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27화


***


"아... 안돼애애애애애!!!"

"하, 핫... 아...?? 우와아아아아앗!!"


철퍼덕.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에 떠밀리듯 쓰러진 아루.

찐득한 정체불명의 점액과 더불어 모락모락 피어나는 증기는 실로 의미심장한 풍경이었다.


"우... 우웩... 뭐, 뭐야 이거..."

"그러나저 여... 여긴..."


한없이 탁한 공기와 무채색의 풍경.

여기저기 널려있는 파편과 콘크리트의 잔해는 그녀를 다시금 잔인한 현실, 전장으로 이끌어 주었다.


"돌아.. 왔구나.."


더 이상의 꽃밭도, 평화로운 풍경도 없다.

이 장소에는 오직 널려있는 시신들과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뿐.

탁한 공기와 더불어 흩날리는 먼지들이 꽃잎 대신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선생이 존재하지 않았다.


"선생ㄴ... 훌쩍, 선생님...."


백일몽에 불과했던 지난날의 행복.

다시금 느껴지는 빈 자리에 아루의 마음은 한층 더 깊은 수령으로 빠저드는 듯 했다.

흘러내리는 눈물과 점액을 ㄷ어설프게 닦아내며, 아루는 중얼거렸다.


"이게... 선생님의 뜻인거야...?"

"나 홀로... 모든 것을 끝내라고...?"


앞길이 막막했다.

지금의 그녀에겐 더 이상 무기도, 동료도.

하물며 옷가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색채는 점차 강해지는 한편 그녀들은 반대였다.

살이 찢기고, 사지가 부러지고, 신비는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누가봐도 불리한 상황에서 아루 곁을 함께하던 동료들은 이미 뿔뿔히 흩어진지 오래.

희망이란 더 이상 그녀들의 것이 아니었다.


"..."

"어떻게... 대체 어떻ㄱ..."


'아루!!! 조심해!!!'


좌절중이던 아루의 뇌리를 스치는 이오리의 단말마.

만약 이오리가 살아있다면 그녀는 그때 이후 줄곧 홀로 색채를 상대하고 있을 터였다.

이에 아루는 미약하게나마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

"...그래. 아직 이오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가야해... 옷은 차차 찾아 입는걸로 하고, 일단 발걸음부터..."


하지만 어떤 일에서인지 그녀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머지않아 다시금 주저앉고 만 아루.


"....흑, 흐흑...!!"

"흐으윽...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거야..."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거냐구...!"


두려움. 

그녀의 발을 묶어둔 족쇄의 정체는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다.


"무기도 없는데...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간 죽을게 뻔한데..."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어떻게... 어떻게 다시 그 지옥에 들어갈 수가 있겠냐고..."


마음은 이미 꺾여 버린지 오래.

그나마도 선생을 향한 마음과 사명감 때문에 어떻게든 붙잡고 있었던 이성었건만.

그러나 모든 진실과 배경을 알아버리고 만 아루에게 더 이상의 인내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젠... 싫어..."

"더 이상의 아픔도... 고통도... 죽음도..."


결국, 무너지고 만 아루.


저항을 포기한 채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 먹잇감처럼.

아루는 곧 닥쳐올 색채의 공격을 기다리며, 저항 대신 담담히 죽어감을 택하였다.


선생이 보면 실망을 금치 못할 상황.

그리고 이는 아루 자신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학생이었다.


"모두... 모두가 보고싶어... 하루카, 카요코, 무츠키... 선생님..."

"...흑, 흐윽... 모두들... 모두가 보고싶다고! 나도 대려가지... 갈거면 나도 대려가지 왜 혼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아루.

하지만 이전처럼 그녀를 위로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토록 타인들을 위로해주며 정신적 성장을 이끌었던 아루이건만.

정작 그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땐 이미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된 이후였다.


"...선생, 님."

"그곳은... 어때...?"


휑한 바람과 더불어 어두워진 분위기.

