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의 3차 고구려 침공 당시...



수나라 군대는 왕인공(王仁恭)이 이끄는 부대가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포위해 구원병 출격을 막는 사이에 수나라 본대가 요동성을 공격해 몰아붙이고 있었음. 보급도 엉망이었고 명령 체계가 개판이었지만 병력 수만 많았던 2차 침공 때보다는 확실히 효과적으로 고구려를 밀어붙이던 중이었음.



그런데 후방인 여양에서 군량 감독을 맡았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동도(東都), 즉 낙양 일대로 튀어 반란을 일으킴. 물론 동도 자체는 장수 번자개(樊子蓋)가 잘 막아냈지만 양현감도 전투에 능해 동도 일대를 공격해 여러 번 승리를 거두면서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고 결국 수송선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함.










  

결국 수양제는 반란 진압을 위해 퇴각하기로 하는데 고구려가 후미를 칠까봐 철저히 비밀로 하고 움직이려고 함.











그런데 병부시랑이었던 곡사정(斛斯政)이 몰래 양현감과 내통하고 있었는데 양제가 양현감을 진압하러 간다니까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적국인 고구려로 튀어버렸고 양제가 퇴각중이라는 비밀까지 누설해 결국 고구려 군이 퇴각하는 수나라 군 후미를 타이밍 좋게 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게 됨.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한 양제는 다시금 병력을 보내 기어이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을 따내면서 전쟁 시작 이래 처음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얻었으나 이미 수나라는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농민반란으로 난리였고 고구려도 4번째로 쳐들어 온 수나라를 막기엔 국력이 너무 소진되서 넉다운 직전이었다. 결국 고구려의 영양왕은 비정한 수를 쓰게 된다.












"곡사정을 돌려보낸 뒤 화평을 요청한다"



사정이 안 좋았던 양제 역시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을 물린 뒤 화친을 맺었고 이후 곡사정을 돌려받았는데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한 분노를 모조리 곡사정에게 퍼부었다.






 




정사인 수서(隋書)의 기록만을 가지고만 보면 곡사정의 최후는 아래와 같았다.














『於是將政出金光門,縛政於柱,公卿百僚並親擊射,臠割其肉,多有噉者。噉後烹煮,收其餘骨,焚而揚之。』

이에 장수들이 정(政)을 금광문으로 끌고 가 기둥에 묶었고 일백의 벼슬아치와 관료들이 친히 화살을 쏘아댄 뒤 그 살점을 베어내 많은 이들이 그것을 먹었다. 먹은 후 그것을 삶았고(혹은 구웠고) 남은 뼈는 거둬서 불태운 뒤 날려버렸다.


※ 곡사정은 곡사(斛斯)씨다. 곡씨가 아니다.



즉, 사살을 한 뒤 그 시체를 토막내서 먹은 뒤(기록상 순서가 좀 바뀐 거 같지만 아마서 살점을 잘라 삶아 먹은 듯) 남은 뼈는 전부 불태워서 들판 아무데나 뿌렸다는 것.  양제와 신하들 입장에서는 그만큼 국력을 쏟아붓고도 성 하나 못 빼앗은 고구려 전쟁이 뼈에 사무쳤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