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이 좋은 뜻은 아닙니다.


아직 근대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서구 열강이 깨워줘야 할 시간은 되었는데 아직 깨우지 않은 나라 라는 뜻이죠.







19세기 말이 되면 전 지구상에 열강의 함대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죠.


조선이 섬처럼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주변 세계의 변화를 모르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18세기부터 중국과 서양의 배들이 서해안에 곧잘 나타나는데요


조선의 어부나 선원들이 공해상에서 그들과 여러번 조우하고 교류도 했습니다.



어부들은 철로 된 증기선과 대포를 보고 


'세상에 저런 배 한 척이면 조선 수군 전체를 전멸시킬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또 이런 말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 소문이 꽤 많이 퍼졌습니다.



다만 이들의 이야기가 글로 기록되지 않았던 거죠.






카톨릭 신부들도 국내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양인들이 조선을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의아해하시는 분도 많은데






상복으로 위장을 했다고 합니다.


부모를 잃은 사람은 죄인이라고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하는 풍속이 있어서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한복을 입으면 


오우 감쪽같았다고 합니다.



신부들은 유교에서 만든 이 상례가 선교를 위해 만든 제도였다고 입을 모아 감사했다고 합니다.


아 그렇다고 꼭 그것때문만은 아니고, 여러 기록을 검토해보면 


신자가 아니라고 해도 의외로 이들을 보호해주거나 모르는 척 해주는 사람들도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안전할 수는 없죠.


1866년에 벌어진 병인박해는 역대 박해 중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프랑스 신부들은 신도를 보호하기 위해 체포되어 순교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세 명의 젊은 신부는 순교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탈출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보고로 프랑스 함대가 조선으로 출동하게 됩니다.





명분은 박해지만, 이들은 이미 조선에 대해 알고 있었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사실 이때만 해도 프랑스고 미국이고 아시아 태평양 함대란 이름 뿐이고, 병력이 너무 적어서 망설였던 건데


박해 소식이 들려오니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프랑스군은 먼저 정찰선으로 군함 세 척을 파견합니다.


1866년 8월 19일, 아 이 날짜는 모두 음력입니다.


한 척이 고장으로 빠지고 두척의 군함이 영종도와 강화도를 지나 한강으로 진입합니다.





프랑스 전함은 양화진까지 진입했는데요


서울은 발칵 뒤집어졌죠. 즉시 보병 700명과 기병 200명을 파견합니다.



병력이 너무 적어서 의아해하실 텐데, 당시 조선의 군비가 엉망인 탓도 있고


아직은 전투보다는 대화를 하자고 해서 적을 자극하지 못하게 했던 탓도 있습니다.



아무튼 덕분에 프랑스군은 조선군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프랑스군에게 엉뚱한 오판을 일으키는데


'아 조선의 서울에는 군대가 없다시피 하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로 이 날 상륙했으면 서울을 점거할 수도 있었다 라는 생각도 하게 했다고 합니다.



9월 6일 프랑스 침공 함대가 산둥 반도를 떠납니다. 


일본에 주둔하던 병력까지 긁어모았지만 병력은 1천명 정도였고 군함은 모두 7척이었습니다.


이 함대는 영종도에서 조선이 배치한 경계병에게 포착되었고, 이어 여기저기서 관측됩니다.


지난번 정찰 함대의 출현으로 침공을 예상했던 조선은 비상령을 발동하죠.






조선은 프랑스 함대의 목표가 서울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한강의 수심이 너무 낮고, 아마도 자신들의 병력이 적다는 것도 감안했는지


목표를 서울이 아닌 강화도로 설정했습니다.


기습적으로 강화도를 점령하고 조선과 협상을 한다는 구상이었죠.



9월 7일, 지금의 강화대교가 있는 갑곶에 기습적으로 상륙한 프랑스군은


갑곶을 점령하고 이어 강화읍성을 공격해 8일에 함락시킵니다.



강화읍 점령 후 로즈 제독은 이런 포고령을 내립니다.


강화와 주변 해역을 통행금지구역으로 선포한다.


이 해역에서 눈에 띄는 함선은 무조건 나포하고


군대에게는 발포한다.





적이 과하게 세게 나올 때에는 분노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무슨 약점이 있나 살펴야 합니다.


프랑스군 병력은 1천에 불과해서 강화를 수비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조선군이 3만명을 동원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그들은 벌벌 떨기 시작합니다.



프랑스군의 전술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이용해 조선 육군의 도하를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함대를 3분할해서 


갑곶, 한강 하구로부터 강화도 북쪽과 황해도 사이로 이어지는 해협, 강화 손돌목을 방어하게 합니다.






주기적으로 위협사격을 하고 조선군 병사가 보이기만 하면 포격을 했습니다.


조선군이 노 젓는 목선으로 철선과 근대식 대포로 방어하는 해협을 통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죠.