끔찍한 현실을 차마 비루볼 수 없었던 아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만개한 연분홍빛 꽃밭이 그녀 앞에 펼쳐져 있었다.


현실과는 대비되는,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풍경과 어느 하나 낭비없는 빽빽한 주변까지.

방금 전까지 선생과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던 그 장소가, 지금도 눈 앞에 아른거리는 듯 했다.


그녀는 눈을 떴다.

여전히 휑한 풍경과 더불어 불어오는 잿빛 바람.

현실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아루, 힘을 내렴.'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핫?"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목소리.

이윽고 아루는 그동안 자신의 머리를 줄곧 옥죄어오던 두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탁하기 그지없던 머릿속도 한층 높은 단계의 정수처럼 투명하게 맑아진 것 처럼 느껴졌다.


"방금... 그 목소리는..."

"선생님...?? 선생님이야??"


아루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선생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의 발 앞에 놓여진 자그마한 물 웅덩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끌림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아루.


"..."


아루는 수차례 눈을 비빈 뒤, 말없이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한 여성이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길게 내려앉은 머리카락.

황금빛으로 빛나는 동공과 눈동자.


그리고 연분홍빛 헤일로까지.


"..."

"...?"


당황한 아루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만 바닥에 엎어지고야 말았다.

이윽고 귓가에 울리는 '첨벙' 소리와 함께 일렁이는, 수면 너머의 모습.

이는 틀림없는 리쿠하치마 아루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검은... 색이 아니야...?'

'헤일로가... 검은색이 아니라고...??'


헤일로의 빛깔이 돌아왔다.

이는 곧 그녀를 옥죄어오던 공포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뭐지...? 어째서...?"

"어쨰서 내 모습이 이런... 예전 모습으ㄹ..."


뜻밖의 이변에 당황하던 그때.

저벅, 하고 들려오는 자그마한 발소리와 함께.

한 앳된 여성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https://www.youtube.com/watch?v=icycOtSlAmU





"쿠후후~❤️ 아루 짱, 거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

"자, 잠깐... 방금 누ㄱ..."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아루.

그러나 그 어떤 곳에서도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환청이네. 나도 정차 미쳐가는건가.'


실망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금 주저 앉으려는 찰나.

누군가가 '툭툭' 하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푸욱."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볼에 느껴지는 낮선 감촉.

적당히 길면서도 단단한 그것은 마치 손가락의 그것과도 같았다.


"...?"


"아하하! 재밌어~!"

"아루 짱은 늘 똑같이 당한다니까아~?"


특유의 웃음 소리와 함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여주는 의문의 여성.


색채의 피폭으로 인해 체형과 분위기를 비롯하여 모든 것들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아루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은빛의 장발을 찰랑거리며 약간은 새침한, 그렇다고 미워할 수는 없는 매력의 소유자.


"무츠키...??"


아사기 무츠키였다.


"...쿠후후❤️"

"역시, 아루 짱이라면 알아봐줄 줄 알았어!"


"너... 너 어떻게...."


"흐으응~ 글쎼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맞춰보지 않을ㄹ... 읏!"


불현듯 무츠키를 끌어안는 아루.

겨우 그쳤던 눈물이건만, 다시금 터져버린 감정의 수맥은 쉽사리 수습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잠시 당황하는 무츠키였으나, 이내 돌변한 표정과 함께 앙칼진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뭐야... 우리 사장님, 울어?"


"무츠키... 훌쩍, 흑... 무츠키이..."

"다행...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이렇게 돌아와줘서..."

"아무리 찾아도 연락이 없길래... 훌쩍, 난 너가 정말 죽은 줄로...!"


"헤에..."

"이거, 울리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말야~"

"...곤란하게 되었네, 카요코 짱~"


"...그러게 내가 적당히 놀리라고 했잖아."


"ㅁ...뭐? 카,카요코???"


깜짝 놀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루에게 희미한 미소로 화답해주는 카요코.

