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30화


***


서서히 사그라드는 소나기.

그럼에도 여전히 하늘은 우중충한 상태 그대로였다.


아루와 게헨나 일행은 근처 폐허 건물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참이었다.

쉽사리 개지 않는 날씨에 이동은 글렀겠다, 이에 잠시나마 근심을 놓고 휴식을 취하는 그녀들.


그러나 아루의 표정은 퍽 근심 어린 형상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유우카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리들은 이미 낙인이 찍혔고... 아마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 붙어 다니겠지.'


조금은 시원하면서도 씁쓸한 기분 탓인지 쉽사리 자리를 표정을 펴지 못하는 아루.

그런 아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요코는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어어? 아... 그게..."

"...그냥! 뭐, 별거 아니야. 이제 다 끝났구나 싶어서."


"그치... 모두 끝났지."

"색채는 죽고. 키보토스는 파괴되었고."


동시에 떠오르는 햇살 사이로 황폐해진 도시의 경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기저기 부숴지고 망가진, 그러면서도 성한 곳은 하나 없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

과거 수많은 학생들이 거닐었던 번화가라기엔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뭐, 이제 다들 돌아갔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우리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말이야."


아루의 팔을 와락, 끌어안으며 쾌활한 목소리로 반기는 무츠키.

크나큰 이변이 한 차례 지나갔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밝고 명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아루는 마냥 부러울 따름이었다.


"저기, 무츠키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응? 나 말이야?"

"쿠후후~ 글쎄? 맞춰볼래? ~랄까! 농담이야! 나라고 해서 특출나게 다를리가 있겠어?"

"딱히 동정을 얻으려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힘들었다구."


애수에 젖은 무츠키의 눈빛.

비록 달리 말하진 않았으나, 그녀도 아루 못지않은 고통을 겪어왔다는 증거.

아루는 더 이상 그녀의 상처를 자극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비도 어느 정도 그친 것 같고... 이제 그만 일어날까?"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지? 정작 갈만한 곳이 생각이 안 나네."


"너희들 사무소 하잖아? 거긴 어때?"

"전에 보니까 꽤 반듯하더만. 아지트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하아? 사무소오~?? 히나 네가 다 터트려놓고선...!!"


"아, 그랬었나? 그건 좀 미안하네..."

"그래도 뭐... 그땐 직책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웃음 섞인 손길로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후려치는 히나.

이에 깜짝 놀라는 아루였으나, 이내 그녀의 긴장이 완전 풀렸다는 것을 알고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세상은 망가지고 황폐화 되었으나.

그럼에도 그녀들은 아직 살아있었으니.


"...그럼, 일단 게헨나로 가볼까?"

"우리들의 학원이자 고향... 어때. 행선지로는 나쁘지 않잖아?"


"게헨나라... 위험하지 않을까? 붕괴 후 혼란기라고, 만만찮은 혼돈의 도가니일걸 거기도."


"응? 언제 게헨나가 혼돈의 도가니가 아니었던 적이 있어?"


"...맞네. 그 생각을 못했구나. 푸훗."

"그럼, 게헨나로 가자. 우리 모두의 터전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더불어 평화로운 분위기.

모든 것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던 그 순간.


단 한 명.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


"응? 저기 누가 있는데..."

"아, 사오리! 거기서 뭐해?"


생기 넘치는 아루의 환대에 조용히 손을 들어 답하는 사오리.

하지만 그 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제 갈길을 가는 사오리.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정처없이 떠도는 방랑자와도 같았다.


"...얼랠래? 그냥 가네?"

"역시, 쟤 좀 이상해 보이지? 한 번 가볼까?"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전우이기에, 아루는 그런 그녀의 방황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이에 아루를 비롯한 게헨나 일행은 살금살금 사오리의 뒤를 밟아 그녀의 뒤를 습격하였다.


"왁!!! 놀랐지???"


"..."

"...리쿠하치마 아루."


"...에? 화났어? 미,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 순간, 아루의 품에 쓰러지듯 안기는 사오리.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아루는 물론, 모두가 당황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이녀석감히나의아루님에게에에!!!"


"잠깐. 하루카."

"난 괜찮아. 하지만..."


슬며시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보는 히나.

땀에 젖은 머릿칼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은 마치 불가마처럼 뜨거운 상태였다.


"...열이 심하게 나네. 아까 비 엄청 맞더만, 감기라도 걸렸나봐."

"어디 근처에 약국 같은거 없어?"


"약국이 있...을리가 없지? 있어도 제대로 된 수확을 얻기엔 불가능에 가까울거고."

"우선은 이 푹 젖은 옷을 말려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순간, 모두의 시선이 히나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는 뭐냐는 눈치로 당혹을 감추지 못했으나, 이내 그녀들의 속내를 알곤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경력직이다 그거야?"

"땔감이나 가져와. 모닥불을 피우려면 태울 거리가 있어야 하니까."


"역시, 척하면 척이라니깐?"

"어라...! 그나저나 우리들 좀... 친해진 것 같지 않아??"


"친해지긴 무슨... 그냥 내가 참는거지."

"따지고 보면 내가 너보다 한 살 더 많잖아? 까불지나 말라고."


"이거야 원, 무슨 장난을 못 치게 만드네."


툴툴거리며 땔감을 찾아 나서는 아루와 친구들.

그때, 불현듯 의식을 되찾은 사오리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자, 잠깐."


"뭐? 사오리? 일어난거야?"

"내 말 들려? 나 히나야 히나."


"아... 히나..."

"아루... 쿨럭, 리쿠하치마 아루를 불러줘..."


"아루...? 크흠, 흠."

"어이! 리쿠하치마 아루!! 사오리가 널 부르는데?"


"뭐? 나를? 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급히 달려온 아루.

그런 아루를 향하여 사오리는 몸을 내던지듯 그녀 앞으로 쓰러졌다.


"자, 잠ㄲ... 왜, 왜 이래?"

"너 어디 아파...??"


"하아... 리쿠하치마 아루..."

"네게... 묻고 싶은게 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푹 절여진 살갖과 머릿칼.

그리고 이들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강렬한 시선까지.


무슨 느끼는 바가 있었던걸까.

아루는 조용히 사오리를 일으켜 새우며 말했다.


