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거 처음 써본다

빈약한 필력이지만 꼴렸으면 좋겠다는 주제넘은 소망이 있음

모든 그림은 모툰이 AI화가 기능으로 생성했음


[ 하이렌 리부스크 (22, 女) ]



이탈리아 근처 어딘가에서 독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어느 지역까지 운행하는 초호화 여객선 쿠크베타호.



그 여객선에는 귀족 가문 '리부스크 가'의 자제인 하이렌이 타고 있었다.



(대충 파도소리)



'푸른 바다를 보면서 시원한 바람을 쐬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네...'



하이렌이 하늘색의 긴 머리를 휘날리며 감상에 젖어있던 중, 누군가 하이렌 쪽으로 달려왔다.



[ 베라 데칸젤리르 (20, 女) ]



"하이렌 언니이~"

"베라? 너 어디 있었어? 안보이길래 오늘 여객선 출항일인 거 잊어버린 줄 알았잖아."



베라가 멋쩍게 웃으며 금발 트윈테일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늦잠 자는 바람에 출발하기 직전에 도착해버린 거야. 진짜 아슬아슬했어. 헤헤..."

"너도 참... 밤늦게까지 소설 보는 것 좀 자제해. 늦게 자면 피부에도 안 좋아."

"하지만 소설이 너무 재밌는걸! 요즘은 '왕관의 날개'라는 소설을 보고 있는데 진짜 언니 나믿고 한 번 읽어봐. 괜히 베스트셀러인 게 아니더라구!"

"그거 혹시 저번에 추천해 줬던 거처럼 드라큘라 나오고 늑대인간 나오는 그런 소설이니..."

"아, 아니야! 그때는 언니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몰라서 그랬던 거구 이건 달라! 로맨스야 로맨스! 읽다 보면 푹 빠져서 진~짜 시간이 금방 가더라."



베라는 두 손을 치켜들며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그으래? 로맨스라면 뭐... 시간 날 때 한 번 읽어볼게."

"정말 만족할 거야! 아, 그리고 나 오늘 무도회에서 바도프님이랑 춤추기로 했어. 저번처럼 춤추다가 실수할까 봐 걱정도 되고 막 떨리는데... 언니는 오늘 무도회에서 어떤 분이랑 춤추기로 했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아픈 곳을 찔린 하이렌의 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파트너 아직 없는데..."

"앗... 미안해. 몰랐어... 언니. 나한테도 파트너가 있는데 언니도 당연히 있는 줄 알고..."

"괜찮아. 사실 이번 무도회에는 참석할 생각이 별로 없었기도 하고."



하이렌은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 남성분들이 보는 눈이 없으시네. 이렇게 예쁘고 머리 좋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을 그냥 두다니!"

"갑자기 뭐야~ 부끄럽게..."

'사실 예쁜 거야 그렇다 쳐도 성적은 중위권 턱걸이에 착하니 뭐니 하는 것도 거의 다 내숭이고 성실하긴커녕 상당히 게으르지만~ 기분은 좋네... 후후...'

"언니는 좀 자신감을 가져. 언닌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니까?"

"그렇게 말을 해도..."



베라는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아앗! 나 지금 따로 부탁받은 일이 있었지 참! 그럼 이따 봐 언니~"

"그래..."



하이렌은 베라가 중앙홀로 들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다가, 근처 의자에 살며시 앉았다.



"하아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도 무도회에 가고 싶은데 파트너가 없으니... 갑자기 헤르츠다인님이 나에게 다가와서 파트너를 해달라고 부탁해줬으면 좋겠다...'



머지않아 픽 웃음이 나왔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만. 대화도 딱 한 번 나눠봤었는데 내 이름은 기억하고 계시려나? 그때마저도 잔뜩 긴장해서 말을 엄청나게 더듬었는데.... 바보같이...'



하이렌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그래도... 정말, 너무 좋았어. 헤르츠다인님과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



그러다 뺨을 살짝 붉히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그런 기회를 자주 얻고 싶은데, 내가 먼저 헤르츠다인님에게 말을 걸기에는 역시 너무 부끄럽달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기분 좋은 생각을 하는 순간에 방귀가 나올 것 같다니... 이걸 해결하려고 저 멀리 화장실까지 가기는 좀 귀찮은데.'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하이렌은 의자에 앉은 상태로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들었다.



뽀오오오오오옹-



'아, 이런 흉한 자세로 방귀를 뀌면 안 되는데 습관적으로... 이래서 습관이 무서워.'



그녀는 능숙하게 손바닥으로 엉덩이 뒤쪽을 휘저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상관은 없나? 그나저나 내 몸에서 나온 거지만... 이 지독한 냄새는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네.'



하이렌의 두 손이 다시 허벅지 위에 놓이게 됐을 무렵, 누군가가 하이렌의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하이렌씨."

'...헤르츠다인님이잖아? 하필 이런 때에...'



하이렌은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온 보라색 샤기컷 머리와 빨간색 눈동자를 가진, 턱시도를 입은 남자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헤르츠다인님. 그간 평안하셨는지..."

'침착하자... 너무 티만 안 내면 아무리 영리한 헤르츠다인님이라고 해도, 내가 방금 방귀를 뀌었다고는 생각 못 할 거야...'

"저는 무탈하게 지냈답니다. 다행히도 그건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가 돋보이시는 하이렌씨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아름다운...? 분명 헤르츠다인님이 나한테 아름답다고 칭찬하신 거지?! 내 이름도 확실히 기억하고 계셨고! 하아... 굉장히 기뻐서 눈물 나올 것 같아...♡'

"과, 과, 과, 과장... 아니, 과찬이세요."

'으으... 또 그때처럼 말실수를...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과찬이란 단어가 생각이 안 났어!'



하이렌이 속으로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책망하는 사이, 헤르츠다인은 하이렌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던 건가요?"

"네!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람을 쐬는 기분이... 좋아서요."

"그러셨군요. 확실히 새파랗고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면서 청량한 바람을 쐬면... 크흡?!"

"무슨 일이신가요?"

"...예상치 못한 뭔가 진득한 냄새를 맡아서 순간적으로 놀란 것 같습니다. 이 근방에서 유조선이 기름을 흘리기라도 했나 보군요."

"그... 그런가요..."



살짝 부르르 떠는 헤르츠다인 옆에서, 바다 쪽을 곁눈질하는 하이렌의 얼굴은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해요... 헤르츠다인님...'



그때, 헤르츠다인은 바닥 쪽 방향의 무언가를 본 후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갑작스럽지만 볼일이 생겨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친절함으로 대화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네? ...네! 조심히 가세요!"



헤르츠다인은 빠른 걸음으로 하이렌과 멀어져갔다.



'내 무도회 파트너가 돼 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뭔가 많이 바쁘신가 보네. 아쉬워라...'



하이렌은 배에 가지런히 얹은 두 손을 무의식적으로 꼼지락거리며 생각했다.



'물론 헤르츠다인님은 인기가 많으시니까, 이미 파트너가 계실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한번 물어보고 싶었달까...'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이게 누구야? 하이렌 아니야?"

'이 짜증 나는 목소리는...!'



[ 미네스 프로니안 (22, 女) ]



뒤돌아서보니 빨간색 웨이브 머리의 흰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무언가를 깔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역시 미네스였어...'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정~말 반가운걸? 근데 드레스를 좀 비싼 걸로 사지 그랬니? 나 같으면 그런 촌스러움이 배어있는 드레스는 창피해서 못 입을 것 같은데 말이야. 호호!"

'후... 만나자마자 속을 긁어대네. 언젠가 한번 까불지 못하도록 콧대를 확실하게 팍 눌러줘야 하는데 말이야.'

"촌스러운 건 네 미적 감각이겠지. 너야말로 네가 입은 드레스는 요즘 만들어진 거긴 하니? 노티가 풀풀 나는데,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온 거라 해도 믿을 정도인걸~"

"흥, 네가 고풍스러움과 고상함을 구별 못 하는 건 아니고? 어쨌든, 난 오늘 밤 무도회에서 에뱅님하고 춤을 추기로 했는데 너는 어쩌기로 했니?"

'하필 무도회 파트너 얘기야? 으...'



하이렌은 식은땀을 흘렸다.



"...난 이번 무도회에는 딱...히 관심 없어서..."

"흐응? 저번 무도회까지 열심히 참석하더니 갑자기이~? ...혹시 이번에 무도회 파트너 신청을 얼마나 받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윽... 뭔가 눈치챘나? 이건 거짓말하면 들키게 되어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미네스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왜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니? 혹시... 무도회 파트너 신청을 하나도 못 받은 거니~? 내가 눈치 없는 질문을 했었네~ 이거 정~말 미안해서 어쩌지이? 호호호!"

'...한 대 치고 싶다.'

"갑자기 무도회에 관심이 없어진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네~ 호호! 너 저번 때는 그래도 파트너 신청 좀 받지 않았었니? 그 사이에 남성분들 앞에서 큰 실수라도 한 거야? 풉..."

'아주 좋아죽네 그냥!'



하이렌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침묵을 유지하는 사이, 하이렌과의 신경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 미네스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흐음~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이 근처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단 말이지? 너 혹시 여기서-"

'...! 아직 방귀냄새가 남아있단 말이야? 설마 알아챈 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하이렌은 미네스의 말을 숨죽이며 들었다.



