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 양반 되시겠다. 가장 위대한 임금님으로 불리는 세종대왕.



세종은 왕이 된 이후에 여러가지 업적을 세웠고 아버지 태종(이방원)이 공신들을 쳐내거나 굴복시키고 자기 처가댁은 물론이고 아들인 세종의 처가댁까지 박살내며 힘겹게 왕권을 세운 것을 보고는 왕권 강화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작된 게 바로 <고려 지우기>였다. 








분영(焚影)





1426년(세종 8년)에는 도화원¹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의 역대 군왕들의 어진(왕의 초상화)과 비주²의 영자초도³를 남김없이 싸그리 불태워버렸다.



1. 도화원(圖畵院) - 고려 ~ 조선 초기까지 그림을 관장하던 부서. 성종 시기에 도화서(圖畫署)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2. 비주(妃主) - 고려 시기 왕비와 후궁들, 그리고 궁주와 옹주 등 궁중 여인들을 두루 부르는 말. 왕비의 비(妃)와 궁주의 주(主)를 합한 말이다.

3. 영자초도(影子草圖) - 초상화를 그릴 때 희미하게 그려둔 초벌 그림.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스케치.





하지만 이런 세종도 건드리지 못한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오늘날의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위치한 '숭의전(崇義殿)'이었다. 






이 곳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7명의 왕을 제사 드리도록 지은 사당 건물이었는데 세종도 할아버지가 지은 사당을 때려부수거나 손상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증축공사를 했고 그나마 그 안에 있던 태조의 어진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진 속 왕건의 복장 자체는 이미 에러가 심각한 상태인데다 대조해 볼 수 있는 초상화는 전부 태워진 상황이라 결국 태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세종의 다음대를 이은 문종은 정몽주 등의 고려의 충신들도 숭의전에 모셔서 제사를 지내게끔 했다.



4. 숭의전에 모셔진 7명의 고려왕 - 태조(왕건), 혜종(왕무), 성종(왕치), 현종(왕순),문종(왕휘), 원종(왕정), 충렬왕(왕거), 공민왕(왕전)






갱상(坑像) 및 강천(強遷)


2년 뒤, 세종은 충청도 천안과 문의현(文義縣, 청주시)에서 보관하고 있던 고려 태조의 어진들을 거둬들였고 쇠로 만든 주물상 및 고려 공신들의 영정, 나주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의 2대 왕 혜종의 어진과 조각상, 왕건의 어진까지 함께 거둬서 개성으로 보내 전부 땅에 묻어버렸다.




태조 왕건의 형상을 묘사한 거라고 알려진 이 청동 조각상도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 옆에 있던 빈 땅에서 발굴되었다. 물론 왕건이 레알 저렇게 헐벗고 다닌 건 아니고 고려가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왕건을 고대 인도 설화에 나오는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빗대어 묘사한 것이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마전현(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고려의 역대 임금 18명의 어진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그 어진들을 정갈한 땅을 골라 파묻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경기도 안성의 청룡사에 모셔져 있던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어진을 떼낸 뒤 고양현(高陽縣,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공양왕의 무덤 근처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그 이후 공양왕의 어진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폐기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반전. 의외의 『고려사(高麗史)』 집필





이렇게 고려의 흔적을 조져버린 세종은 뜻밖에도 이후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했는데 이전에 정도전이 조선 개국의 명분과 유교 사상에만 치우쳐 고려를 지나치게 낮게 서술했던 『고려국사(高麗國史)』와는 달리 고려의 묘호¹와 시호²를 과하게 건들지 말라는 지시와 더불어 외왕내제³로 인해 황제국의 용어를 썼던 것을 그대로 서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 묘호(廟號) - 동양의 군주에게 붙여진 칭호로서 그 군주가 죽고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됨. 왕건을 예로 들면 '태조(太祖)'가 바로 묘호임.


2. 시호(諡號) - 죽은 이에게 올리는 특별한 칭호. 왕건을 예로 들면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그리고 이 길다란 이름 중 짧게 줄인 칭호인 '신성대왕(神聖大王)'이 바로 시호다.


3. 내왕외제(外王內帝) - 밖에서는 왕, 안에서는 황제라는 의미로서 밖으로는 대국, 대체적으로 중국의 신하국을 칭하면서 자신을 왕으로 불렀으나 국내에서는 자신을 황제라고 칭한 것을 말한다. 고려는 주로 송나라를 상국으로 떠받드는 형태였으나 송나라가 거란족의 요나라한테 쥐어 터지면서 부터는 거의 대놓고 황제국을 칭하기도 했으며 송나라에 갑질을 시전하곤 했다. 유명한 시인 소동파가 고려를 싫어했던 이유.   





이로써 총 139권 75책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역사서가 나왔고 (어지간한 중국의 역사서보다도 많은 양임) 이걸로도 부족해 아들인 문종 시기에는 고려사의 요약본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까지 내놨다. 














요약: 고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어진을 불태우고 석상을 파묻었으면서 아들과 대를 거쳐 고려의 역사를 백과사전 급으로 남겨놓은 츤데레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