"뭔데...? 뭔데 그러는데."

"잠깐, 그 전에 일단 옷 부터 말리자. 모닥불이 피워질 때 까지 조금만 기다려."


"아... 아니... 괜찮다..."

"아주 잠깐... 잠깐이면 되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루에게 기대는 사오리.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아루는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땀 부터 닦고 말해."

"그래서, 묻고 싶은게 뭔데?"


"..."


사오리는 말없이 히나를 바라보았다.


"...뭐. 왜? 왜 날 보는데?"

"아, 가라고? 아아~ 오키! 알겠어~!"


"뭔데?? 왜 그런 분위기로 몰아가는건데!"

"사오리, 뭐라 말좀 해봐! 미친 선도부장이 우리 둘 이상하게 엮잖아!!" 


"...아니다. 너만... 오직 너에게만..."

"긴히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부디..."


순식간에 얼음장 처럼 얼어버린 분위기.

차원이 다른 어색함에 히나도 급히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피해줄 수 밖에 없었다.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어보는 아루였으나, 물은 이미 엎어진 뒤였다.


"..."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미온의 열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루는 이내 어색한 침묵을 타파하려든 듯, 과장된 몸짓과 함께 말했다.


"자, 자! 그래서! 모두 갔어! 이제 너와 나 단 둘 뿐이야!"

"이제 됐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리쿠하치마 아루."

"조금은 실례일지도 모르나... 꼭 물어보고픈 질문이 있다."


"뭔데? 나까지 괜히 떨리게 만드네."


"너는... 아루 너는 어째서..."

"어째서 그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지...?"


"앵??"


이어지는 정적.

예상치 못한 질문에 아루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사오리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는데... 말이지."

"아무렇지도 않다니, 무슨 의미에서??"


"...난 말이지,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존재다."

"유우카의 말처럼... 표식을 받은 카인처럼... 아마 평생 동안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닐 운명이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스쿼드는? 돌아갈 곳이 없긴 왜 없어?"

"얘가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왜 이래?? 정신 좀 차려봐!"


"스쿼드... 미사키와 모두들을 일컫는건가...?"

"...그래. 그녀들 또한 분명히 나의 동료이자, 가족이나 다름 없는 존재이지."

"하지만... 하지만 그녀들은 적어도 선생을 해치지는 않았다..."


"...!!"


뒤늦게 사오리의 말에 담긴 속뜻을 파악한 아루는 그만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이 손으로... 두 번이나. 선생을 쏘아 상처 입히고... 또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었지."

"아루... 너는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싶나..?"


"선택이라니... 내게 그런 것을 물어봤자..."


"세상은 너를 멸시할 것이고... 또한 한없는 경멸과 혐오의 시선을 보내겠지."

"아무리 해명을 해보아도 그깟 변명거리가 먹혀들리도 없고... 동시에 나를 믿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을거야."

"무엇보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용서를 빌고 싶어도 빌 대상이 없다는 것..."


"..."


'선생... 선생이 없다는 이 사실이..."

"나의 마음을... 훌쩍, 이 더러운 가슴을 한없이 짓눌러온단 말이다..."

"그런데 너는... 너는 어째서 이토록 멀쩡할 수 있는거지??"


잔뜩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사오리.

조금은 눈물젖고, 조금은 얼얼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본 아루의 표정은 퍽 복잡했다.


"사오리..."


"너의 사랑하는 사람인 선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게에서..."

"너는 어떻게... 훌쩍,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제정신이라."


아루는 천천히 사오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째서 그러한 행동을 보였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으나 몸이 나서서 먼저 움직였다.

사오리는 잠시 움찔하였으나 그 어색하고도 이질적인 감각이 싫지는 않았는지, 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무슨 의도지."


"응? 그냥... 왠지 필요할 것 같아서."

"예~전에 말이야. 내가 의뢰를 세 번 연속 망치고 한창 풀이 죽어있을 때..."


피식, 하며 터저 나오는 웃음.


"선생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쓰다듬어 주시곤 했거든."

"그때마다 뭐랄까, 마음이 편해지며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던 기억이 나서."


"...날 보고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인가."


"응. 나쁘진 않잖아?"

"그냥 가만히... 눈 앞에 일렁이는 풍경을 그리며 천천히... 잠에 드는거지."

"적어도 난."


잠시 침묵하는 아루.


"적어도 난... 힘들 때 마다 그렇게 했거든."


그 말을 끝으로 아루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사오리도 별 다른 언질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한 차례 강우가 지나간 뒤.

미약하게 나마 남아있는 싸늘한 공기와 꿉꿉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밀려왔다.

퍽 조용한 주변 기운에 아루는 그녀 자신도 서서히 졸음의 기운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 히나와 애들은 아직이려나."


문득, 어깨에 느껴지는 무거움에 고개를 돌려보는 아루.

그러자 그곳에는 사오리가 한결 서늘해진 몸뚱아리와 함께 곤히 잠에 들어있었다.


'...얘 좀 봐. 내 어깨가 그렇게 편했나?'

'뭐, 어느 정도 상태가 나아졌다는 의미일테니 한 편으론 다행이려나.'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꽤나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비극적이고 씁쓸한 현실과는 상반되는,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세계.

선생이 없는 세계.


'너의 사랑하는 사람인 선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리쿠하치마 아루, 너는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떠오르는 사오리의 전언.

선생의 부재라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


이에 긴박한 전투 탓에 잠시나마 잊고 지내던 상실과 고독의 아픔이 차츰 절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루는 사오리를 근처 바닥에 뉘인 뒤, 자신의 코트를 덮어 주었다.


"...어떻게 제정신이냐고?"


복잡한 시선의 아루.

잠시 동안 사색에 잠겨있던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pQfxW4M5Xo





"나라고... 괜찮을리가 없잖아."


비록 듣는이 하나 없지만 천천히 토해내는 진심.

아니, 어쩌면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기에.

그래서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말해줄까...?"

"나도 선생님이 그리워. 정말... 미치도록 그립단 말이야."


천천히 붉어지는 그녀의 눈시울.

사오리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하..."

"전혀. 오히려 진작에 무너진 것에 가깝지. 나라고 별 반 다를리가 있겠어?"