무츠키, 하루카가 그랬던 것 처럼 다시 만난 카요코는 모습이 다소 달라진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인식에는 무리는 없었다.

피폭이 있었다고 한들 그녀의 본질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던 셈이다.


"많이 걱정했어? 우리도 네 걱정 참 많이 했는데..."


카요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루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피부도 그렇고, 엄청 상했네."

"우리 사장님... 고생이 많았겠구나."


사장.


한동안 잊고 지내왔던, 그녀의 본업을 이르는 호칭.

비록 허울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명무실한 지위였으나 그럼에도 족했다.

아루는 자신의 얼굴을 고무처럼 문지르는 카요코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하루카, 하루카는?"


"응? 하루카? 하루카라면 저쪽에 있지."

"말도 마. 처음 만났을 때 어찌나 발광하며 걱정하던지... 마치 어린 아이 보는 줄 알았다니까."


피식, 하며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는 카요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아루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고마워. 이렇게 돌아와줘서."

"이렇게 잊지 않고 나를 찾아줘서... 다시금 나를 믿고 따라줘서..."


"에이, 어색하니까 그런 말은 그만둬. 익숙하지 않으니깐."

"그래도 뭐... 오랜만의 재회인만큼 듣기에는 그닥 나쁘지 않네."


그녀들은 서로 짧은 목례를 주고 받은 후, 천천히 하루카가 있는 곳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길목을 지나고, 무너진 시가지를 지나 어느덧 시끌벅적한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오는 장소.

그곳에서 아루는 거대한 AMAS에 기대어 멍하니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하루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앗? 미도리, 모모이! 찾았습니다!"

"저기, 저 곳에서 다가오고 있는 분들! 카요코 씨와 무츠키 씨 입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푸른 빛의 장발을 지닌 소녀.

커다란 등짐이 무색하게 방방 뛰어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아루는 산뜻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홍매색의 여성 또한 함께입니다!"


"ㅁ...뭐? 그게 정말이야?"

"어~이! 카요코 씨! 무츠키 씨! 여기에요 여기!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요!"


"와~아! 무츠키 언니! 여기야 여기!!!"


형광색 연두와 분홍.

마치 보색의 관계처럼 함께면서도 다른 두 소녀는 마치 쌍둥이처럼 보였다.

의문의 소녀 곁에서 덩달아 발광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아루는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애들... 예전에 당번할 때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사이바 자매와 아리스 말하는거야?"

"마주치면 인사해. 널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거든."


사이바 모모이와 미도리.

그녀들의 화색에 근처에서 적막을 소비중이던 하루카 또한 봄빛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 어...? 어어어????"

"아... 아루님.... 아루니이이이이이임!!!!"


한달음에 달려온 그녀는 너무나도 반가웠던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아루를 향하여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 또한 피폭의 영향을 받은 피폭자라는 사실을, 하루카는 간과하고 있었다.


"어붑!!"


"엣, 에에엣!!!"


공포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아루는 다시금 이전의 몸으로 돌아간 상황.

이전보다 키도 커지고, 풍체도 거대해진 하루카에게 있어 아루와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였던 셈이다.

바닥에 깔린 채 골골대는 아루를 보곤 뒤늦게 당황하며 사죄하는 하루카.


그러나 그런 하루카의 실수마저 아루에겐 행복이나 다름 없었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오히려 다행인걸... 그렇게 해어져서 걱정했단 말이야."


"아... 아루님께서 저를 걱정..."

"...헤헤. 헤헤헤... 가, 감사...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하루카.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아루는 내심 안정감을 느꼈다.


"그, 그.... 저기... 아루... 님....?"


"응? 왜? 무슨 일인데 그래?"


"그, 그 다름이 아니오라 그.... 옷.... 말인데요."

"무슨.... 의도라도... 있으신... 아, 아뇨! 당연히 있으시겠죠! 아루 님은 위대하시니까...!"


하루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루가 깨닫기엔 그닥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와아아아아앗!!!!!! 마, 맞다... 내 옷..!!!!! 옷이이이이이이이이...!!!!!"


