 안돼안돼안돼....!"


온 몸을 기괴하게 떨어대며 거친 숨을 내뱉는 색채.

그런 색채의 모습을, 이오리는 패닉에 빠진 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려움과 죄책감에 떠는 그녀.

그녀 뇌리에 기억된 아루의 마지막 모습은 두려움도, 평안함도 아닌 평범함.

다른 일말의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평안함만이 그녀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그 사실이 이오리의 가슴을 더더욱 옥죄어왔다.


"안돼... 안돼애애애애애...!!!!!!!"


좌절하는 그녀 앞에, 주인을 잃은 채 바닥에 떨어진 구두.

아직 따스한 온기를 간직한 그것은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그 비극의 현장을 지킬 뿐 이었다.


.

.

.


"...아루. 아루!"

"일어나 아루.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어째서인지 아루의 몸은 따뜻한 기운에 뒤덮혀 있었다.

왠지 모를 포근함과 더불어 한없는 편안함이 피곤에 지친 그녀의 육신을 서서히 이완시켜 주었다.


"눈을 떠, 아루!"
"괜찮아.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까...!"


실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휴식. 

도무지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듯한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귓가에 계속해서 울리는, 의문의 목소리에 아루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루...! 다행이다. 정말 눈을 떠주었구나..."


"으... 여, 여긴..."


"뱃속이야. 아, 정확히는 심상세계라고 보는게 맞을테지만."

"괜찮니? 괜찮은가 보구나. 다행이야... 행여나 못 만나면 어쩔까 했거든."


흐릿한 시야 너머로 아른거리는 한 남성의 형체.

한없이 밝고 따뜻한 주변과 더불어 서서히 다가오는 그것에 아루는 정신이 절로 번쩍 드는 듯 했다.


"우, 우왓...!!!"


"워워...! 진정... 진정해."

"나야. 나야 아루...!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봐봐."


듣는 것 만으로도 절로 가슴이 차분해지는 의문의 목소리.

아루는 한껏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소리가 시키는대로 천천히 눈을 비볐다.

그러자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는 차츰 제 빛을 찾아 맑아지기 시작했다.


"어때... 모습을 알아보겠어?"


"이 모습... 이 머리카락... 어?"

"어... 어어어어??? ㄱ... 거, 거짓말... 그런...!!"


"후후... 거짓말 아니야."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너는 느낄 수 있잖아?"


기껏 닦아낸 눈 앞이였건만, 흘러내리는 눈물 탓에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닦아도 닦아도 끊임없이 차오르는 눈물. 이는 상실이나 고통같은 이유로 지긋지긋하게 흘려온 눈물과는 사뭇 달랐다.


"선... 생님...?"


"...응. 오랜만이야, 아루."


그것은 기쁨.

기쁨의 눈물이었다.


"선생님... 어째서...?"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살아있는거야...?? 그때 분명히 선생님은 죽..."


"...분명 그랬었지. 하지만 나는 죽었으면서도 죽지 않았어."

"대신 이렇게 기억의 한 켠에 남아... 너와 대화할 날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루."


자신을 향하여 환하게 비춰오는 미소는 이전에 색채가 보여주었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에 아루는 느낄 수 있었다.


"...뭐어, 정 못 믿겠으면 증거를 댈 수도 있어! 이를테면 너의 애장품 지갑이라던가."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선생님..."

"믿어. 믿으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아루는 일순간 선생의 품에 그녀의 몸을 의탁하였다.

알싸한 향기와 더불어 진홍빛 잔광이 그녀와 선생의 주변을 서서히 휘감았다.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아루는 한껏 풀어진 목소리로 서서히 되내이기 시작했다.


"이 향기... 이 냄새... 선생님의 꿉꿉한 셔츠 냄새..."

"모두 그대로인데...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선생님의 형태 그대로인데... 어떻게 안 믿을 수 있겠어?"


자신을 향하여 애수젖은 시선을 보내오는 아루.

그런 아루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으며, 선생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

"시간이 얼마 없지만, 아루. 들어주겠니?"


"...응, 그렇고 말고."


선생은 말없이 그녀를 향하여 손을 내밀었다.

이에 아루 또한 그의 수줍은 제안에 말없이 응하였다.


연분홍빛 꽃잎이 가득한 심상세계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으며.

아루와 선생은 그렇게, 그렇게 한없이 흐드러져갔다.


***



한달만의 복귀인데... 예 죄송합니다.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많은 일이 있었음.


우선 첫번째로는 내 사정이 차마 글을 쓸 여력이 되지 않았다는 것(기말고사... 과제 등등...).

두번째로는 사료를 생산하기 보단 먹는데 관심사가 맞춰졌다는 것(라고 쓰고 태업이라고 읽는다.)...


솔직히 말해 현타도 많이 왔고, 이야기도 너무 방대해져서 차마 모두 쓸 엄두가 안 났음. 때 마침 미움약도 돌아왔고... 

애초에 미움약이 돌아오기 전 까지 시간을 번다는 목표하에 쓰여졌던 글인 만큼 주어진 소명을 다했다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하는 짓이 연중튀랑 다를게 없는 것 같아서...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도 분명 있을텐데... 이렇게 튀는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돌아왔습니다.

아직 아루와 선생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