"단지 선생님께서 내게 주신 마지막 사명을 이루기 위해. 염원을 달성 시켜드리기 위해 어떻게든 버틴거에 가깝지."


아루는 천천히 자신의 무릎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투명한 옥구슬이 남긴 한 줄기 궤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도 선생님이 보고싶어."

"선생님께 칭찬도 듣고 싶고... 수고했다는 말도 듣고 싶어."

"왜 나에게 이토록 가혹한 과제를 떠넘겼냐고, 그렇게도 물어보고 싶어."


차가운 바람이 폐허 안으로 솔솔 불어왔다.

사오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했다고... 당신이라면 알아줄거라 믿으며 어떻게든 버텼다고..."

"그렇게... 나이에 맞지도 않는 어리광도 한 번 쯤은 부려보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인걸."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노을이 퍽 슬퍼보이는 느낌.

아루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잔뜩 붉어진 콧망울과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사오리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난 한 번도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는데..."

"그 사태가 터진 이후 처음으로 마주한 모습이 그런... 처참한 모습이었는데..."

"...하하. 생각해보니 나도 참 팔자가 기구하다, 그치?"


그녀들이 돌아오기까지 아직은 멀어보였기에.

아루는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넋두리를 털어보기로 했다.


"히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유우카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이유가 모두 선생님을 해칠 뻔... 해서 그러는거잖아?"

"그런데 난 차라리 너희들이 부러워."


"..."


"너희들은 그래도 본의가 아니었다, 정신 오염 때문이다 라는 변호가 가능하니까."

"하지만 나는... 나는 그것도 아니잖아. 그냥 자느라 아무 것도 못 한건데. 퍼질러 자느라 선생님의 절박한 신호도 알아 듣지 못한건데."

"나는 그냥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사실이 나를 정말 미치게 만들어."


털썩, 하며 드러눕는 아루.

그녀의 입가에는 미약한 미소가 조금은 어긋나게 피어나 있었다.


"너희들은 그래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행동할 수 있었는데... 나는..."

"훌쩍, 나는 아무 것도... 선생님이 죽어가는데 당황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흑, 하지 못했는데..."


"..."


"그래서... 그래서 그게 가장 후회 돼."

"너희들은 그래도 최소한 마주해서 죄송하다고 할 기회가... 있었던거잖아."


"...아니다."


그때, 적막을 넌지시 깨는 목소리.


"죄송하다고 말 한 것과... 용서를 받은 것은 다른거지."


"뭐야, 역시 일어나 있었잖아."

"...라기엔 아까부터 헤일로 켜져있던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이성을 되찾았을 땐 이미 선생을 쏜 뒤였다."

"동시에 끔찍한 기억이... 분명히 일어난 사실임에도 사실이 아닌 것만 같은,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이 나의 뇌리에 쏟아지듯 들어왔지."

"그 느낌을... 너는 모르지 않나."


여전히 돌아 누운 채, 사오리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너무나 고생을 한 탓인지 한껏 갈라진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로 하여금 퍽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감기 때문일지도.


"..."


"무력감... 이해한다. 하지만 때때로는..."

"아무 일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던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어쩔 수 없이 행동한 것이랑,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것은 다르지."

"나는 선생님을 구하지 못했어. 대화다운 대화도 나누지 못했고. 그냥... 그렇게 사라져버렸어 선생님은."


아루는 조용히 훌쩍이며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노을은 어느덧 어둑어둑한 저녁 하늘로 바뀐지 오래.

히나와 아이들은 아직도 먼 듯 했다.


"...네가 이토록 감정적으로 변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만."


"나? 내가?"

"훌쩍, 쳇...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얼마나 감정적이었는데."

"그냥... 억제 해온거지. 선생님을 살릴 수 있을거란 희망에... 그 실낱같은 희망에 목을 매어..."


"희망..."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사오리는 꽤나 씁쓸한 어투로 되내었다.

잠깐 동안의 정적 뒤, 입을 연 것은 사오리였다.


"...선생은 내게 말했었다."

"사오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으니 좋은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음...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하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건가, 리쿠하치마 아루."

"선생을 죽이고 상처입힌... 그러면서 꼴에 양심은 있다고 이곳저곳 설처다닌 내가..."

"그런 내가 정말로. 선생님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아루는 말없이 사오리를 향해 돌아보았다.

사오리는 여전히 그녀를 등진 채 드러누워 있는 상태였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생각해?"


"..."

"뭐...?"


"그렇게 말할 정도면, 네 꿈 아니야 그거?"

"꿈을 품었으면 그 자격이나 요건은 당사자가 더 잘 알겠지."


"나, 나는..."


사오리는 침묵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음을, 아루는 볼 수 있었다.

이에 아루는 더 이상 그녀에게 관련 내용을 캐묻지 않기로 했다.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어."

"아무리 허무맹랑하든, 꿈이니 아무 상관 없다고. 일단은 품으라고 말이야."


대신,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난 말이야, 최고의 하드보일드 악당이 되고 싶었어."


"..."


"...웃지마. 당시엔 꽤나 진지했다고."

"뭐어,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말이야."


미약하게 진동하는 사오리의 어깨를 가볍게 후리며, 아루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답시고 사무소도 차리고, 친구들도 사원이란 명목하에 억지로 끌어들이고..."

"그렇게 야심차게 시작했건만... 의뢰는 쪽박에, 사업은 불투명하고... 힘들었었지."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그 상황에서 내 꿈을 응원해준 사람이 딱 한 명."

"딱 한 사람이 있었어. 누구게? 맞춰봐."


"...선생, 인가."


"정답."


아루는 천천히 두 손을 가슴 위로 포개었다.

마치 자신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따스한 무언가를 느끼려는 듯이.


"다른 모두가 나의 꿈을 비웃었을 때, 하물며 나 자신도 나의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때..."

"그때 선생님이 나를 유일하게 응원해 주셨어. 재밌지."


"..."


"그래서 이 말을 왜 하느냐면..."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어차피 모두가 너랑 똑같은 고민을 품고 있을테니까."

"사오리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대로 계속... 계속 과거만 바라보며 살아갈거야?"


"..."


"글쎄, 난 아니라고 봐."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아루.

