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재단의 형이초학 설정은 좋아한다.

메타픽션은 많지만 재단처럼 위와 아래 양쪽으로 뻗어나가는 내용은 잘 없는 것 같음.


특히 우리 세계에도 위와 아래가 있고, 재단 쪽 세계에도 위와 아래가 있으니 여러모로 공감하기도 좋은 편이다.


그런데 챈에서 이 글을 보고 든 생각이 있음.

(https://arca.live/b/scpfoundation/32806601)

간단히 요약하자면 형이초학부 하위서사 전담 요원으로 배우들을 뽑는다는 내용.


저기 글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배우들은 하위서사에 자기 일부를 담그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 중첩은 최소한 연기 도중엔 하위서사 쪽에 훨씬 가까울 거임.


그렇다고 그들이 아예 하위서사로 내려가는 존재들인가?

그건 또 아니겠지. 배우는 도중에 스스로 연기를 멈출 수 있으니까.


대충 물에 푹 잠겨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느낌이 아닐까 생각함.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연기 중의 배우는 거의 하위서사에 가까운 존재라는 점.

배우와 캐릭터가 중첩된 상태이고, 그 중에서도 캐릭터의 성향이 강한 상태라는 거지.


제대로 된 용어는 아니지만, 일단 편의상 적당히 중첩이라고 부르겠음.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의문.

과연 중첩 상태에서 각본을 무시하고 등장하는 애드리브는 과연 배우의 것일까?


어쩌면 각본에 대한 하위서사의 저항이 중첩을 통로로 삼아 충동의 형태로 발현되는 건 아닐까?

특히 배역에 아주 몰입하여 등장하는 애드리브는 더욱 배우 본인의 것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조금 전에 말한 비유를 쓰자면, 물 밖으로 얼굴만 내밀고 있었는데 파도가 치는 바람에 아주 짧은 순간 잠겨버린 느낌.

이따금 어떤 배우는 열의가 넘친 나머지 숨을 참고 스스로 잠수를 해버릴지도 모름.


그러나 실제로도 그렇지만 모든 애드리브가 영화에 실리는 건 아니지.

그게 각본이나 상황, 분위기를 너무 벗어난 것이라면 작가 내지는 감독에 의해 잘려나갈 거임.


나름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어느 정도의 기준을 넘은 하위서사의 반항은 상위서사에 의해 제압당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이 '기준'이라는 건 경우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선에 걸쳐있는 게 바로 연극, 더 정확하게는 관객이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작품이다.

그러니 뮤지컬이나 오페라 같은 것도 여기에 포함됨.


이러한 작품들은 NG의 선이 아주 먼 곳에 위치해있다.

영화는 대사를 더듬으면 끊고 재촬영이 가능하지만 연극은 그게 불가능하지.


심지어는 각본과 정반대의 대사를 해버려도 어지간해선 극을 중단하지 않고, 다른 배우가 커버를 쳐준 다음 그대로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다.


제지해줄 감독이 없으니 당연히 애드리브─하위서사의 폭주도 대부분 허용되고.


즉, 하위서사가 상위서사에 개입하고자 한다면 여기가 제일 약한 부분인 게 아닐까?


실제로 '제4의 벽'이라는 게 연극 용어이긴 하지만, 이게 제일 박살난 곳도 연극이다.

오히려 제4의 벽 개념을 가장 오래 사용해온 친구들이라 이젠 정말로 온갖 짓거리가 벌어지고 있음.


어린이 연극 중에 이런 내용을 본 사람이 많을 거임.

악당이 '너희들 절대 내가 숨은 곳 말하면 안 돼'라고 한 다음 나무 뒤에 숨고, 뒤늦게 쫓아온 히어로가 어린이들에게 질문하고 악당의 위치를 찾아내는 그런 식의 내용.

즉, 연극에서는 상위서사에게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


심지어 하위서사가 연극 바깥에서 상위서사에게 협조를 받는 경우도 있음.

살인사건을 다룬 '쉬어매드니스'라는 연극에는 극을 진행하다가 휴식시간, 그러니까 인터미션이 있음.


그리고 이때 형사는 관객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며 수사에 대한 협조를 받는다.

하지만 일단 형식상 인터미션으로 되어 있는 이 시간은 명백히 '연극 중이 아닌 시간'임.


이 정도까지 오면 배우뿐만이 아니라 극장 공간 전체가 서사의 중첩 상태나 다름없음.


더 심한 것도 있다.

'관객모독'이라는 연극에서는 아예 배우가 관객을 공격하기까지 함.

물론 실제로 폭력을 쓰는 건 아니고 물을 뿌리는 거지만, 그래도 공격은 공격이지.


연극에서의 제4의 벽 돌파는 이 정도 수준까지 와있음.

아예 하위서사의 캐릭터가 배우를 집어삼킨 다음, '저는 각본에 따르는 캐릭터가 아니라 이 서사층에서 제 삶을 살 겁니다' 하면서 무대를 뛰쳐나가도 될 정도.


관객은 스토리가 개막장에다 망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럼에도 일단 그러한 연극인가보다 하고 납득은 할 거임.


물론 진짜 그런 행동을 했다간 상위서사의 재단이나 연합 포지션인 놈들에게 끌려가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연극을 통해서라면 작가나 감독 선이 아니라, 재단 급이 직접 나서야 될 정도의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소리임.

폭주의 주체가 고작 하위서사의 캐릭터 나부랭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했지만 실제로 중첩에 의한 하위서사 역류는 아주 가까이 있음.

예를 들어 예전에 히스 레저가 조커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적도 있지.


물론 히스 레저 건은 루머로 밝혀지긴 했지만, 따져보면 실제로 이러한 사례가 있긴 할 거임.

그렇다면 이건 하위서사의 존재가 상위서사의 존재를 살해했다는 식으로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재단이든 누구든 간에 상위서사를 엿먹일 계획을 짠다면 연극을 통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음.

SCP-701 같은 사례를 보면 몇 단계 정도 아래의 하위서사에서 이미 뭔가 사고를 친 상태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