그때. 얼굴을 붉히며 발광하는 아루의 위로 풀썩, 하며 떨어지는 옷가지.


"자, 입어! 춥겠다."


고개를 들어 그 옷을 준 장본인을 바라보니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유우카였다.

그러나 그녀 뒤에는 고고한 인상의 뉴페이스의 여성 또한 함께 서있는 상태였다.


"드디어 다시 만났네, 아루."

"먹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정말이지..."


마치 엄마라도 되는 양, 사이바 자매를 비롯한 게임개발부를 보살피며 애증섞인 잔소리를 늘어놓는 유우카.

그런 그녀의 뒤로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여성은 아루를 향해 문득, 악수를 건내었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츠카츠키 리오, 밀레니엄의 세미나이자, 학생회장이다."


자신을 리오라고 소개한 여성.

이에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마지못해 그 손길에 응하는 아루였다.


"아... 예..."


"...편하게 대해도 돼. 회장 놀음은 이미 옛적에 끝난지 오래니까."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있다. 선생의 부재에도 비롯하고 모두를 이끌었다고..."


"ㅁ, 뭐? 내가??"


"부정은 할 필요 없어. 일부 행적은 그 진위성에 조금 의심이 간다만 대부분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 했으니까."

"아루... 네 덕분에 나는 골방에서 나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의 죄와... 행동을 마주할 용기를 말이야."


리오는 언뜻 보면 아련한 전 연인처럼 아루의 상처입고 갈라진 손을 어루 만지며 말했다.

뜻밖의 스킨십에 다소 당황한 아루였으나, 그녀의 뒤에서 남몰래 미소짓고 있는 무츠키의 모습에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어나갔다.


"ㅁ...물론! 난 사장아니까! 모두를 이끌어 본 경험이 이미 있으니 말이야. 호. 호. 호."


"...."

"(유우카, 광인이라는 말은 미처 못 들었는데.)"


"(이해하세요... 요즘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뭐야! 다 들린다고! 나는 농담도 못하나!"

"그 전에... 직접 확인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스토킹 당한거야?"


잔뜩 격양된 아루의 말에 리오는 슬며시 미소 짓더니 품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보여주었다.

분명히 전파국이 무너진 탓에 먹통이어야할 전화기는 어째선지 매우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 말인 즉슨...


"투다다다다다다다"


때 마침 이 알쏭달쏭한 상황을 증명하듯, 익숙한 헬리콥터 소음이 그녀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이에 아루를 비롯한 그 자리의 모든 학생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작, D.U 외곽에서 색채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색채는 강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힘이라면 마땅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이건...?"


"언론.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전파력이 높은 매체이기도 하지."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도 잊고 있었던거야... 키보토스 최대 언론사의 존재를."


헬리콥터 창문 너머로 몸을 내민 채 의욕적인 열변을 토하는 금발의 학생.

키보토스의 시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크로노스의 얼굴 마담, 카와루 시논이었다.


[지금 이 방송을 보시는 분들... 그리고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 분들이라면 지금, 밖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싸우십시오... 성소를 부수십시오...!!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키보토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모두의 기억 속 시논은 특종에 미친 리포터였지만, 지금은 사뭇 달랐다.

마치 민중을 고취시키는 혁명가의 그것처럼 시논은 달변에 달변을 열성껏 이어나갔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까 전부터 어디선가 함성소리 비스무리 한 것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아루였다.


[...지금 말씀 드리는 이 순간에도! 게헨나의 마지막 성소가 무너졌습니다!]

[모두가 함께 연합하여 싸운 결과, 우리는 한 차례 더 전진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아루의 예상은 적중하여, 리오가 보여준 화면 속 게헨나 광장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금 게헨나 광장에서는 기쁨의 열기가 한창입니다!]

[어찌나 뜨거운지 트리니티와 게헨나의 학생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노래를 부를 정도랍니다!]