"천박하게 트림이라도 했니?"

'휴...'



빗나간 미네스의 일격을 뒤로하고, 하이렌은 표정을 가다듬고 회심의 반격을 가했다. 



"훗,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더니..."

"뭐, 뭐얏!... 크흠..."



순간적으로 미네스의 초록색 눈동자가 눈에 띄게 커진 것을 확인한 하이렌은 피식 조소를 지었다.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러실까... 돼지라는 단어가 문제였을까? 혹시 요즘 체중이 좀 늘었다던가?"

"아니거든!! 그런 거... 아~ 이런 수준 낮은 대화에 더 못 어울려주겠네 정말... 더러워진 귀를 좀 정화하러 가야겠어."

"후후... 지금 도망가는 거야?"



미네스는 하이렌의 도발을 뒤로 한 채 중앙홀에 들어갔고, 이렇게 제10952회 하이렌과 미네스의 신경전은 하이렌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근데 내 방귀냄새가 아직도 남아있었다는 건 좀 충격이다... 다음부턴 좀 귀찮아도 화장실에서 해결해야겠어.'



방금 있었던 신경전에서 에너지를 많이 쓰기라도 했는지, 하이렌은 허기를 느꼈다.



'슬슬 점심이나 먹으러 가볼까? 식당에는 뭐가 준비되어있으려나...'



그녀는 중앙홀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이렌이 도달한 중앙홀은 미려한 샹들리에로부터 나오는 황금빛에 물들어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나 턱시도를 차려입고 두세 명씩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시질 않았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클래식 음악이 하이렌의 귓가를 감쌌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색 계단, 척 봐도 고급스러운 소재를 쓴 듯한 깨끗한 소파, 사치스러운 장식으로 꾸며지고 예술적이게 조각된 기둥, 곳곳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화분 등이 어우러져 마치 황홀하고 아늑한 공간이란 이런 곳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머지않아 이 분위기를 깨뜨릴 불행이 찾아올 것이라고는,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식당이... 아마 3층에 있었지?'

"하이렌!"

'방금 누가 날 부른 건가?'



[ 제노시아 세리 (22, 女) ]



하이렌이 잠시 계단을 향하던 발걸음을 멈춘 사이, 옆에서 분홍색 단발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빠르게 다가와 말했다.



"하이렌... 혹시 내가 가지고 다니던 초록색 가방 못 봤니? 분명 어떤 검은 의자 위에 둔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제노시아 목소리였구나.'

"못 봤는데... 어쩌다가 잃어버린 거야?"

"어딘가에서 가방을 의자 위에 둔 채로 쉬고 있다가, 그 자리를 뜰 때 가방을 깜빡하는 바람에... 어떡하지? 그거 로렌쇼님한테 선물 받은 거라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렇게 중요한 거면 간수 좀 잘하지 그랬어. 아, 검은 의자라면 여기보다 더 위층에서 본 것 같기는 해."

"더 위층? 정확히 몇 층에?"

"정확히는 나도 기억 안 나."

"아, 그렇구나... 일단 네 말대로 위층에서 가방을 찾아봐야겠네. 고마워 하이렌!"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달리는 제노시아의 뒷모습을 보며, 하이렌은 생각했다.



'제노시아 쟤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덜렁거리는 건 여전하네. 어떻게 저런 애가 로렌쇼님과 사귀게 되었는지 참...'



그녀는 제노시아가 달려갔던 길을 뒤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와플이 제일 맛있을 줄은 몰랐는걸... 산처럼 쌓아두고 먹고 싶을 정도였어. 보는 눈이 있어서 참았지만...'



식사를 마친 하이렌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그때,



삐이이이이이이잉-! 삐이이이이이이잉-!



위쪽에서 날카롭고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깜짝이야... 경보기 오작동하는 거 아직도 안 고친 거야?'

"승객 여러분, 현재 발생한 비상 상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이 여객선은 무장한 해적에게 습격을 받는 상황으로 승객 여러분께서는 상황이 끝날 때까지 

신속히 1층의 비상대피 구역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 현재 발생한 비상 상황에 대해서..."

'아니, 오작동이 아니라 정말 비상 상황이었어? 해적이 여객선을 습격했다니 이게 대체...'



다급하게 구두가 계단을 밟는 소리와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만들어낸 혼란을 깊게 체감하며,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여기가 비상대피 구역인가?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네.'



비상대피 구역이라는 장소는 하나의 큰 창고와 거의 비슷했다. 보통의 창고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물건이 거의 채워져 있지 않고 문과 외벽이 두꺼운 금속으로 만들어져있으며 문 앞에 '비상 상황 외 사용금지'라고 쓰여있는 팻말이 붙어있는 정도였다.



"해적이라니...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불안해할 필요 없어요. 이 여객선은 업계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쿠크베타호니까... 상황은 곧 정리될 거에요."

"나 원 참, 재수 옴 붙었구만."

"이곳에서까지 그런 저급한 것들과 엮여야 해?"

"여기에 누가 타고 있는 줄 알고 감히..."

"요즘 시대에도 그런 게 있나요?"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비상대피 구역 안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가운데, 베라가 하이렌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는 이미 와있었구나?"

"아, 베라. 혹시 네가 여길 못 찾아올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언니. 내가 공부는 좀 못해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 그냥 사람들 따라오면 되는 건데."

"그래.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탕- 타당- 탕- 탕-



그때, 갑자기 바깥쪽에서 총성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해적들과 경호원들의 전투가 시작된 듯했다.



"언니..."



하이렌이 총성 때문에 잠시 바깥쪽으로 돌린 시선을 다시 베라 쪽으로 돌렸다. 



베라는 총성에 겁이라도 났는지 약간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하이렌의 손을 꼭 잡았다. 하이렌은 베라의 손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무사할 수 있겠지...?"

"그럴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은 했지만 하이렌 자신도 안에 스며든 왠지 모를 불안감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총성의 빈도는 점차 줄어들어 첫 총성이 들린 지 대충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총성이 완전히 그쳤다.



"총소리가... 멈췄네요?"

"해적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뭔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안내가 따로 있을 때까지 여기에 있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천한 것들이 감히 내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게 하다니... 다음부터는 해적 같은 건 얼씬도 못하도록 군함 1척이라도 대동하고 가야겠어."



'휴... 이제 안심해도 되는구나. 좀 불안한 느낌은 있지만... 기분 탓이겠지.'



하이렌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닫힌 문 바깥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자, 비상대피 구역 내의 사람들에게 불안감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뭔가 안내방송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상황이 종료됐으니 나와도 된다든지..."

"음... 해적과의 교전 중에 방송장비가 고장이라도 난 건가..."

"방송장비가 고장 났다 해도 직접 이곳에 와서 상황을 알리면 되잖아?"

"혹시... 해적을 격퇴한 게 아니라 해적에게 패배한 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곳에 고용된 경호원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던 엘리트... 그런 자들이 격퇴할 수 없는 해적이란 있을 수 없어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진정하시죠. 침투한 해적이 남아있는지 세세히 확인하는 중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런 것치곤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나요?"



탁- 탁- 탁-



한창 웅성거리고 있던 그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던 문 바깥에서 드디어 발소리에 가까운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들 잠깐 조용히 해주세요!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요!"

"문밖에서요?"



곧 비상대피 구역에서의 말소리는 멈추고, 다들 문 바깥쪽 소리를 듣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분명 사람의 발소리였다. 그러나 그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탁- 탁- 탁- 탁- 탁-



발소리의 주인은 누군가에게는 공포심을, 누군가에게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며, 마침내 비상대피 구역의 닫힌 문 앞에 섰다.



끼이이익-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얼굴 전체를 가리면서 인간의 두개골 그림이 그려진 초록색 복면, 상체 부분은 빨갛고 하체 부분은 파란 것이 마치 막대자석을 연상케 하는 바디슈트, 병아리처럼 샛노란 신발... 도저히 경호원이나 선원이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경호원이나 선원이 아니라는 것은 곧 이 여객선을 습격한 해적임을 의미했다. 해적의 오른손에는 약 65cm 정도의 길이의 총이 들려 있었다.



"다들 여기 계셨구만. 즐거운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수다."



해적은 여유롭게 걷다가 사람들 앞에 섰다. 해적이 입은 바디슈트의 왼쪽 허벅지 쪽에 부풀어 오른 주머니가 몇몇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내가 뭐하는 놈인지 대충 아는 눈치니까, 본론부터 말할게? 너희는-"

"너 정말 겁도 없구나?"



[ 루에즈 아르소 (21, 女) ]



갈색 포니테일에 노란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해적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기 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긴 하니? 전부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야. 이런 사람들이 모인 여객선을 건든 이상, 넌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여기 있는 모든 가문에 전쟁을 선포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루에즈씨... 저 해적은 총을 가지고 있으니, 자극하는 행동은 좀 자제하시는 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지만, 내가 특별히 이 실수를 조금이나마 만회할 기회를 줄게.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 그렇게 한다면 네 목숨만은 건질 수 있도록 해주지."



옆 사람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퍼붓는 루에즈의 협박 섞인 말을, 해적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간 젖힌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딱 봐도 진지하게 듣는 모습은 아니었다.



'저건 너무 무모한 거 아냐? 옷 입은 거부터가 미친놈 같은 저 인간 앞에서 그러면...'