사오리는 여전히 바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차가웠던 바닥이 천천히, 미약하게 나마 따스하게 변해감을.

왠지 모르게 포근한 감정이 그녀의 몸에 전해져 온다는 것을 말이다.


"선생님이라는 꿈... 너도 품고 있잖아, 솔직히?"

"그리고 그 꿈을 제안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선생님이라며."


"..."


"선생님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어. 나도 한사코 부정해 보았지만... 그게 사실인걸."

"이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속죄는 역시, 그의 의지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봐."


"...!!"


순간, 잠깐이지만 사오리의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루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선생님 께서 주신 꿈을 어떻게 잘 이어서, 그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는거지."

"그 왜, 청출어람이라는 말도 있잖아. 네가 잘 되는걸 선생님도 싫어하진 않으실거야."

"...무엇보다 네가 이렇게, 과거에 파묻혀 죽어가는 것도 바라지 않으실거고."


사오리는 말이 없었다.

아마 다시 잠에 든 듯 했다.


"..."

"...으, 으음... 갑자기 왜 이러지."


문득 현기증을 느낀 아루는 잠시 주춤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록 사오리가 그녀를 보진 못했지만, 주위의 기류가 바뀐 것 정도는 알아 차릴 수 있었다.

한껏 그녀를 품었던 따스함도 어느새 한 순간 반짝거리는 별빛처럼 사라진 뒤였다.


"뭔가... 부끄럽게 나 혼자만 말을 막 한 것 같은데... 왜였을까."

"...뭐, 쨋든! 힘내라고. 그건 그렇고 히나 얘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거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아루.

퍽 달라진 눈빛의 그녀는 사오리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애들이 너무 안 오는데, 넌 안 갈거야?"


"..."


"...흐음. 역시 피곤했나. 자나보네."

"그럼, 일단 나 먼저 다녀온다? 자리 잘 지키고 있어!"


충분한 기력과 의식이 있었음에도.

사오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자리가 너무나도 따스했기 때문에.

빗속에서 느꼈던 포근함과 퍽 닮아있었기 때문에.


.

.

.



밖으로 나선 아루.

어둑해진 주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히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다들 어딜 그렇게 간거야?"


'아니, 널려있는게 땔감 아닌가?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툴툴거리는 불평과 함께 튀어 나오는 넋두리.

삐쭉 튀어나온 입술로 보아 기분이 나빴던걸까.


하지만 어째서 기분이 나빠진 것인지는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머릿속을 해집어지는 듯한 기분.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고통스럽진 않지만 한없이 기묘한 기분.

그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갑자기 그 상황에서 뭘 그렇게 혼자서 떠들었지?? 왜??'

'그런 상태가 되면 어차피 아무 것도 귀에 안 들어올텐데... 내가 괜한 말을 했나.'


"아루!!!!"


그 순간 아루의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

먼 발치를 바라보니, 그곳에선 히나가 헐래벌떡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땔감은 없었다.


"뭐야, 땔감은?"

"그리고 왜 이렇게 헉헉거려? 뭔데? 무슨 일인데?"


"허억... 잠깐, 따라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덜컥, 손을 붙잡는 히나.

이에 끌려가든 그녀를 따라나서는 아루였다.


"뭔데, 뭐냐니깐? 이유라도 설명해줘!"


"잠깐... 잠깐이면 되니까..."

"...그래, 여기. 여기였어!! 봐봐!!"


꽤나 멀리 이동한 그녀들.

도착한 장소에서, 히나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차가운 콘트리트 바닥이었다.

자그마한 파편과 더불어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붉은 액채.

냄새로 보아 아마 누군가의 혈액인듯 싶었다.


"뭐, 뭔데 이거...? 대체 누구의..."


"그러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피 아니야?"

"그렇다면 누구의... 색채는 신비를 흘리고 다니니까 일단은 사람의 것 일텐데..."


"...잠깐, 색채? 방금 색채라고 했어?"


"그래!!! 색채!!"

"이 자리가... 이 자리가 어디일 것 같아??"


꽤나 다급한 어투로 물어오는 히나.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에는 처절함마저 묻어났다.


"자리? 자리라니??"


"뭐어? 네가 모르면 어떡해..!!!"


"아니, 그렇게 말해봤자 나로써는...!!"


"아까 기억 안 나?? 네가 색채를 잡아 죽인 그 자리잖아!!!"


그 순간, 히나의 말과 함께 밀려 들어오는 기억들.

그것은 아루의 기억이지만 동시에 그녀의 것이 아니기도 했다.


"색채가 분명히 이 곳에서 사지가 찢어져 죽었는데... 시채가 없잖아 지금!"

"이거 큰일이야... 만일 색채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정말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이 위험해!!"


아루의 귓가에 웅웅 울리는, 명확하지 않은 히나의 절규.

깨질듯한 두통과 더불어 방금 전 느꼈던 불쾌함이 다시금 느껴지기 시작했다.


"끅...!!! 아악..!!"


"아, 아루...????"


당황하는 히나의 손을 만류하며 천천히 일어나는 아루.

여전히 숨을 헐떡이고, 동시에 두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그대로였다.

아니, 어쩌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하아... 하아..."


"아루... 괜찮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천천히 신음하는 아루.

히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루는 쉽사리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히나를 향해 되내었다.


"난... 난 괜찮아..."

"그보다도 아까 뭐...? 색채가 죽지 않았다고...?"


"어? 그, 그러니까 확실하게 단언은 못 하는데..."

"정황도 그렇고 뭔가... 굉장히 수상쩍다고 해야하나... 아까부터 하루카 일행이 연락 되지 않는 것도 있고."


"그럴리가... 나는 분명 모두와 함께 작전을 지휘하여 색채를 토벌했어."

"가슴 속에 느껴지는 미약한 연도... 무가치한 신비의 복제 기운도 모두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특유의 변칙성을 생각한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닌... 쿨럭..."


"뭐, 뭐어? 지휘..? 연...? 복제 기운...?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크윽, 비켜봐...!!!"


히나를 밀치다시피 하며 앞으로 걸어나온 아루.