수많은 학생들과 처참하게 무너진 성소.

질리도록 봐왔던 성소가 사라지니 꽤나 새로우면서도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채널을 넘기고 또 넘겨도, 전국의 학원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소는 색채에게 힘을 빌어다주는 존재.

이는 곧 색채의 약화를 의미했다.


"봤지? 아루.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작은 화면으로... 너희들의 분투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지."


"맞습니다! 아리스도 새로 받은 10억 화소의 카메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아루 씨의 각성도, 히나 씨와 체리노 씨의 접선도! 모두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추한 모습을 전국구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루의 표정도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소란스럽게 전장을 비추던 방송의 채널이 또 한번 바뀌어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광경을 비추었다.


"어... 어어?"


"왜 그러지. 혹시 아는 사람들인가?"


"당연하지...!! 여기 쓰러져있는 학생은 이오리... 그리고 홀로 남은 이 학생은..."

"...아코... 잖아...??? 어떻게 된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레 이런 상태가...!!"


처참하기 그지없는, 화면에 비친 아코의 모습.

이에 아루의 마음도 한층 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가... 가야해... 너무 늦기 전에...!!"


"자, 잠깐..!!"


리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루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다만 그 순간, 발걸음을 막 때어놓은 참의 아루를 누군가가 막아 새운 것 이었다.


"...?"


"거기까지. 넌 아직 기력이 완전하게 돌아오지 않았잖아?"


불현듯 등장한 땅딸막한 키의, 메이드 복을 입은 여성.

잔뜩 올라간 눈매와 똘망똘망한 눈물점이 주는 인상은 꽤나 익숙한 향취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혹스럽지 않은 것은 또 아니었다.


"너... 넌 누구야?"


"하? 리오 회장, 나 소개 안 해줬어?"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리오.

이에 기가 찼는지, 땅딸막한 소녀는 혀를 쯧. 하고 차며 아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C&C의 부장."

"미카모 네루라고 한다. 이전에도 몇 번 본 적 있지? 잘 부탁한다고?"


"뭐어...! 그, 그래. 잘 부탁해."

"...그런데 내 앞은 왜 막아서는거야?"


"하아? 지금 뭐라는거야?"


무슨 시기장조적인 헛소리냐는 듯, 한껏 성이난 네루의 목소리.

이에 굳게 주먹 쥔 아루의 손에도 한층 더 힘이 실렸다.


"아코... 이오리...! 모두 붉은 눈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정상이야!"

"그리고 내 소중한 전우이기도 하고... 구하러 가는게 당연하잖아...!! 지금은 잠시 과거를 잊고..."


"어이어이, 잠깐 잠깐...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거, 안 보여? 내 눈도 붉게 물든 상태라고? 나도 저 친구들과 동류다 이 말이야. 붉은 눈이라고 해서 구호를 마다하거나 그러진 않으니 안심하라고."


"ㅁ... 뭐? 그렇다면 왜 나를..."


"간단하지. 넌 아직 회복이 덜 되었으니까."

"이것 봐. 깨어난지 얼마 안 된 탓에 다리도 마구 떨리잖냐."


그녀의 말처럼 아루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와 반대로, 쇠사슬 매인 총기를 양껏 돌려대는 네루의 모습은 퍽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에게 맡기고 넌 휴식을 취하도록 해."

"지금까지 많이 애써줬잖냐... 우리들이 미쳐버린 사이."


"그, 그래도 혼자서는..."


"아앙? 누가 혼자라고 그래? 나도 팀원들은 있다고?"

"...오히려 혼자는 너였지. 그동안 줄곧 외롭게 싸워왔으니."

"이젠 우리가 그 끝을 맺을테니. 아루, 지금은 우리들을 믿이줘."


"..."


아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네루는 말없이 아루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린 뒤, 자신의 팀원들과 함께 리오의 AMAS에 올라탔다.


"어이, 부탁한다 아스나! 아루를 잘 보살피고 있으라고!"