무슨 위험한 일이 터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하이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에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고오~ 무서워라."



해적은 가볍게 루에즈를 조롱하고는, 바로 루에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아악!!"

"루에즈씨!"



루에즈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사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연약한 숙녀에게 이 무슨 야만-"



탕- 탕-



해적은 자신에게 격하게 항의하는 한 남자를 본체만체하며 위쪽을 향해 총을 두 발 쏘았다.



"히익!"

"꺄아아아악!"

"모두 입 좀 닫아주겠어?"



해적의 말 한마디가 끝난 뒤에, 고요한 침묵이 찾아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사람은 몇몇 있었지만, 그들의 입에서도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큰일 난다고. 단단히 돌아버린 놈이라면 뒤질 수도 있다? 나도 사실 거기에 가깝긴 한데... 뭐, 아무튼 몸으로 잘 기억해둬."



주변 남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킨 루에즈는 제 나름의 설교를 하는 해적을 분노와 두려움이 섞인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걷어차인 옆구리가 아직도 상당히 아픈지 그녀의 오른손은 옆구리에 가 있었다.



"아까 뭘 말하려고 했더라... 아, 너희는 그냥 나에게 협조만 잘 해주면 돼. 그래 주면 몸 멀쩡히 돌아갈 수 있게 해줄 테니까... 하지만 허튼짓하면 그 귀한 몸에 바람구멍이 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줘. 뭐, 최상의 환경에서 교육 잘 받으신 분들이 가진 총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 지키려고 하나뿐인 목숨을 거는,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겠지만~"



자신이 뭘 원하는지 대충 설명한 해적은 뒷짐을 지고 뒤돌아섰다.



"일단 손부터 묶자고."







해가 지고 밤이 된 시각, 비상대피 구역에는 여자들만 남았다. 남자들은 해적이 비상대피 구역 밖으로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두 손은 뒷짐을 진 상태로 밧줄로 결박되어있었으며, 오른쪽 가슴에는 흰색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숫자가 적힌 네모난 번호표가 붙어있었다.



'남성분들한테 별일 없으려나? 잘 따르기만 하면 해치지 않는다고 했지만... 보통 미친 사람처럼 생겼어야지. 루에즈를 발로 찬 것도 그렇고.'



하이렌은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무릎 꿇고 앉아있었다. 하이렌의 번호표에는 41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탁- 타퍽- 탁- 타퍽-

끼이이이익-



사람의 발소리와 어느 정도 무게감이 있는 것을 발로 차는 듯한 소리가 섞인 듯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어느새 해적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해적의 오른발 앞에는 커다란 골판지 상자가 있었다.



퍽-



해적의 발길질에 비상대피 구역 안쪽으로 길게 밀려난 상자에는 네모난 하얀색 크래커가 가득 담겨있었다. 하이렌은 그 크래커를 쿠크베타호 안의 식당에서 본 적이 있었다. 



"사실은 오늘 너희랑 할 게 있었는데 말이야? 내가 지금 좀 피곤해서 그 일은 내일로 미뤄야겠다. 그건 그렇고 너희 배고프지 않냐?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여기에 시계가 없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저 상자 안에 있는 건 혹시 우리 먹으라고 가져온 건가...'



하이렌이 상자 안 크래커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사이, 해적은 슬며시 문을 닫은 후 상자 앞에 서서 총을 들지 않은 왼손을 허리춤에 올렸다.



"여기 있는 이 크래커를 먹고 싶은 사람은 일어서서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도록. 먹는 동안은 손을 묶은 밧줄을 풀어줄 테니까... 아, 그리고 한 사람당 12개까지만 먹어라."

'갑자기 웬 90도 인사? 우리한테 깍듯한 인사라도 받고 싶다는 건가? 참... 정말 이상하다니까 저 인간...'



그녀가 해적에게 느끼는 비호감은 상자 안 크래커에 대한 의구심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까 저 인간이 가져온 저 크래커도 상당히 꺼림칙한데, 뭔가 있는 거 아냐? 독을 탔다던가?'



해적이 들고 있는 총이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해적을 보던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자, 상자 안 크래커에 대한 추측이 약간 바뀌었다.



'총으로 쏴버리는 더 간단하고 편한 방법을 두고 굳이 음식에 독을 타는 방법을 쓰는 건 좀 부자연스러운가... 아무튼, 뭔가 꺼림칙해. 적어도 내가 제일 먼저 먹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식당에 그 많은 음식 중에 하필 크래커 같은 걸 가져온 거야? 나머지 음식들은 이미 다 날름한 건가? 후... 그래. 해적 따위한테 뭘 기대하겠어.'



"이거 남자들한테 먼저 먹으라고 가져갔었는데, 자기들은 괜찮으니 대신 너희 주라더라? 조금이지만 스윗했어. 음."

'혹시 그냥 크래커가 맛없어서 안 먹은 거 아냐?...는 너무 꼬인 생각이겠지? 분명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해적은 한참 동안 서서 사람들을 살펴봤지만, 그의 요구대로 일어서서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인 사람은 찾지 못했다. 다들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모양새였다.



"뭐야, 너희 안 배고픈 거야? 혹시 다들 오늘 점심에 폭식이라도 왕창 하셔서 아직도 배가 든든하시기라도 한 건가?"

'적어도 밖에서는 폭식 같은 거 안 하거든! 오늘 점심때도 사실 와플 더 먹고 싶었는데 많이 먹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적당히 먹고 끝냈-'



꼬르르르르륵-



하이렌이 한창 속으로 화를 삭이던 그때, 그녀의 뱃속으로부터 커다란 뱃고동 소리가 비상대피 구역 내에 울려 퍼졌다.



'헉... 소리가 좀 크게 난 것 같은데...'



자신의 배에서 난 소리에 놀란 그녀는 얼굴색을 조금 붉힌 채 눈을 재빠르게 굴려 주위를 살폈다. 표정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이렌과 같은 공간의 있던 대부분의 사람 또한 그녀보다 정도는 덜했지만,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41번... 너 배가 밥 달라는 소리 한 번 웅장한데? 천둥이라도 치는 줄 알았다, 야."



해적은 거대한 소리의 발원지 쪽을 바라보며 떠들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해적이 바라보는 방향 쪽으로 향했다.

'41번'이라는 명칭은 오른쪽 가슴에 붙은 번호표에 41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 사람. 즉 하이렌에게 붙여진 것이었다. 해적은 번호표를 사람들에게 붙이면서 그 번호표에 써진 숫자를 원래 이름을 대신해 부르겠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아주 잠깐 약탈 대상인 사람들을 잠깐 지목한답시고 모든 이름을 다 외우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바로 나인 걸 어떻게 눈치챘지? 그렇게 소리가 컸나? 으으... 그렇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다 들리게 말할 것까진 없잖아! 정말 배려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인간 아냐?'



하이렌은 전보다 한층 더 빨개진 얼굴로 해적을 잠깐 째려보고는, 바로 바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계속 굶으면 계속 배에서 아까 같은 소리가 날 텐데... 그랬다간 창피한 것도 창피한 거지만 꽤 큰 민폐겠지. 하아... 아무래도 나한테 선택권은 없는 것 같아...'



그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천천히 일어선 뒤에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였다.



'이러면 된다고 했었지?'



그러자 해적이 말없이 하이렌에게 다가와, 재빠르게 그녀의 두 손을 결박하고 있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배고프면 잠이 잘 안 오기도 하고... 또, 남성분들이 우리를 위해서 굶으면서까지 자기 몫을 다 넘겨주셨다는데 그걸 먹지 않으면 좀...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계속 자신이 크래커를 먹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상자를 향해 걸어가던 그녀는 어느새 상자 앞에 도달했다. 그녀의 오른손이 상자 안의 크래커 한 개를 꺼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입에 대지도 않았던 건데. 지금은 배고파서 그런지 좀 맛있어 보이네?'



하이렌은 곧이어 크래커를 한입 베어 물어 맛을 음미했다.



'아몬드를 넣은 건가? 음... 그럭저럭 먹을만한 것 같네.'



하이렌이 상자에서 두 번째 크래커를 집어 먹으며 주위를 잠시 살펴볼 무렵, 해적은 한 여자의 밧줄을 풀어주고 있었다. 하이렌이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고 있는 사람들도 몇 명 보였다.



'역시 처음으로 나서는 건 다들 부담스러웠던 건가... 이래서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다고 하는 거구나.'



그녀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크래커를 또 한입 베어 물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샌가 옆으로 누워 자고 있던 하이렌이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잠에서 깨어나 앉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긴 하는구나... 하도 잠이 안 와서 그대로 밤새는 줄 알았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녀의 배 속을 잠식한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속이 좀 싸한데... 혹시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자서 배가 놀랬나? 아니면 어제 먹은 게 좀 잘못됐다던가...'



(대충 발소리)



하이렌이 몸을 일으켜 앉아 자신의 소화기관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을 무렵, 닫힌 문 바깥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발소리가 해적의 발소리임을 직감했다.



(대충 문 열리는 소리)



문을 열고 여유롭게 걸어 들어온 해적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총이 들려있었지만, 왼손에는 처음 보는 커다란 베이지색 보따리가 있었다. 해적은 비상대피 구역 내를 슥 살폈다. 그의 오른편에는 어제 자신이 가져온 상자가 있었는데, 그 상자 내에 가득 담겨있었던 크래커는 이제 10개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모두 번호순으로 동그랗게 둘러서 주실까?"