그런 아루의 행동에 히나는 당황하면서도, 너무나도 달라진 모습에 위화감만을 느낄 뿐 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루는 천천히 흩뿌려진 혈흔으로 다가가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뭐, 뭔데... 뭔데 그래?"


"...이 혈액은 색채의 것이 아니야. 적어도 내 지론으로는."

"하루카도, 카요코도, 무츠키도. 하물며 사오리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 허억..."


"음...? 그럼 왜... 누구의 것인데??"

"누가 이토록 피를 많이... 어어? 아, 아루...!!"


그 순간,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아루.

당황한 히나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부축하였다.

하지만 아루의 눈빛은 이미 인사불성 바로 직전의 상태였다.


"하아..??? 뭔데... 뭔데 이거...!!"

"갑자기 아루가 왜... 아무런 징조도 없던 애가 왜...??"


"...쿨럭!!"


그러나 기우였던걸까.

잠시 뒤, 아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두 눈을 뜨며 깨어났다.


"아루...!! 괜찮아??? 갑자기 쓰러졌어!!"


"하아... 하아...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이로써 더욱 확실해 졌어... 저 피가 누구의 것인지..."


히나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나는 아루.

여전히 머리가 아픈지 계속해서 관자몰이를 감싸쥐는 그녀였지만 적어도 신체는 멀쩡했다.

손가락 너머로 비치는 아루의 눈동자는 신묘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뭐, 뭐야 너... 아까부터 계속 의미 모를 소리만 하고..."

"너... 내가 아는 그 아루 맞지? 이상하거나 그런거 아니지...??"


"...응. 지금은."


히나를 향해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짓는 아루.

여전히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는 히나였으나 그녀가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아루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벙찐 그녀를 향해 아루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히나. 괜찮다면 먼저 돌아가서 우리 흥신소 일행들과 함께 사오리를 지켜주지 않을래?"


"뭐? 그말인 즉슨 너 홀로 저 핏자국을 쫒겠다는거야?"

"...안돼. 그것 만큼은 절대 안돼! 갈거면 나도 대려가!"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는 히나.

이에 아루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향하여 말했다.


"시간이 없어, 히나. 너도 알잖아."

"만일 색채가 살아있다면... 이 상황에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너와 나, 단 둘 뿐이야."


"그, 그치만..."


"날 믿어줘. 히나. 너라서 부탁하는거야."

"무엇보다... 나도 더 이상 이전 같은 허풍선이가 아니니까."


묵묵히 히나를 바라보는 아루.

그런 그녀의 간절한 시선에 감화 되었던걸까.


마른 침을 꿀꺽 삼킨 히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늦지마. 늦으면 당한 줄로 알고 찾으러 갈테니까."


"응. 그럴게."


"그럼..."


몸을 돌려 사라지는 히나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루.

찾아온 적막과 더불어 한숨을 내쉰 그녀는 천천히 무기를 빼어든 채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정말, 끈질기구나."

"하지만 선생님... 내겐 당신이 있어."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보여준 길을 따라갈게... 그것이 당신의 명령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의지라면... 나는 기꺼이 이루어 보이겠어."


***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초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라기엔 너무나도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따금씩 곳곳에 보이는 시신과 궤도 자국만이 그곳이 전장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핏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곳이 있네.'

'그렇다는 것은 아직 이 주변에 이 피의 주인이 있다는 의미... 서둘러야겠어.'


모든 것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전쟁의 처참함.

아니, 전쟁이라 하기도 뭐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황폐화된 전장으로 비치는 하늘의 푸른 빛은 퍽 아름다웠다.


핏자국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지 어연 몇 식경.

문득, 그녀는 궤적처럼 길게 이어진 핏자국의 연속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근. 두근.

가슴이 떨려왔다.


저 멀리 골목 끝으로 이어진 붉은 궤적.

긴장을 억누르며 아루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 곳에는.


"..!!!"


"...이런, 들켰나..."


상처 투성이가 되어버린 색채.

아니, 더 이상 색채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었다.


난자한 혈액과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는 사지들.

이와 더불어 한껏 수척해진 살갗과 퀭한 눈빛까지.

그녀의 삶이 다할 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이 명확했다.


"..."


아루는 천천히 무기를 겨누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색채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수척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곧 있으면 죽을테니까."

"힘도 진작에 다 떨어진지 오래... 이렇게나마 버티고 있는건 어디까지나 잔기인 셈이지..."


"...너도 참 끈질기구나."


"끈질김... 하, 생이란 본래 그런 법이지."

"늘 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가장 소중한 개념이니까..."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는 색채의 몰골은 퍽 처량해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약화 되었다고 한들 색채는 색채. 안심은 금물이었다.


아루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색채가 있는 곳으로, 그녀의 심장을 꿰뜷어버리기 위해.

하나 아루의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짐에도 색채는 이를 거부하는 바 하나 없었다.

이에 아루는 적잖은 의구심을 느꼈다.


"...무슨 의도야?"


"뭐...?"


"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거지?"

"또 무슨 꿍꿍이를 숨겨놓은거야? 빨리 말해."


"꿍꿍이... 하하... 그런건 없어."

"그냥... 회의감이... 쿨럭, 들었기 때문이지."


"회의감...?"


색채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두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두 팔에 가려져있던 흉측하고도 거대한 상처가 아루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벌려진 흉곽 너머로 미약한 떨림을 반복하는 색채의 심장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 했다.


"봤지...?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는 이 모양이야."

"노력이라 할 것도 없지. 내가 한 짓은 오로지 갈취와 폭력 뿐 이었는데."


"..."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쿨럭,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고."

"어쩌면...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여기서 멈춘게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 다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


아루의 미간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렇다고 해서 너의 죄가 사라지진 않아."

"넌 너의 욕망 때문에... 인간이 되고 싶다는 그 단순한 욕망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서 인간성을 뺏어갔잖아. 내 말이 틀려?"


"...아니. 네 말이 맞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너희들에겐... 때늦은 넋두리로 들릴것이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럼... 이견은 없는거지?"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보내줄테니까... 너도 제대로 사라지도록 해."


마침내 색채 앞에 우뚝 선 아루.

그녀는 천천히, 날카롭게 깎인 그녀의 무기를 들어올렸다.

하늘 아래 빛나는 금속의 제질이 쨍하니 시야를 비춰오던 그 순간.