"그리고 꼬맹이!! 돌아오면 게임 한 판 더 할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ㄷ... 다녀오겠습니다...!! 아루님...!!!"


AMAS들이 떠나고, 불현듯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한 무리의 메이드들.

특유의 복장으로 보아 아마 네루가 말한 그 '팀원들' 인듯 했다.


"아루 씨라고 했나? 난 아스나야! 만나서 반가워! 와-아!"

"그리고 여긴 카린과 아카네! 지금부터 우리가 널 최선을 다해 돌봐줄게!"


그들 중에서도 특히나 강한 양기를 지닌 금발의 여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여기저기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한계를 넘어선 양기에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아루는 AMAS로부터 눈을 때지 못했다.


그때, 자신을 아카네라 소개한 여성이 아루를 향하여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시죠? 저들이 걱정 되시는건가요?"


"어... 어? 아, 그게... 당연하지. 왜 걱정이 안되겠어? 색채는 이미 또 한번의 진화를 이뤄냈고... 쉽지 않은 싸움이 될게 뻔해."

"...무, 물론 저들을 못 믿는다는게 아니고! 단지..."


"...마음속에 아직, 응어리진 무언가가 있는 것이지요?"

"그 마음 잘 이해합니다. 끝장을 봐야한다는 느낌. 하지만 때로는... 전진만이 답이 아닐 때도 있답니다."

"전진도 좋지만 무한히 반복할 수는 없는 법...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바로 그런데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렇지."

"지금 내 몸 상태로는 저들에게 도움은 커녕, 짐짝만 될게 뻔해... 네 말이 맞아 아카네."


미약하게 나마 빛을 내던 아루의 동공에 또 한번의 음영이 드리웠다.

이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카네는 아루의 어깨죽지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하지만 아루 씨.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이제 오로지 당신의 결정이자, 당신의 책임... 저희들은 말리지 않는답니다."

"...생각해보니, 뒷정리를 해야할게 마저 남았을지도...?"


"...뭐? 그게 무슨 말ㅇ..."


두근.


두근.










https://www.youtube.com/watch?v=qz_G8rqofp0











그 순간.


아루의 가슴 속에서 은은한 고동이 차츰 고개를 드러내며 공진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따뜻하면서도 괜스레 눈물이 고이는 아련한 느낌, 그리고 그러한 기운들.

동시에 아카네의 홍체도 은은한 황금빛을 내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

"...아카... 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리쿠하치마 아루. 바로 당신입니다."


"...자, 잠깐."

"이 기운... 이 익숙한 내용.... 설마...?"


"아루 씨. 당신이 해야할 일을 하세요."

"당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위해... 그리고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맺기 위해."


이전까지와는 다른, 신비한 분위기의 아카네.

비록 그녀를 만난지 얼마 되지는 않았다지만, 그럼에도 아루는 느낄 수 있었다.


"당신....!!!!"

"...그 약속. 정말.... 지켜줬구나."


지금 자신 앞에 서있는 아카네는, 아카네가 아니라는 것을.


"..."

"...응. 고마워. 그동안 잊고 있었네... 바보같이."


아루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져 있었다.


"내가 모든 것을 끝맺을게... 지긋지긋하게 이어진 이 재앙의 고리를 끊어낼게."

"그러니 아카ㄴ... 아니, 선생님. 지켜봐줘. 부디. 마지막 순간까지..."


밝아오는 여명 아래, 은은하게 피어나는 미소.

아루는 말없이 목례한 뒤, 점차 잦아드는 흙먼지의 궤적을 따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생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의지가 느껴지는 무언가가 맴돌고 있었다.


***



세이브는 여기까지...

아마 다음 다다음 정도면 완결남. ㅇㅇ...

이쯤되면 나에게 주어진 사명처럼 느껴질 정도여... 빨리 완결을 내야하는데...


아직 큰 후회 한번 더 남았으니 이 정도의 빌드업은 부디 참아주십쇼...!!!!

팬픽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본질은 후회물이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