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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상호주관적 실재임은 비교적 받아들이기 쉽다. 또한 고대 그리스 신, 악한 제국, 외래문화의 가치가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신, 우리 나라, 우리의 가치가 허구라는 것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어떤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자신의 희생이 머릿속에서 지어낸 이야기보다 중요한 뭔가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의 인생은 그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이야기의 그물망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많은 사람이 공동의 이야기망을 함께 짤 때 의미가 생겨난다. 왜 교회에서 결혼하고, 라마단에 금식하고, 선거일에 투표하는 것 같은 특정 행동이 의미가 있을까? 내 부모는 물론 형제, 이웃, 이웃 도시 사람들, 심지어 먼 나라 사람들조차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할까? 그들의 친구와 이웃들도 같은 견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면서 자기영속적인 고리를 만든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상호 확증을 거듭하며 의미의 그물망을 팽팽하게 만든다.


  그런데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면 의미의 그물망이 풀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물망이 만들어진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1187년 살라딘(Saladin, 1137~1193,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이자 십자군을 물리친 이슬람 세계의 영웅 — 옮긴이)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이에 교황은 그 성스러운 도시를 되찾기 위해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했다. 집을 떠나 살라딘과 싸우러 가는 존이라는 이름의 잉글랜드 귀족 청년이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존은 자신의 행동에 객관적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원정에 나가서 죽으면 사후 자신의 영혼이 천국에 갈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한 천상의 기쁨을 누릴 거라고 믿었다. 만일 그가 영혼과 천국이 단지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존은 자신이 성지로 가고 코밑수염을 기른 이슬람 전사가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찍는다면 귀가 울리고 다리가 풀리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 테지만, 다음 순간 찬란한 빛이 주위를 에워싸고, 천사의 목소리와 아름다운 하프 소리가 들리고, 빛나는 날개를 단 천사가 자신을 웅장한 황금 대문 안으로 안내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존이 이 모든 것을 굳게 믿은 이유는 매우 촘촘하고 튼튼하게 엮인 의미의 그물망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어릴 적 기억은 저택의 중앙홀에 걸려 있던 할아버지 헨리의 녹슨 검이었다. 걸음마를 시작한 이래로 존은 제2차 십자군 원정에서 전사해 지금은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존과 그의 가족을 지켜보고 있는 할아버지 헨리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음유시인들도 그의 저택을 방문해 늘 성지에서 싸운 용감한 십자군 전사들에 대해 노래했다. 존은 교회에 가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 창문들 가운데 하나에는 말을 탄 채 사악하게 생긴 이슬람교도를 창으로 찌르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그려져 있었다. 또 하나에는 지옥불에 불타는 죄인들의 영혼이 그려져 있었다. 존은 자신이 아는 가장 박식한 사람인 마을 신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다. 거의 매주 일요일 그 신부는 절묘한 비유와 재미있는 농담을 섞어가며 가톨릭교회 바깥에 구원은 없고, 로마 교황이 우리의 거룩한 아버지이며, 우리는 항상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만일 우리가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을 하면 신이 우리를 지옥에 보낼 테지만,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를 죽이면 신은 우리를 천국에 들일 거라고.


  존이 18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흐트러진 차림새의 기사 한 명이 대저택의 대문 앞에 달려와 갈라지는 목소리로 비보를 전했다. 살라딘이 하틴에서 십자군을 무찔렀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교황은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고, 이 전쟁에서 죽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받을 거라고 약속했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에 충격과 근심이 어렸지만, 존은 세속을 초월한 듯 빛나는 얼굴로 이렇게 선언했다. “이교도들과 싸워 성지를 해방시키기 위해 원정에 나가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웃음과 눈물을 보였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존을 포옹하고는 그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등을 힘차게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나이였다면 나도 갔을 것이다. 우리 가문의 명예가 네 어깨에 걸려 있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친구 두 명이 자신들도 가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존의 공공연한 경쟁자인 강 저편의 남작까지 찾아와 그의 성공을 빌어주었다.