'뭘 하려는 거야? 설마 이상한 짓이라도 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하이렌은 약간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해적의 요구에 따라 자리를 이동했다. 자리이동을 마치니 '41번'에 해당하는 하이렌의 왼편에는 '40번'에 해당하는 베라가 서게 되었다.



"지금부터 너희는 지금 걸치고 있는 옷만 빼고 돈 되는 건 다 나한테 주면 돼. 간단하지?"

'딱 해적다운 일을 하려던 거였네. 그나마 다행이랄까...'

"아, 너희가 명심해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너희 모두 이 일이 다 끝나기 전에는 이 방에서 절대 못 나간다? 내가 붙여준 번호표가 검은색으로 변한 사람만 빼고."

'갑자기 출입통제를? 문밖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야? 번호표랑은 또 무슨 상관인데?'



하이렌은 해적의 일방적인 통보에 대해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봐도 도저히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질문하는 것은 포기했다. 

그녀는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 옆에 있는 베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라?'



베라는 몸을 약간 부르르 떨고 있는데다, 안색도 영 좋지 않아 보였다. 그것이 걱정된 하이렌은 베라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어? 너 뭔가 힘들어 보여."

"아, 아니야. 언니... 나 아무 일도 없... 아으..."



해적은 말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41번,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조용히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 죄송합니다..."

"그래 뭐... 그 말한 지 몇 시간은 지났으니 까먹을 수도 있긴 하겠다. 앞으론 주의하라고."

'아니, 사람이 아파 보여서 그런 건데 이 정도 말도 못하나? 아무리 해적이라지만... 인간성이란 게 조금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하이렌은 속으로 해적을 욕하며 분을 삭이고는, 다시 베라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얘 혹시 뭔가 숨기는 거 있나?'



한창 베라를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아랫배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은 건 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 아까부터 뭔가 속이 안 좋고 가스가 많이 차는 느낌이야. 가스라도 비우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여기서 그럴 수는 없고...'



하이렌은 약간 차분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해적이 관심을 둘만 한 돈 되는 것이라 봐야 구두, 목걸이나 반지 같은 것뿐일 테고, 지금 이곳엔 50명 정도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때까지만 좀 참자...'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아쿠아마린 목걸이라... 이걸 보니 1개월 전의 일이 생각나는구만. 내가 배 갑판에서 노가리를 까고 있었는데 말이지..."



해적은 사람들의 물건을 하나 입수할 때마다, 그 물건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장황한 썰을 풀거나 소름 돋게 재미없는 아재 개그를 시전했다. 썰을 푸는 동안에는 마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듯이, 사람들이 여러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짓거나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 때문에 한 사람에 대한 약탈을 완전히 마치기까지 수십 분을 소모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그의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약탈보다 수다 떠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할 정도였다. 



'해적이면 해적답게 해적질에나 집중할 것이지, 지금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하아... 슬슬 방귀 참는 것도 힘든데... 이러면 끝이 안 보이잖아...'



그런 이해할 수 없는 해적의 행동을 계속 지켜본 하이렌은 속으로 역정을 냈다. 이대로 가다간 많은 사람 앞에서 그녀의 방귀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장이 꼬이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해... 리부스크 가의 장녀로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단 말이야..."



하이렌이 인고의 시간을 보내던 그 시각, 몸을 계속 떨며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던 베라는 문득 뭔가 작정한 듯한 표정을 하더니 곧이어 입을 열었다.



"저기 해적님!"

"내가 그때 뭘 했냐면... 뭐냐? 40번."



해적은 자신의 말을 끊게 한 베라를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저... 혹시 지금 화장실...에 좀 가도 될...까요?"

"너 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번호표가 검게 변하지 않으면 내가 일 끝나기 전까지 여기서 절대 못 나간다고 했잖아."

"그게... 제가 좀 급해서..."

"좀 급한 거면 아직 참을 만 하단 거네."

"사실 많이 급해요! 그러니 제발... 어떻게든 안될까요... 해적님?"



베라의 얼굴은 어느샌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표정에는 마치 그것이 평생의 소원이라는 듯한 간절함이 배어있었다.

웬만한 남성이라면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겠지만, 해적이 그 웬만한 남성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그녀에게는 불행이었다.



"화장실이 많이 급하다고?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는 않지. 안 돼."

"하지만..."

"안 돼."

"이대로는..."

"난 같은 말 반복하게 하는 게 정말 싫거든? 싫은 일을 계속하게 되면 화가 날 테고... 화가 나면 그건 결코 너에게도 좋지 않을 거야. 대충 내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지?"

"네..."



창피함을 무릅쓰면서까지 전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해적의 완강한 거부에 부딪혀 요구가 좌절된 베라의 표정은 절망에 물들어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의 몸도 전보다 더 강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무정할 수가 있지? 그냥 좀 보내주지. 급하다는데... 저러다가 뭔 일 터지면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마음같아서는 해적의 가랑이 사이에 발차기라도 꽂아넣고 싶은 하이렌이었지만, 현재로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베라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꾸루루룩-



갑자기 자신의 아랫배 쪽에서 발생한 불길한 소리를 감지한 하이렌은, 자신의 두 다리로 엉덩이 쪽을 압박했다.



'나도 상당히 힘든 상황이긴 한데... 베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부디 별일 없었으면 좋겠지만...'



하이렌의 소망이 무색하게도, 베라는 눈동자를 통해 점점 커지는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혹시 말이야... 아몬드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잘... 모르겠는데요..."

"바로 이게 된다고. 다이아몬드."

"아..."

"이게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냐면 말이지? 다이가 죽는다는 뜻이니까..."



해적에게 아재 개그도 모자라, 그 개그에 대한 설명까지 듣는 한 명의 약탈 대상의 표정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해적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에게서 빼앗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신나게 흔들며 개그 설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개그 집어치우고 빨리 일이나 끝내!!'



계속되는 잡담과 아재 개그에 지친 하이렌은 마음속으로 열변을 토했다. 물론 해적의 약탈작업 속도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으으... 방귀도 많이 참으면 정말 괴롭구나... 배에 가스가 차다 못해 위로 역류하는 것 같은 느낌이야... 이런 거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자신의 번호표를 슬쩍 확인한 이후에 나름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으로, 심호흡하면서 밧줄로 결박된 양손의 손가락을 배배꼬았다.



'왜 이렇게 가스가 많이 차는 걸까? 여태까지 살면서 배에 탈이 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가스만 거하게 차는 경우는 또 처음이란 말이지... 정말 저 자식 때문에 별일을 다 겪네.'



자신이 겪는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던 하이렌은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잠깐만... 지금 베라의 상태는 괜찮나? 화장실이 급하다고 한지 시간이 꽤 된 것 같은데...!'



상당히 불안해진 그녀는 재빨리 베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정말 위험해 보이는데... 보고 있기가 안쓰러울 지경이야.'



허리를 약간 굽힌 베라의 창백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몸떨림 강도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인 것이 드러난 듯한 표정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인내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 자식은 되도 않는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 낭비하고 있고! 넌 정말 나중에 잡히면 가만 안 둘 거야...'



한창 하이렌이 해적에 대한 분노로 마음 깊은 곳을 불태우고 있던 순간.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뿌부우우우우우우바박-! 부아아아아아악-! 뽀오오오옹-



베라는 상당히 큰 소리의 방귀를 연발로 뀌었다. 분출된 방귀의 풍압으로 들춰졌던 베라의 하늘색 드레스는 엉덩이가 잠잠해진 이후에야, 베라의 검은색 실크 소재 레이스 팬티를 가릴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방금 베라가 방귀 뀐 거야? 그럼 아까부터 계속 힘들어했던 이유가 나랑 똑같은 이유였다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하이렌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히 높은 낭떠러지에 한 손으로 매달려 버티다 손의 힘이 다해 결국 추락하는 사람이나 지을 법한 표정의 베라를 쳐다볼 뿐이었다.



'끔찍하게 부끄럽겠다 정말로... 불쌍하게도...'



베라를 동정하던 그녀 쪽으로도 베라가 내보낸 가스의 냄새가 확 퍼졌다.



'읍, 이 구린내가 베라의 방귀냄새구나... 자랑은 아니지만 내 것보단 냄새가 덜하네.'



개그 설명에 정성을 들이고 있던 해적이 갑자기 베라를 향해 뒤돌아섰다. 



"40번, 너 방금 방귀 뀌었지?"

"...죄송해요..."



베라는 면목없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크흐.... 조심하셨어야지. 냄새가 그 귀여운 얼굴과 매치가 안 되잖아."



해적은 잠시 머리를 까딱거리고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다시 방금 전까지 마주하던 상대와 마주했다. 고개를 못 들고 앉아있는 베라의 모습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처량함을 느끼게 했다.



'저런 식으로 숙녀의 실수를 망신주다니... 루에즈에게 발차기를 날렸을 때부터 신사적인 면이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하긴 했다만, 정말 쓰레기 같은 자식이야. 그리고 따지고 보면 화장실 못 가게 해서 그렇게 된 거잖아!'



그 광경을 목도한 하이렌은 다시 해적에 대한 분노에 불을 지폈다.



꾸르루루루루루륵-



'흐이익!'



자신의 아랫배에 쌓인 가스들로 말미암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하이렌은 화들짝 놀랐다.