문득, 색채가 입을 열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희... 들한테..."


"...뭔데."


"...그동안, 쿨럭... 한 짓에 대해... 단순한... 넋두리랄까..."

"너희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쿨럭..."


"..."


아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색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세계정복같은 원대한 목표도... 순수한 파괴만을 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저 살고 싶었을 뿐 이다... 그저... 너희들 처럼 삶을 영위하고... 너희들처럼...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저... 살고싶었고... 그래서 두려웠고..."

"그래서... 너희들에게 몹쓸짓을 하고 말았지... 후우... 쿨럭..."

"너희들의 세계를 부수고... 그리고 그... 선생... 을 죽일 생각도... 전혀 없었다..."


"..."


"후우... 그래서... 하고 싶었던 말은..."

"...미안... 했다... 리쿠하치마 아루..."

"이건... 진심이다..."


잔뜩 헝클어진 머릿칼 너머로 보이는, 붉게 물든 색채의 이빨과 미소.

그러나 그 표정에서 악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속임수도 없었다.


이에 아루는 눈 앞에 나타난 한 명의 인간을.

그저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잘못된 과정에서 올바른 결과를 기대할 순 없는 법이지."

"너도 이 말에 담긴 뜻을 잘 알았으리라 믿어. 색채."


"...물론."

"그리고 이건... 내가 보내는 사죄의 뜻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천천히 두 팔을 벌려 아루를 환영하는 색채.


이 다음 그녀가 해야할 일은 자명했다.


푸욱.

아루의 무기가 색채의 가슴에 사뿐히, 그러나 다정하게 꽂혀 들어갔다.

색채는 일말의 저항 의식도 없이 깊은 날숨을 내쉬며 힘없이 고꾸라졌다.


"..."


색채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후.

찰나의 침묵이 지나고, 아루는 그녀의 가슴에 박힌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하얀 신비가 아닌, 붉은 혈액이었다.


"...축하해."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인간이 될 수 있었구나, 너는."


총열 끝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천천히 몸을 돌리는 그녀.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루."


"..."


아니, 분명히 환청이겠지.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를 무시하는 아루.


"아루."


"..."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목소리는 점차 선명해져만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루는 차마 응답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루."


"아니, 거짓말이야. 모두 환청이라고."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사실 모두 나의 착각인거잖아..."


"아루."


"그만... 그만해..."

"이제 다 끝났잖아... 뭘 더 바라는거야?"


"아루."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더 이상 그 이의 목소리를 더럽히지 마..!!!!! 그 이는 죽었어... 선생님은 죽었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목소리가 들려올 때 마다 스스로를 부정하며 절규하는 아루.

그러자 문득. 그 목소리의 흐름이 잦아들었다.


"..."

"역시, 환청이었잖아."


.

.

.




https://www.youtube.com/watch?v=RmPUPU8Nwqw





"환청이라니... 조금 섭섭한걸."

"지금도 나는 이렇게 멀쩡히 존재하는데 말이야."


"...?"


그 순간, 더욱 선명하게 그녀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조금 더 선명하고 확실해진 듯한 느낌.

무엇보다 매질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그 미묘한 열화감이 더욱 현실성을 더해주었다.


아루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어어...?"


아루는 그녀가 보고 있는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 그럴것이, 그곳에는 아루가 그토록 찾아 해매던 선생이.

한없이 맑고 깨끗한 골목 사이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서... 선생... 님...?"

"아, 아냐... 대체 어떻게... 어떻게 다시..."


"...여어, 아루. 오랜만이네."

"이런 모습이라 폼이 빠지긴 하다만... 그래도 이해 해줄 수 있지?"


아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현실을 인식하고자 노력했다.

수차례 눈을 비비고, 또한 뺨을 두드리며 환상 아닌 환상으로부터 깨어나기 위해.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부디 진실임을 확실시 하기 위해 말이다.


"아... 아파..."

"그렇다는 뜻은... 당신이 정말로..."


"알아, 믿기 어렵겠지. 하지만 기억해? 내가 했던 그 말."

"색채의 힘이 약해졌기에... 내가 다시금 자의식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지금 이 상황도 별반 다르진 않아! 어쩌면 똑같을수도."


아루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이 선생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물이라더군.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라나 뭐라나."

"그닥 끌리진 않았는데 말이야, 뭐어. 덕분에 이렇게 너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지."


"..."


"아루, 너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어."

"믿기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들어줄 수 있겠니?"


꽤나 감각적인 재회의 순간임에도 그의 표정은 퍽 여유로웠다.


물론, 아루와는 달리.


"...아니, 믿어."

"이 상처와 고통을 보고도... 어떻게 안 믿을 수 있겠어?"


"...뭐?"


그 순간, 순식간에 밝아지는 주변 배경.

그럼에도 아루는 여전히 선생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보면 안될 것을 본 것 처럼.

마주해선 안될 진실을 마주한 것 처럼 말이다.


"어어... 그럴리가. 분명히 신비로 필터를 적용했을텐데...?"


"...신비의 정수에 도달한 내게 그런 속임수가 통할리가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가려서 어떡하겠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슬픔에 젖은 채 애증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는 아루.

이윽고 상황 판단이 끝난 선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후우... 역시, 아루의 눈은 속일 수 없다니까."

"많이 흉하지? 그래도... 너무 빤히 바라보진 않아줬으면 해."


가리고자 했지만 가릴 수 없었던 치부.

그것은 바로 색채의 찢긴 육신속에 깃들게 된 그의 참혹한 모습이었다.


사지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썩어 문드러진 살갖위에 흘러내린 고깃 조각들 뿐.

이와 더불어 아루를 포함한 그녀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생겨난 새로운 상처까지.

사실상 그에게 있어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상처였다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루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휑한 구멍과 함께 흉측하게 변성된 조직 위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야 선생님."


"그게... 너도 알잖아."

"조금 다쳤다고 해야하나... 헤헤..."


"조금 다쳤다라는 수준이 아니잖아 이건...!"


아루의 목소리 끝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역시 우리들 때문인거지...?"

"검은 헤일로의 학생들을 지키려다가 역으로 당한거잖아..."