  그가 저택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오두막에서 나와 손을 흔들었고, 예쁜 소녀들은 이교도와 싸우러 떠나는 용감한 전사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잉글랜드에서 출항한 그는 낯설고 먼 땅들(노르망디, 프로방스, 시칠리아)을 지나 외국의 기사들과 합류했다. 그들의 목적지와 신념도 모두 같았다. 원정대가 마침내 성지에 상륙해 살라딘의 전사들과 전투를 치를 때, 존은 사악한 아랍인들도 자신과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고 놀랐다.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그들은 그리스도교도가 이교도이고, 이슬람교도들이 신의 뜻에 복종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신과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는 자들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기본원칙만큼은 그들도 같았다.


  이런 식으로 중세 문명은 한 올 한 올 촘촘하게 엮은 의미의 그물망에 존과 그의 동시대인들을 파리처럼 가두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그저 상상의 실오라기라는 생각을 존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부모와 삼촌들이 잘못 알았을 수는 있지만, 음유시인, 그의 모든 친구들, 마을 소녀들, 박식한 신부, 강 저편의 남작, 로마 교황, 프로방스와 시칠리아의 기사들, 심지어 이슬람교도들까지 모두가 잘못 알 수는 없다. 그들 모두가 환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리고 세월이 흐른다. 의미의 그물망이 풀리고 그 자리에 또 다른 그물망이 생기는 것이 사학자의 눈에는 보인다. 존의 부모가 죽고,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도 뒤를 따른다. 십자군에 대해 노래하는 음유시인 대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관한 연극이 새로 유행한다. 가문의 저택이 불에 타 재가 되고, 그 저택이 재건되었을 때 헨리 할아버지의 검은 흔적조차 없다. 겨울바람에 깨진 교회 창문에 새로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지옥불 속의 죄인들 대신,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을 누르고 대승을 거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동네 신부는 더 이상 교황을 ‘성스러운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 교황은 ‘로마의 악마’로 불린다. 근처 대학의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필사본들을 연구하고, 시신을 해부하고, 어쩌면 영혼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린다.


  또다시 세월이 흐른다. 저택이 있던 자리에는 쇼핑몰이 들어섰다. 동네 영화관에서는 <몬티 파이튼과 성배>를 상영하고 있다. 텅 빈 교회에서는 심심한 교구 목사가 일본인 관광객 두 명을 보고 지나치게 좋아한다. 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관광객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웃는다. 바깥 계단 위에서 10대들이 아이폰을 가지고 깔깔거리며 논다. 그들은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의 새로운 리믹스 버전을 유튜브로 본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봐. 한번 해봐. 쉬워.’ 레논이 노래한다. 파키스탄인 청소부가 거리를 쓸고 있는 동안, 근처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시리아에서 대량살상이 계속되고 있고,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는 결렬되었다는 소식이다. 그때 갑자기 시간의 구멍이 열리고, 신비로운 광선이 10대들 중 한 명의 얼굴을 비춘다. 그러자 그 10대가 이렇게 말한다. “이교도들과 싸워 성지를 해방시키기 위해 원정에 나가겠습니다!”


  이교도와 성지라고? 이 말은 오늘날의 잉글랜드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심지어 교구 목사조차 그 10대의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잉글랜드인 청년이 국제사면위원회 엠네스티에 가입하고 난민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시리아로 가겠다고 결심하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다. 물론 중세였다면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2세기 잉글랜드 사람들은 인권이 뭔지도 몰랐다. 이슬람교도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집단의 이슬람교도들을 다른 집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중동까지 가서 목숨을 걸겠다고? 제정신이 아님이 분명하다.


  역사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은 의미의 그물망을 짜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 그물은 곧 풀리고, 되돌아보는 우리는 그런 헛소리를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천국에 가기를 바라며 십자군 원정에 나선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처럼 들린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심지어 냉전은 더 미친 짓으로 보인다. 어째서 30년 전 사람들은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핵 대학살을 불사할 생각까지 했을까?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백 년 뒤 우리 후손들에게는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호모 데우스 | 유발 하라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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