'으윽... 베라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난 베라처럼 될 수는 없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야 해...'



그녀는 이 고역스러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다리로 엉덩이 쪽을 세게 압박했다. 







'끝날 때까지 도저히 못 참겠어... 어떡하지... 이런 추한 일로 리부스크 가에 먹칠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땀을 비 오듯 흘리는 하이렌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바닥은 마치 물기가 많은 무언가를 방금 만진 손처럼 축축했다. 이제는 역으로 베라가 그녀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예전에 한 로맨스 소설책에서 보았던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힘들 때는... 야한 생각을 하면 좀 괜찮아진다고 했었지...?'



처음 접했던 당시에는 웃어넘겼던 글귀였지만, 아랫배에서 힘차게 진군 중인 가스의 군세를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이 간절한 현재의 그녀에게는, 시도해 볼 만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상상에 몰입하기 위해 눈까지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거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 같...'



쿠루루루루루루루루루르륵-



그녀의 배 속 가스의 군세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그녀의 노력을 비웃듯이 아랫배 쪽에 큰 고통을 가했다.



'...긴 개뿔이!!! 끄하으으윽... 제발 이러지 마...'



위기를 타파하려는 한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후, 하이렌은 머리를 최대한으로 굴려가며 다른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신력을 배 속의 가스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틀어막는 데 쓰고 있기 때문이었는지, 별다른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친 척하고 화장실로 튈까?'



이런 몸 상태가 정상일 때는 절대 하지 못했을 발상까지 떠오르는 가운데, 아랫배의 가스를 통제하는 벽이 점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으극... 그러기도 이미 늦었어...  무조건 비상대피 구역을 나가기도 전에 끝장날 거야...!'



두려움과 괴로움에 휩싸인 그녀에게,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운명이 눈앞으로 다가온 듯했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뿌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딕-!! 뿌오오오오오오오옹-! 부르르르르르륵-! 푸쉬이이이...



결국 그녀는 큰 대가를 지불하고 약간의 해방감을 얻게 되었다. 결코, 원했던 거래는 아니었지만.



'저질러버렸어... 소리도 정말... 천박하게 나와버렸네... 하... 아무도 없는 그런 장소에 숨어버리고 싶다...'



하이렌은 창피함이 적극 드러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이번엔 41번이 아주 시원하게 터뜨려주셨구만."



어느샌가 하이렌 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해적이 비꼬듯이 말했다.

곧 하이렌은 여기저기서 자신을 향한 시선들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너는 좀 깬다, 야. 전혀 그런 거 안 할 것 같이 생겨서는..."

'...그 더러운 입 좀 다물었으면...'



하이렌의 주먹 쥔 두 손이 가볍게 떨렸다.

여태껏 겪어보지 못했던 수치심에 젖은 하이렌을 베라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하이렌이 그랬던 것처럼.



"으, 냄새."



해적은 자신의 얼굴 앞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휘저었다. 

그런 간단한 말과 행동도 하이렌의 멘탈을 후벼 파기에는 충분했다.



'...너 따위가 나에 대해서 평가하지 말란 말이야...'



하이렌이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흡..."



이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 하이렌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긍정적인 느낌은 확실히 아니야.'



머지않아 해적에 의해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밝혀지게 되었다.



"26번. 누가 그렇게 시끄럽게 웃으랬냐? 웃을 거면 조용히 웃으라고."

"주, 주의하겠습니다."

'미네스...!'



미네스가 자신을 소리 내 비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이렌은 속이 끓어올랐다.



'...정말 행복한가 보구나? 미네스... 그래... 눈엣가시인 나를 두고두고 놀려먹을 수 있는 큰 약점 하나를 잡았으니, 행복할 만도 하겠네...'



이 모든 게 악몽이라면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해버리다니...'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걸 해적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 없다고,

정말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와 같은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는 등 하이렌은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결국 자신이 가족 외의 사람들의 수많은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서 방귀를 참지 못하고 거하게 연발로 뀌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아...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네스는 이 얘기를 반드시 남성분들한테까지 떠벌리고 다닐 텐데... 그러다가 그게 헤르츠다인님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그녀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것만은 제발... 너무 굴욕스럽겠지만... 눈 딱 감고 미네스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할까?'



하이렌이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이, 해적은 '13번'에 대한 약탈을 모두 마치고 난 뒤, '14번' 앞에 섰다.



"옆구리는 이제 좀 괜찮으신가? 14번."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14번'에 해당하는 루에즈는 해적을 쏘아보았다. 그녀가 해적에게 이렇게 날카로운 반응을 또다시 보일 줄은 예상 못했는지,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반항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노란색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진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구만. 아직도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다니... 마음에 들어. 음."

"웃기지도 않으니까... 빨리 네가 원하는 물건 챙겨서... 사라져줄래?"

"뭐, 그래도 어제처럼 막 나가지는 않는 거 보니까 교육의 효과는 확실했나 보구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도 못한 게... 읏..."



루에즈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약한 신음을 흘리며 표정을 찡그렸다. 마치 그녀에게 무언가 이상이 있음을 알리듯,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왜 그러냐? 갑자기 칼에 깊숙이 찔린 사람처럼... 어디가 좀 편찮으신가?"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네 할 일이나 해..."

"기껏 걱정해줬더니 쓸데 없는 말 하지 말라니, 너무하구만. 알겠수다. 먼저 손부터 볼까?"



해적은 루에즈의 등 뒤로 이동한 뒤, 쭈그려 앉아 한참 동안 밧줄로 결박된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 멀뚱히 앉아서 뭐하는... 거야? 어서 네가... 원하는 반...지 빼가지 않고..."

"이거 루비 반지야? 아니면 카닐리언 반지?"

"그런 건 나중에... 보석상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나 이거 보석상한테 안팔건데? 그러니까 무슨 반지인지 좀 알려줘."

"하아... 루비 반... 하윽?!"



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뿌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뿌부부부부부북-! 부오오옥-



루에즈는 아랫배 속 상당한 양의 가스를 분출했다. 그 가스의 풍압에 의해서,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지금 밝은색의 풀잎 문양들이 그려진 흰색 팬티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표정이 굳어진 그녀는 곧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뒤에 있는 사람한테 방귀를 직빵으로 넉넉하게 먹이는 건 배우신 분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닌 것 같은데?"

"..."

"갑자기 14번 나으리께서 왜 말이 없어지셨을까... 혹시 방귀를 웅장하게 내보내느라 지쳐서 이젠 말할 힘도 없는 거야? 큭큭..."

"..."

"푸하하하하! 방귀에서 어떻게 하수구 처리할 때 나는 냄새가 나냐? 이건 진짜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구만~"



해적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동안, 루에즈는 아무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바닥 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 사람 중 일부는 약간 괴로운 표정을 지었고, 또 다른 일부는 좀 적당히 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해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해적은 혓바닥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이런 고약한 냄새를 밀폐된 공간에 퍼뜨려놓고 다른 분들에게 사과 한마디 없는 게 맞는 건가? 배우신 분한테는 이게 맞는 건가? 난 배운 게 없어서 잘 모르는 걸~"

"...죄송합니다..."



루에즈는 상체를 파르르 떨었다. 커다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서 더는 반항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지독하게 괴롭히네. 불쌍한 루에즈... 안 그래도 역겨운데 뒤끝까지 있다니, 뭐 저딴 인간이 있을 수 있지?'



상황을 계속 지켜본 하이렌은 마치 흉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해적을 쳐다보다가, 자신 쪽으로까지 퍼진 루에즈의 방귀냄새를 느끼고 깜짝 놀랐다.



'헙... 냄새가 좀 심하긴 했구나...'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업보를 확실히 치르게 해주겠어.'



하이렌은 살벌한 눈빛을 하고 앉아있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두 손을 결박했던 밧줄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빈 와인병이 그녀의 오른손에 들려있었다. 곧 그녀는 재빠르게 일어나 열심히 수다를 떠는 해적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땐 진짜 죽을 뻔... 응? 이게 무슨 소..."


 

해적이 하이렌의 발소리를 인지하고 뒤를 돌아보려는 그 순간,



"에잇!"



쨍그랑-



하이렌은 해적의 머리를 와인병의 몸통 부분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와인병의 몸통 부분이 거의 다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뿌려졌다.



"느학!"



불의의 일격을 당한 해적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를 잡고 쓰려져, 오른손에 들고 있던 총을 놓쳤다. 그리고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하이렌님! 제발 목숨만은!"



하이렌은 다급하게 소리치는 해적의 오른팔을 구두로 지그시 밟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엄살떨지 마...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그녀는 깨진 와인병을 든 오른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그다음에는 그 자식의 얼굴을 와인병으로 힘껏 내려치고 나서, 배를 세게 밟아주고...'



한동안 해적을 단죄하는 상상을 하던 하이렌은, 오래 지나지 않아 현자타임이 왔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심신이 지친 그녀가 베라의 상태는 어떠한지 확인하려고 옆을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



부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바박-!! 뿌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누군가의 우렁찬 방귀 소리가 비상대피 구역 내에 울려 퍼졌다.



'또 누가 방귀를...? 그런 창피한 일을 겪는 사람은 더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하이렌을 포함한 사람들이 방귀 소리의 근원지에 대해서 궁금해하던 찰나, 해적이 하던 것을 멈추고 어딘가로 향해 여유롭게 걸으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어마어마한 방귀... 너가 뀐 거 맞지? 26번."