끔찍한 모습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아루.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으응...? 누가 그러디? 난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는데 말야."


"모든걸 본 당신은 알잖아. 색채가 우리들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당신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모든 걸 본 당신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테잖아."


"...아루, 그 자식이 말한건 모두 가짜야."

"나의 모습을 빌려서, 나의 기억을 토대로 쌓아올린 거짓말이라구."


아루를 향한 따뜻한 눈빛.

그 속에 악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난 말이야... 단 한 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

"모든 걸 본 넌 알테지. 내가 지금껏 색채와의 싸움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는지..."


"그래도... 우리들은 당신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을 주었어."

"그리고 나도... 나는 중요할 때 당신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고... 잠이나 자면서..."

"훌쩍, 끝까지 당신의 곁을 지켜주지도 못했는데..."


"아루..."


"당번... 흐윽, 서고 싶었단 말야... 당신이 내게 준 애정만큼 나도 보답하고 싶었다고...!"

"훌쩍... 나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 당신이 고통받을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한게 한이 되어서..."

"그래서 그토록 힘들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거야...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 도움이 될 수 없었으니까..!!"


쓰러지듯 선생의 위로 엎어지는 아루.

붉게 물든 눈시울 너머로 뜨거운 눈물 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미안. 그토록 힘든 짐을 네게 지워서..."


"선생님이 왜 미안해...? 미안해야 할건 오히려 우린데..."

"우리는... 선생님을 다치게끔 만들고... 죽게 만들었는데...?"


"그래도. 선생이 학생에게 짐을 지우면 안되는거였어."

"어찌보면... 아니, 사실 너희들도 피해자인데. 모든 발단은 색채인데 말이야."

"나는 너희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짐을 지우고야 말았어... 결국은 교육자로써의 내 미덕이 부족했던거겠지."


씁쓸한 표정으로 되내이는 선생.


"아냐, 그런 말하지마... 선생님이 미안할 필요가 어딨어..."

"제발...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줘... 나는... 나는..."


"너희들이 미안할 필요는 전혀 없어."

"그게 본의가 아니었다는건 나도 잘 알고 있으ㄴ... 쿨럭!!!"


순간, 기침과 함께 흐트러지는 그의 미소.

이에 당황한 아루는 다급히 선생을 향해 외쳤다.


"왜... 왜 그래 선생님...?"


"하아... 괘, 괜찮아 아루..."

"잠시...! 하아... 무리해서 그런거니까..."


그러나 그런 그의 말과는 달리, 그의 육체는 온전치 못했다.

이윽고 하이얀 먼지와도 같은 무언가가 선생의 몸 전체로부터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는 아마도 명확했다.


"..."


"..울지마 아루."

"울면 예쁜 얼굴이 망가지잖아."


"훌쩍, 지금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선생님??"


서서히 바스라지는 그의 말단.

또한 조각조각 부서져 하이얀 먼지로 사라지는 그의 육체들.

이를 다급히 붙잡으며, 아루는 절박하게 그를 향하여 매달리기 시작했다.


"훌쩍, 선생님...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거야?"

"색채가 사라졌으면... 이 몸도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거잖아."

"이전처럼 몸을 복구하거나 그런... 그런건 불가능한거야...?"


"알잖니, 난 외부인이라는걸."

"무리하게 신비를 적용했다간... 어찌될지 너도 알잖니."

"처음 삶이 끝난 그 이후로 나는 이 세계에 겉도는 껍질일 뿐이었단다."

"껍질은 껍질답게...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는거지."


"그래도...! 또 다시 선생님을 잃고싶진 않아..."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당신과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무리 오열하고 후회해 보아도 삶의 흐름이란 결국 그런거기에.

그것은 가역이 아닌, 비가역이기에. 이미 무너진 생명은 결단코 되돌릴 수 없기에.

그렇기에 아루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릴 뿐 이었다.


"그거 알아 선생님...? 나도... 나도 힘들었어..."

"다른 아이들이 무너져서 손목을 긋고... 목을 메달려고 할때 실은..."

"실은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 나도 죽고 싶었다고... 정말이지..."


"..."


"훌쩍, 난 당신이 고통받고 죽어갈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어."

"당신의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했고... 작아진 당신마저 지킬 수 없었어..."

"정말이지, 미칠것만 같았다고...!!!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누가 누굴 지키고 구하는지..."

"...훌쩍. 그런데 말이야 선생님. 그럼에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말아...?"


"..."


"바로 당신... 당신의 목소리 때문이었어."

"눈을 감으면 들리는 당신의 그 따뜻한 목소리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정말 더럽고 치사하고 비겁하고 그럴 자격도 없었지만...!! 당신 하나만 보며 버텼어..."

"그런데... 이렇게 이별이라고...? 싫어... 그건 싫단 말이야...!!"


점차 초췌해지는 그의 몰골을 보며, 끝내 오열하고 마는 아루.

그런 그녀에게 선생은 따뜻한 목소리로 마지막 전언을 전하였다.


"아루. 너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어."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에... 괜찮을까?"


결국 채념한 아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생은 안심한 듯, 미소와 함께 화답하였다.


"잠시... 가까이 다가오렴."


"..."


한 층 더 가까이 선생을 향해 다가가는 아루.

거의 밀착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제서야 선생은 한층 풀어진 표정과 함께 되내었다.


"그래... 역시 네 곁이면 안심이 된다니까."

"아루가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나를 옥죄던 공포가 모두 사라지는 기분..."


"..."

"...그럼 가지마."


조심스럽게 선생을 껴안는 아루.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으나 그럼에도 이를 거부하진 않았다.


"아루..."


"언제든지 옆에 있어줄테니까... 이깐 포옹 따위 몇 번이고 해줄테니까...!"

"그러니 제발... 가지마 선생님... 제발...!"


"...그럴 수 없다는걸 알잖아."

"솔직히, 나고 죽고 싶지 않아. 너희들 곁에서 몇 번이고... 너희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며..."

"때로는 맛있는 음식도 먹고... 아루의 사업이 번창하는 모습도 보고... 모든 것이 끝나면 그렇게 살겠다고... 쿨럭...!!"

"그렇게... 스스로에게 약속 했었는데... 헤헤..."


"선생님...!!"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는걸."

