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되어 버린 무관'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우승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트로피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슈팅와 드리블을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축구의 병이오.  나는 또 감독과 전술을 설계하오. 전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무관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감독의 반 — 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 — 만을 영수하는 전술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전술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경기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운동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농구와 야구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우승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공격축구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케인을 뻥글의 유관 억제기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인 듯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무관이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생채기도 머지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감정은 어떤 '포즈'. (그 '포즈'의 원소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나는 내 비범한 능력을 회고하여 경기를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무관과 유관— 세상의 하고 많은 무관이 본질적으로 이미 유관이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무관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 '유관'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무관에 대한 모독이 되오? 굿바이.]

이 씨발놈의 소설은 해석이 싹 다 달라 재밌긴 한데 머리 터져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