'26번이면... 미네스잖아?'



예상 외의 해적의 말에 놀란 하이렌은, 재빨리 미네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미네스의 얼굴은 그녀의 머리카락색처럼 벌게져 있었다.



'후후... 미네스도 나와 똑같은 실수를 했으니, 적어도 미네스가 그것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미네스도 방귀를 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이렌은 마음이 살짝 놓였다. 그녀는 미네스의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고도 일말의 동정심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기막히게 웃긴 아이디어가 하나 생각났었는데, 너의 커다란 방귀 소리 때문에 까먹어버렸잖아.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네...? 그건 어떤 식으로 책임을 져드려야..."

"아이 씨... 어우... 험한 말 나올 뻔했네. 야... 너 방귀냄새가 좀 선 넘는데? 이 정도면 방귀보단 생화학무기에 더 가깝구만."

"...죄송합니다..."



한창 해적이 재잘대며 미네스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가던 그때,



뿌부부부부부부부부부부부붑-! 부라라라라라라라라라드닥-!



미네스의 커다란 엉덩이가 또다시 가스를 거하게 방출했다. 방귀의 풍압은 짧은 시간 동안 미네스의 흰색 드레스를 펄럭여, 그녀의 빨간색 레이스 팬티를 드러내게 하였다.



"왜 내가 다가오니까 방귀를 더 뀌는 거냐? 혹시 방귀로 나를 독살하겠다는 의도야?"

"아윽... 그, 그게 아니라..."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했는지, 미네스는 안절부절못했다.



'방귀로 독살이라니... 푸흡... 이건 좀 웃겼다.'



처음으로 하이렌이 해적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부와우우우우우우웅- 푸슈우우우우우...



해적은 다시 또 한 번 방귀를 뀐 미네스에게 더 다가오지 못하고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그쯤 해라... 네 가스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충분히 알았으니까."

"..."



어느샌가 미네스는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고, 그녀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원래 있던 자리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가 있었다.



'내가 방귀를 뀌었을 때는 그렇게 비웃더니만... 진정한 추태라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구나? 푸하하하하!'



방금 일어났던 모든 일을 구경한 하이렌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베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해적의 약탈이 메인인지 노가리 까기가 메인인지 모를 작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하이렌은 매서운 표정을 하고서 무릎 꿇고 앉아있었다. 그녀의 그 표정이 또다시 아랫배에 차오른 가스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느라 나온 표정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가스를 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늘따라 배가 정말 이상하네...'



방귀를 참는 것을 더 수월하게 하고자, 하이렌은 자신의 두 다리를 엉덩이에 밀착시켜 압박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8번'에 해당하는 제노시아는 창백한 안색을 한 채로 무언가 위태로움이 느껴지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지않아 제노시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아으으..."



뿌아앙-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웃-!! 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붓오오오오오오옥-! 부피이이이잇-! 뽀오옹- 뿌북- 부붓-



크고 작은 방귀를 여러 번 뀌었다. 그녀의 분홍색 드레스는 방귀에 나부껴 그녀가 입은 하얀색 리본이 달린 하늘색 팬티를 외부에 노출했다. 방귀를 뀌는 동안 제노시아는 손으로 엉덩이를 막아 소리라도 줄여보려고 손을 열심히 움직였지만, 두 손이 밧줄로 결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어떡해..."



방귀가 멎은 그녀는 곧 울상이 되었다. 남들에게 보여선 안 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려 왔다.

이런 툭 건들면 터지는 폭탄 같은 위태위태한 상태의 제노시아를 건드려버린 것은 역시나 해적이었다.



"지금 방귀를 뀐 범인은... 8번이로군."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는 형사흉내를 내고 싶어진 해적은, 시선을 제노시아 쪽으로 돌린 상태에서, 자신이 형사 같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를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죄송해요... 흐흑... 참으려고 했는데... 흑... 배에 가스가... 훌쩍... 너무 많이 차서... 흐극..."



해적이 건드리자마자 제노시아는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방귀의 냄새가 시큼한 것을 고려할 때 아마도 먹은 음식은... 잠깐, 너 우냐?"

"흐으윽... 저도 정말... 훌쩍... 이러고 싶지... 흑... 않았는데..."



해적은 눈물을 쏟아내는 제노시아를 보고 약간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뭐 이런 걸 가지고 질질 짜고 그러냐? 애라면 모를까... 너 성인 아니야? 에휴... 이렇게 푸딩 같은 멘탈로 험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흑... 죄송해요... 흐윽..."

"...야... 내가 가져간 니 물건 돌려줄 테니까 그만 좀 울어라."

"흐극... 네? 정말... 끅... 요?... 훌쩍..."

"잠깐 기다려 봐."



정말로 보따리에서 제노시아에게서 약탈한 물건을 꺼내 그녀에게 다시 돌려주는 해적을, 하이렌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저 자식... 왜 제노시아한테는 특별하게 구는 건데?'







뿌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부라라라라라라라락-!



"시... 실례했습니다..."



부보오오오오오오오오오옥-! 뿌우우우우우우우우바박-! 푸르르르르르르륵- 부스으으으으...



"미안해요..."



제노시아가 방귀를 뀐 이후로도, 비상대피 구역 내 여성이 방귀를 뀌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렇게 비상대피 구역 내 모든 여성이 방귀를 한 번 이상은 뀌었을 무렵,



"이 아가씨들이 진짜..."



끼이이익-



해적은 신경질을 내며 문을 열었다.



"너희는 에티켓을 좀 지켜라. 공공장소에서 방귀 뿡뿡 뀌어대는 것 좀 그만해달란 말이지. 냄새라도 안 나면 뭐라 안 하겠는데..."



'해적질이나 하는 주제에 지금 에티켓을 들먹이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여기 공공장소 아니거든!'



태클 걸 구석이 많은 해적의 말에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하이렌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꾸루루르르르륵-



순간. 그녀의 뱃속에서 꽤 거대한 가스의 존재감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느으으윽... 또 배가... 두 번은 절대로 안 된단 말이야... '



하이렌은 경험상 이런 상황에서 효과가 있었던 방법을 총동원하여, 아랫배에 자리 잡은 불길한 존재를 잠재우려 애를 썼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녀를 괴롭히던 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가라앉았다.



'후우... 가스가 왜 이리 많이 차는 거야... 이러다가 한 번 더 뀌어버리는 건... 아, 그러고 보니 나 말고도 여기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방귀를 좀 크게 뀐 것 같은데, 혹시 다들 나랑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걸까? 그게 맞다면 이 여객선의 식당의 음식이 전체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 음... 그렇지만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이렌의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던 그때,



뽀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옷-!! 부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욱-!! 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뿌우우웅-



매우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고 추잡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왼쪽에서 들렸어. 그렇다면 이건...'



소리가 났던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의 예상대로 베라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베라가 지금 얼마나 부끄러울지 알 것 같아...'



팔짱을 끼고 있던 해적이 굉음 뒤의 찾아온 정적을 깨며 말했다.



"야, 40번. 너 또 방귀 뀌었지."

"...죄송해요..."

"죄송하면 니가 내보낸 악취가 사라지냐고~ 그러지 말라고 한지 얼마나 지났다고."

"..."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이 왜들 그러실까? 이해를 못 하겠구만."



해적은 팔짱을 풀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하이렌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불만이면 빨리 일 끝내고 떠나던가! 난 너 같은 쓰레기랑 같은 곳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도 끔찍하게 싫어!'



한창 하이렌이 속으로 해적에게 열불을 내고 있을 무렵,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저 자식은 어떻게 항상 방귀를 뀐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내는 거지? 방귀의 소리만 듣고 그러기는 어렵지 않나...'



하이렌이 갑자기 떠오른 해적에 대한 의문점에 관하여 생각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꾸르륵- 꾸루루루루루륵-



'진정된 줄 알았는데... 윽... 괴로워...'



갑작스럽게 아랫배의 가스가 만들어낸 통증을 느낀 하이렌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그녀의 고통스럽고 외로운 싸움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해적이 '27번' 앞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긴 썰을 풀고 있을 때 즈음, 하이렌은 겉으로 보기에도 많이 위험해 보이는 상태에 놓여있었다.



'왜...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그녀의 뱃속의 가득 찬 가스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깥세상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의지는 가스를 내보내는 행위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지만, 냉혹하게도 세상엔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존재했다.



쿠르르루루루르르르르르르루르루륵-



'정말 수치스러웠는데... 그걸 한 번 더 겪으란 말이야? 그런 건 절대 용납 못 해... 용납... 할 수 없어...'



뚝-



사색이 된 하이렌의 땀 한 방울이 턱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독기가 가득한 그녀의 눈은 마치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내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녀의 눈이,



쿠르루르르루루루루루루르르루루르르릉-



'헤윽...?!?!!'



순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곧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뭔가 잘못된 거 아냐...?! 배가 정말 너무 아프ㄷ...'



하이렌의 아랫배에 전해진 평생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당황하던 찰나, 단단하게 조였던 긴장의 끈이 살짝 풀렸다.



뿌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옥-!!! 부욱-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웃-!! 뿌드드드드드드득- 뽀뿌우웅- 푸시익...