"...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진 마.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니까."


선생의 몸이 무너지듯 벽을 향하여 쓰러졌다.

이미 그의 하반신은 연기 너머로 모두 사라저 더 이상 존재 하지도 않는 상황.


점차 초췌해지는 그의 몰골을 보며, 끝내 오열하고 마는 아루.

그런 그녀에게 선생은 따뜻한 목소리로 마지막 전언을 전하였다.


"아루. 너에게 해주고픈 말이 있어."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에... 괜찮을까?"


아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생은 안심한 듯, 미소와 함께 화답하였다.


"...고마워. 못난 선생 아래서 이토록 올바르게 자라줘서."

"어려운 부탁이었음에도 이토록 훌륭하게 완수해줘서... 정말 고맙고... 미안해."


"..."


문득,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

분명 선생의 손은 이미 떨어져 나간 뒤일텐데.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정말 미안하지만... 마지막 부탁이 있어."

"부디... 들어줄 수 있을까...?"


"...뭔데."


조금은 퉁명스러운 아루의 대답.

잠깐의 침묵 이후 마침내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살아줘."

"그리고 기억해줘. 내가 너희들을 결단코 증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끝자락까지 내몰린 극한임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않는 그의 미소.

이에 잔뜩 품어왔던 아루의 독기도 허물벗듯 서서히 사라져만 갔다.


"...훌쩍, 응."

"그럴게... 기억할게... 흑... 기억할게..."


지워져버린 얼굴 반쪽으로 희미하게 나마 짓는 미소.

이내 따뜻한 기운이 아루의 오른쪽 뺨에도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너희들 곁에 있을게... 언제까지나 너희들의 가는 길을 지켜볼게..."

"그러니 부디... 아루, 네가 가는 미래를 결단코 포기하지 말아줘...."


이윽고 환한 빛이 천천히 그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따뜻하고도 포근한, 줄곧 느껴왔던 익숙한 감각도 함께.


"...훌쩍, 흑... 흐윽...."

"선ㅅ... 흐윽, 선생님... 선생니임...."


"아루라면 분명, 그렇게 해줄거라 믿어."

"차마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하지 못하겠다만... 그래도."

"인연이 닿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차츰 비어가는 그의 몸을 껴안은 채 눈물만을 흘리는 아루.

이윽고 빛의 정도는 더욱 강해져 사방을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아루는 끝끝내 눈을 감지 않은 채 모든 광경을 바라볼 뿐 이었다.


그런 아루에게 미안했는지.

아니면 남겨질 모든 학생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는지.

그의 눈가에서 글썽이던 마지막 눈물이 뚝. 뚜욱.

천천히 떨어졌다.


"미안해...? 이렇게 모두를 두고 가버려서..."


"..."


눈이 너무나도 부셨기에.


차마 감지 안고는 배길 수 없었기에.


그렇게라도 자신의 슬픔을 감출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런 형태일지라도 씩씩함을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아루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안녕히 가세요.




나의 선생님.














"아루...!! 아루!!"


"아루님...!!! 아루님 어디 계세요!!"


기운이 회복된 사오리와 함께 흥신소 맴버들과 합류한 히나는 사라져버린 아루를 찾아 해매이고 있었다.

수차례 연락을 넣었음에도 응답하나 없는 그녀를 보녀, 역시 자신이 함께 했어야 한다며 자책하는 히나.


그러나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 데로 집중되었다.


"앗.... 아아..."


"뭐야? 왜 그러는데?"


제자리에 굳어버린 하루카와 이에 당황하는 히나.

그러나 이윽고 그런 히나마저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만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고요한 골목의 끝.

붉게 물든 주변 사이에서 홀로 하얀 백복을 끌어안고 있는 누군가.

리쿠하치마 아루였다.


"리쿠하치마 아루..."


사오리는 마스크를 벗은 뒤 천천히 아루를 향하여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는 그녀를 뒤따르던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루의 눈빛은 공허했다.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흐린 눈동자.


문득, 느껴지는 명암 차에 천천히 뒤돌아보는 아루.

이윽고 다가온 그녀들을 발견한 아루는 슬며시 미소지으며 되내었다.


"....훌쩍, 나... 나 말이야..."

"그래도... 최대한 웃는 모습으로... 헤헤... 보내드렸어..."


"...보내드렸다니."

"그렇다면 그 옷은 역시...."


침묵하는 아루.

그녀의 손가엔 사라지지 않은 선생의 마지막이 붙들려 있었다.

뒤늦게 모든 상황을 짐작한 그녀들은 그저 침묵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어때...? 나 잘 했지...???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거든."

"그, 그럼... 이제 돌아가자. 어디라고 했지? 게헨나? 아님 밀레니엄이었나?"


"...리쿠하치마 아루."


"아아... 아니야!! 진짜 괜찮으니까."

"난 정말로 괜찮..."


철푸덕.

발이 미끄러진 탓일까.

아루는 바닥으로 성대하게 넘어지고야 말았다.


"..."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손을 내미는 히나.

아루는 떨리는 손을 서서히 뻗었으나, 끝내 닿지는 못했다.


"...훌쩍, 흑... 흐윽...."

"어쩜 이렇게... 끝까지 나는... 허당일 수가 있지...?"

"마지막 만큼은... 마지막 만큼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랬을터인데....!"


"....아루."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흐아아아아...!!!!"

"흐윽... 돌아가셨어.... 이제 진짜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난... 난 이제 무엇을 해야.... 어떻게.... 어떻게 그이를.... 흐윽...!!"


"..."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걸까...? 우린...."


이에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것을 잃은 채 무너진 한 여인의 가녀린 등을 보듬어 주는 것 뿐이었다.


[..속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저희 크로노스 방송국으로 색채의 최종 침묵 사실이 전달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키보토스에 색채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모두의 힘으로 함께 색채를 격퇴한 것 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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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 입니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


남은 것은 오직 상처와 깨져버린 누군가의 안경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실로 그리 하였다.


***


내가 이전에 이 글은 해피엔딩으로 끝내겠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토록 원하던 선생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으니 아루 입장에선 해피엔딩이 아닐까...?

는 동담이고 에필로그 한 편 남았으니 마지막까지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