철선에 포착되면 조선군은 전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빤히 보이는 건너편이지만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안하기는 프랑스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조선이 협상할 기미는 보이지 않자 불안과 초조함으로 위력정찰, 선제적 방어 수준의 공격작전을 기획합니다.





첫번째 목표는 갑곶을 내려다보는 요새, 문수산성이었습니다.


세 척의 보트에 나눠 탄 프랑스군이 갑곶을 건너 문수산성 앞으로 상륙을 시도합니다.


조선군이 발포를 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죠.





이때 총은 엄청난 연기를 내뿜어서 몇발 사격하면 연막탄을 친 것처럼 총연으로 덮입니다.


조선군의 화기는 조총이었고, 프랑스군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후장식 소총은 보급되지 않았거나 아주 적었고 


대개는 미니에 탄을 쓰는 전장식 강선총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연막에 가까운 총연으로 조선군은 사상자 수를 오판하는데요





프랑스 군 5~60명이 사상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조선군은 전사 3명, 부상 2명이었죠.


프랑스군의 실제 사상자는 전사 2명, 부상 1명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선제공격까지 받게 된 조선군은 전전긍긍합니다.


조선군은 병력이 3만은 고사하고 1만명이 되지 않았고


제대로 훈련된 병사는 그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이때 양헌수는 강화읍을 직접 공격해 탈환하는 대신 


경계가 약한 강화 남쪽으로 진입해 요새에 주둔함으로써 프랑스군을 압박하는 전술을 구상합니다.


리델 하트가 말한 전형적인 간접 접근 방식이죠.


양헌수가 선정한 지역은 전등사에 위치한 정족산성이었습니다.



강화읍과는 꽤 멀리 떨어져있어서 이곳에 소수 병력을 진입시킨다고 해도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은 사연이 있는데요


당시 조선군의 전력으로 강화읍을 공격하기란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양헌수는 프랑스군의 허세를 통해 


이들이 조선군의 진입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던 것 같습니다.





간접 압박의 전형적인 방법이 적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키지 않더라도 전술적 실패를 예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전투를 포기하게 되죠.


말은 쉬운데, 이게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족산성으로 진입했을 때 최선의 경우는 프랑스군이 포기하는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양헌수 부대가 강화에 고립되어 식량과 탄약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군의 지원 함대가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도 탄약과 연료가 떨어져가고 있었지만 조선군이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고


중국에 더 많은 프랑스 함대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죠.





전장이란 불확실성이라는 안개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래서 전술적 결단은 항상 정확한 판단 뿐만이 아니라 대담함을 요구합니다.


양헌수는 겨우 500명의 포수 군대를 이끌고 모험적인 전술을 시도하기로 결정합니다.





손돌목에서 프랑스군의 순찰을 피해 도하를 하는데


배가 부족해 하루에 절반밖에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대담한 작전이라 병사들은 크게 동요했죠.



양헌수도 무척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선두에서 건너지 않으면 병사들이 건너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1진으로 먼저 건너가면 2진이 도망쳐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양헌수는 선두에 서서 도하하기로 결정하는데요


다음날 2진이 과연 건너올지를 고민하느라 밤에 머리가 다 하얗게 셀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양헌수의 걱정과 달리 2진은 씩씩하게 합류합니다.


조선군이 정족산성에 포진했다는 말을 듣자 프랑스군이 공격해옵니다.


그들은 동문과 남문 두 곳을 공격했는데, 양헌수도 그걸 예상하고 이 두 곳을 집중 방어합니다.





정족산성 입구는 좁고 가파른 산비탈이 측면에 솟아있습니다.


프랑스군의 총이 좋다고 해서 전세를 역전시킬 상황은 아니었죠.


게다가 그들은 지상에 대포를 가져오지 않았고, 군함에서 포격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총격전은 세 시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복원 모형에서 보듯이 저정도로 근접해서 치열하게 싸우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조선군의 총이 사거리가 짧고 발사속도도 느리지만, 프랑스군은 겨우 160명이었고


조선군의 사격 실력은 꽤 좋았기 때문에 아마도 프랑스군도 조선군의 화망을 뚫고 근접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사상자 수는 양 측이 다르고 기록마다 달라 정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프랑스군 6명이 전사하고 부상은 30명에서 60명 정도인 듯 합니다.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 1명이었습니다.





프랑스군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것은 아니지만, 전술적인 타격력은 확고했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군은 강화 유수부의 창고와 사고에서 약탈한 물자와 서적을 싣고 바로 철수해 버립니다.




양헌수의 정족산성 전투는 절대 열세인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판단과 대담함으로 이룬 전술적 승리이기 때문에 더욱 값집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안타까운 면도 있습니다.


이 승리는 전술적으로 승리한 것이지 전투력으로 물리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1천명이 주둔하는 강화읍을 정면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이 조선의 현실이었는데요


조선은 이 사실에서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깨달았다고 해도, 너무 늦었죠.






출처 : 임용한 전쟁사 '병인양요와 정족산성 전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