결국 다시 한 번 그녀는 자신의 아담한 엉덩이 주변에 소화 과정에서 발생한 지독한 기체 노폐물을 흩뿌리게 되었다.



'...또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싫어... 정말...'

"하아아아..."



어느새 해적은 썰 풀기에 열중하던 것을 멈추고,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된 하이렌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방금 방귀 요란하게 뀌신 41번 아가씨. 진짜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민폐 끼치는 거 잘하시네요."

"...죄송합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거지를 더럽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더... 더럽...다고 한 거야 지금...? 나한테...?'



해적의 예상을 뛰어넘는 모욕적인 언사에 제대로 긁힌 하이렌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그녀가 사나운 표정을 하고서 해적에게 덤벼들려고 오른쪽 무릎을 세운 그 순간, 해적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복면에 그려진 인간의 두개골 그림의 눈 부위에 뚫려있는 구멍, 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로 입지 않을 것 같은 디자인의 바디슈트, 윗부분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왠지 포근해 보이는 인상의 신발, 거만함이 느껴지는 허리춤에 올린 왼손... 그리고 오른손에 들려있는 총.



'...보자기로 보이겠지... 그래. 진정하자...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자... 상대는 총을 가지고 있으니까...'



잠시 잊고 있었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자각하고, 순식간에 침착해진 하이렌은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좀 무서운 표정을 지으셨던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전 그런 적 없는데요..."

"뭐... 41번 아가씨가 배출하신 방귀의 독한 냄새 덕분에, 제가 잠시 정신이 혼미해져서 헛것을 봤을 수도 있겠네요~"

'이게 정말...!'



자신에게 망신을 주는 해적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방귀냄새에 대해 지적을 당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하이렌의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꾸르루루르뤼릭-



'윽...?!'



또 다시 아랫배에 들이닥친 통증에,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분명 방금 가스를 내보냈는데... 어째서 바로 배가 아파오는 거야...? 나 정말 몸 어딘가가 잘못된 거야?'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는 하이렌은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탁- 탁- 탁- 탁-



"이게 진짜 웃긴 게... 지금 어디 가냐? 14번."



한창 아재 개그를 설명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있던 해적이,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루에즈를 불러 세웠다. 뒤이어 해적 쪽으로 시선을 돌린 루에즈의 오른쪽 가슴에 붙은 번호표의 바탕색은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



"여길 나갈 거야. 번호표가 검은색으로 변한 사람은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다고, 분명 네가 말했었지?"

"그런 말 안 했는데? 번호표가 검은색으로 변하지 않은 사람은 못 나간다고 한 거지, 그게 아닌 사람은 나가도 된다고 말 한 적은 없다는 게 정확한 사실이지."

"말장난 한 번 구질구질하네... 그래서? 내가 여기서 못 나가게 막을 거야?"

"일단 왜 나가려고 하는지 먼저 말을 해봐. 그 대답에 따라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될 테니까."



루에즈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말을 꺼냈다.



"갑판에서 바람 좀 쐬려고. 여기에만 계속 있으니까 답답해서... "

"그런 별것도 아닌 이유로? 너를 여기서 내보내 줘야 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겠구만."



그녀는 자신이 이 방을 나가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는 해적을 쏘아보고는, 또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객실에 가려고 해. 내가 평소에 먹는 약이 있는데, 그걸 내가 묵는 객실에다 두고 왔거든."

"호오... 약을 가져오시겠다? 근데 너 손이 묶여있는데 약은 어떻게 먹으려고? 발로 먹으려고? 아니면 나한테 먹여달라고 부탁이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 생각해보니까... 손이 묶인 상태로 약을 가져오는 것부터가 문제구만."

"그... 그건..."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화장실에 갈 일이 있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루에즈의 얼굴에는 붉은빛이 돌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해적이 점점 다가왔다.



"화장실? 혹시... 가스 빼러 가는 거냐?"

"아니거든!!!"



화를 내며 해적을 매섭게 노려보는 그녀였지만, 어느새 얼굴은 상당히 빨개져 있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러셔. 야, 잠깐 가만히 있어봐."

"뭐... 뭘 하려는 건데?"



해적은 루에즈의 등 뒤로 이동한 뒤에, 그녀의 두 손을 묶은 밧줄을 순식간에 풀었다.



"...왜 갑자기 이걸 풀어준 거야?"

"빨리 갔다 오라고. 맨발로 문을 열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지 않겠냐?"



해적은 적잖이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이는 루에즈를 마주하며, 왼손을 벽에 기댔다. 그리고는 오른쪽 발바닥을 왼쪽 무릎 관절 옆에 붙여 외다리로 섰다.   



"딱 화장실만 가고 바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안 보고 있다고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재미없을 줄 알라고."



루에즈는 총을 흔들어대는 해적을 잠시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말없이 문밖으로 나섰다.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푸르륵- 뿌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릭-!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속이 많이 안 좋아서..."



뿌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디딕-!! 뿌보보보보보보보보보보보보보봇-! 부우욱- 뿡-



"...큰 결례를 범한 점 사과드립니다..."



부드드드드드드바박-!! 뿌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락-!! 뿌르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아!! 참아도 나오는 걸 저보고 뭘 어쩌라구요!"







"더는 안되겠구만."



계속해서, 또 곳곳에서 발생하는 민망한 생리현상들을 지켜본 끝에, 해적은 원형으로 둘러선 사람들의 정 가운데에 섰다.



"너희 잘 들어. 지금부터 방귀를 뀌는 사람에겐 Punishment♡... 아니, 벌칙이 있을 거야.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지? 이젠 도저히! 못 참겠어. 적당히를 몰라요. 적당히를..."



'아윽... 저 자식... 갑자기 뭔 벌칙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가뜩이나 뱃속 가스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정말... 하아아...'



하이렌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 해적에게 짜증을 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붙은 번호표를 슬쩍 쳐다보았다.



'역시 달라진 건 없구나... 이건 대체 뭘 해야 검은색으로 변하는 거야...'



아랫배에 가득 찬 가스를 내보내지 않은 대가가 툭하면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상태의 그녀를 또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윗부분이 땀에 젖은 하이렌의 검은색 드레스는 그녀의 모습을 더욱 애처롭게 보이게 했다. 사실 하이렌 옆에 자리한 베라도 그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태였으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고통을 인내하기에도 벅차 서로의 상태를 살필 여유가 없는 상황에 부닥쳤기에,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쿠르르루루리리리루루르르루르륵-

퀴르르르루루루루루루루루루루르릉-



'흐으그극... 이제 그만 좀 날 내버려 둬... 3번씩이나 그런 일을 겪게 하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하이렌은 고역스러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상체를 앞뒤로 흔들어댔다. 그 과정에서 덜덜 떨리는 두 손도 자연스럽게 비벼지며 땀의 물기가 느껴졌다.

한편 괴로워하며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베라는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는, 



뿌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웃-!! 뿌우우우우우우우우웅-! 뿌리리리리리릭-! 부보보복- 피시익...



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생명 활동의 필연적인 기체 결과물을 주변 공기에 섞어 넣었다. 



"40번... 너 또 또 방귀 뀐 거야? 지금?"

"죄, 죄송해요..."

"이거 이거... 완전 방귀쟁이가 따로 없구만. 소도 그 정도까지는 못 뀌겠어. 그리고 아까부터 느꼈던 거지만, 냄새도 참... 에휴... 말을 말자."

"..." 



해적의 인신공격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고개를 숙인 자세를 유지 중인 베라의 얼굴은, 어느샌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야, 40번. 내가 방금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지? 방귀를 뀐 사람에게는 벌칙을 주겠다고 한 거."

"...네..."

"그 벌칙을 수행해야겠다, 넌. 너 진짜 이름이 뭐야?"

"40번이요..."

"내가 붙여준 번호 이름 말고... 진짜 이름이 뭐냐고. 풀네임으로 말해라?"

"베라 데칸젤리르요..."

"베라 데칸젤리르라... 알겠어. 너 혹시 '엉덩이로 이름 쓰기'가 뭔 줄 아냐?"

"네? ...아, 아니요..."



그녀는 해적의 입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엉덩이'란 단어에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귀한 집 자제분들은 이런 거 잘 모르나 보구만. 내가 가르쳐줄 테니까 나를 잘 봐. 만약 내 이름을 '개새끼'라고 가정하면 말이지?"



해적은 뒤돌아선 후에, 엉덩이를 뒤로 쭉 뻗고는, 뻗은 엉덩이를 그대로 실룩샐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해적의 망측한 몸놀림을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해적은 계속 엉덩이를 크게 움직여, 기어이 '개새끼'라는 단어를 엉덩이로 쓰는 것에 성공했다. 



"이런 식으로 엉덩이를 '개새끼'라고 글씨를 쓰듯 움직이는 게 '엉덩이로 이름 쓰기'야. 이제 뭔지 대충 알겠지?"

"뭐... 뭔지는 알겠는데요... 설마 그걸 저보고 하라는..."

"어, 맞아맞아. 이게 너에게 주어진 벌칙이야."

"그런 걸 대체 어떻게 하냐구요!!"



베라가 그런 우스꽝스러운 행동 따위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해적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음. 그래서 못하시겠다?"

"죄송하지만... 그건 도저히 못 하겠어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선택할 기회를 줄게. 할 거야, 안 할 거야?"

"마... 마지막... 이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거야. 선택을 잘 못 했다간 평생 후회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

"할 거야, 안 할 거야?"



해적이 얼굴을 베라에게 들이대자, 그녀는 겁에 질린 듯이 바르르 떨었다. 그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복면을 쓰고 있었기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녀의 공포심을 더 자극했다.



"하, 할게요..."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해."



베라는 여전히 두려운 표정을 지은 채, 덜덜 떨면서 해적을 등지고 선 뒤에,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뺐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소심하게 씰룩이기 시작했다.



"야, 글씨가 너무 작잖아. 좀 더 크게 써라."



베라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너무 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해적의 지적에 대응해 좀 더 엉덩이를 크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이렌은, 베라의 부끄러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느낌에, 차마 더 이상 베라를 보질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두 눈을 감았다.



"이제야 좀 괜찮게 쓰네. 이쪽에 꽤 재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해적의 칭찬 아닌 칭찬을 들으며, 베라가 엉덩이로 글자 '리'를 쓰는 것이 거의 끝나가던 찰나,



뿌우우웅-



베라의 엉덩이에서 작은 실수가 터져 나와 그녀의 드레스를 팔랑였다. 그리고 곧 움직임을 멈춘 베라는, 원래도 높았던 자신의 얼굴 온도가 더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엉덩이로 이름을 쓰라고 했지 방귀를 뀌라는 말은 안 했는데."



해적의 비웃음 섞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다시 엉덩이를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 안에 세찬 감정의 폭풍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이제 됐나요..."



엉덩이로 이름 쓰기를 끝마친 베라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해적에게 물었다.



"어. 벌칙 끝났어."



해적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바로 하이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치심에 울먹이는 베라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하이렌은 그런 베라의 모습을 보자마자 측은함을 느끼면서도, 경험상 곧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울려고 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이 물리적인 외부 자극을 약하게라도 받았다간, 바로 아랫배 속 가스를 분출해버릴 매우 위험한 상태임을 알고 있었기에, 베라가 다가오는 것을 제지해야만 했다.



"자, 잠깐! 베라..."



하이렌은 베라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다급하게 외쳤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라는 그녀의 예상보다도 빠른 속도로 다가와 그녀의 품에 가벼운 충격을 가했다.



'아...?'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욱-!!! 뿌라라라라라라라라라바박-!!!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뽀옹- 뿌부부부부부부부부부부부부부부부붑-! 부부붓- 부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프스스스스스스스스스...



마치 구멍이 난 풍선에서 새는 기체처럼, 하이렌이 뱃속에서 품고 있던 무시 못할 양의 가스가 막을 새도 없이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이에 베라는 깜짝 놀랐는지, 하이렌의 품에서 얼굴을 떼어낸 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하이렌을 바라보았다.



'으으... 이런 상황에서 왜 자꾸 이런 지저분한 짓을 하게 되는 거야?! 최악이야...'



어느새 해적은 시선을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하이렌 쪽으로 둔 채, 왼손을 옆구리에 올리고 있었다.



"방귀 소리가 굉장히 우렁차구만. 41번 너도 벌칙 받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다?"

"죄송합니다..."

"흐으~ 니 방귀는 지독한 것도 모자라 냄새도 잘 안 빠진다는 게 좀 대단하단 말이지."



해적은 왼팔로 자신의 정면을 휘저으며 바람을 일으켰다. 분노와 창피함이 동시에 몰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은 하이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베라는 그제야 자신의 행동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알아챘는지, 하이렌을 향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이런 짐승만도 못한 자식한테 저런 말이나 듣고 있다니... 내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벌칙은 뭐로 하는 게 좋을까... 흐음... 고민 좀 해봐야겠구만."



해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총 모양으로 만든 왼손을 들어 올린 채 말했다.



"그게 좋겠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10번 반복하는데, 하는 동안 앉을 때는 '나는!'을 외치고, 일어설 때는 '방귀쟁이다!'를 외치는 거지. 이 정도면 할 만하다. 음."

'뭐가 할 만한데!!'

"자, 이제 일어서서 시작하면 된다."

'어쩌지... 그런 건 절대 못하겠는데...'



하이렌이 한참을 앉아서 머뭇거리자, 해적은 고개를 까딱였다.



"왜 빨리 시작 안 하고 가만히 있어? 하기 싫냐?"

'그럼 하고 싶겠냐?'

"니가 하기 싫다면야. 40번한테 대신시키면 되지 뭐. 할 수 있지? 40번."

"네...? 저요?!?!"



갑작스런 벌칙 타겟 변경에 매우 당황했는지, 베라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해적의 뜻밖의 말의 당황한 것은 하이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미 한 차례 벌칙으로 곤욕을 치른 베라가 또 벌칙을 받게 하는 건 인간적으로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대로 또 베라가 벌칙을 받게 되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벌칙을 떠넘긴 게 되어 평판이 나락을 가게 된다는 문제도 있었다.



'하아... 정말 끔찍하게 싫지만... 어쩔 수 없네...'



하이렌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일어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제야 할 맘이 들었나 보구만. 시작해."

 


그녀는 해적에게 휘둘리는 느낌이 들어 매우 불쾌했지만, 결국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빨리 끝내자...'



하이렌은 쪼그려 앉으며 외쳤다.



"나는!..."



-



"나는!... 방귀쟁이다!..."



하이렌은 휘몰아치는 부끄러움을 견뎌가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9회까지 마쳤다. 단 1회만 더 하면 이 수치스러운 벌칙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작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 끝이라는 생각에 긴장이 살짝 풀렸기 때문이었을까.



"방귀쟁이다!..."



뽀오오오오옹-



'흐익?!'



불명예스러운 벌칙에 종지부를 찍는 그 순간, 그녀는 의도치 않게 또다시 아랫배 속 가스를 분출하게 되었다. 이런 짓궃은 운명의 장난에 휘말린 그녀는 창피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까 전에 그렇게 많이 뀌어버렸는데... 아직도 남아있던 가스가 있었던 거야? 하아... 정말... 다들 보고 있었을 텐데...'



곧이어 해적이 비웃듯이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마무리까지 완벽하구만~ 큭큭..."



잠시 후, 볼 일 다 봤다는 듯이 해적이 하이렌에게서 눈길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위이이이이이이이웅-



무언가 진동하는 소리가 비상대피 구역 내에서 울려 퍼졌다. 이윽고 해적은 자신이 입은 바디슈트의 왼쪽 허벅지 쪽에 달린 주머니를 뒤져, 붉은빛을 발하는 정체불명의 회색 기계를 꺼내보았다.



"에헤이~ 아직 재미 덜 봤는데..."



꺼낸 기계를 다시 집어넣은 해적은, 총총걸음으로 사람들에게서 약탈한 물건들이 들어있는 보따리에 접근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냈구만. 평소답지 않게..."



끼이이이익-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보따리를 들쳐 멘 해적이 문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기까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 씨발ㄴ... 아니, 해적이 갑자기 어딜 간 걸까요? 아직 일이 다 안 끝난 것 같은데..."

"뭔가 좀... 도망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나요? 원래 해적은 좀 느릿느릿하게 걸었던 것 같은데, 방금은 그렇게 걷지 않았어요."

"맞아요. 걷는 게 좀 달랐어요."

"도망을 쳤다구요?"

"해적이 무언가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냈다고 말하던데,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음... 혹시 누군가 이 여객선을 찾아냈다는 뜻인가?"



해적이 떠난 후 찾아온 웅성거림 속에서 하이렌은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곧 하이렌은 조용히 일어선 뒤, 닫힌 문쪽으로 다가가, 문과 가까운 벽에다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했다. 



'역시... 문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해.'



문 밖에서 나는 소리를 더 명확히 듣게 되어,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된 그녀는 대화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여러분! 조용히 해주세요! 지금 문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네?!"

"무, 무슨..."

"뭐라구요?"



침묵이 찾아오자 하이렌 외의 다른 사람들도 하이렌이 들었던 문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타타탁타탁타타탁타타타탁타탁-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섞인 소리였다. 모든 발소리는 예전 해적의 발소리 같은 여유가 느껴지는 발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다급함이 느껴지는 발소리였다.



타탁타탁타탁탁타탁타탁탁타탁타탁-



그리고, 그 여러 발소리 중 하나는 명확하게 비상대피 구역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사람의 발소리가 문 앞에 도달한 순간,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익-



열린 문 사이로 재빠르게 들어온 것은 동색 철모와 칙칙한 파란색 해군 군복을 착용한 채, 두 손으로 총기를 들고 있는 해군 남성 병사였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서서쏴 자세를 취한 채, 숨죽이며 비상 대피구역 내부를 신속하게 둘러보았다. 이는 혹시 내부에 해적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취한 행동인 듯했다.



"다들 괜찮으십니... 어웁...! 어후... 대체 이게 뭔 씹구린 냄새... 욱...!"



내부에 해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해군 병사는 총을 거두고, 사람들의 상태를 묻던 중, 비상 대피구역 내에 퍼져있던 고약한 냄새를 맡고 소스라치게 기겁했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악독한 해적들이 악취를 일으켜 귀공들께 고문이라도 가한 것입니까?"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하이렌에게 격양된 어조로 물었다.  

자신에게 충격을 안겨준 악취의 원인이 자신 앞에 있는 고귀한 귀족 아가씨들이 뀐 방귀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 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이렌은 냄새의 진실을 숨기며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