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기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세는 출생당시 죽임을 피해 바구니에 담겨 강으로 흘려보내졌는데 그 후 한 이집트 공주에게 구출되어 왕자로서 자란다. 


이 모세에 관한 서사는 기원전 235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 ‘아카드의 사르곤’ 신화의 초기 전개와 매우 유사하며 그후에도 비스무리한 부분이 많이 나온다










유프라테스강이 잉태한 아기



기원전 2350년 나일강유역에선 이집트왕조가 흥하기 시작하였고,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는 아카드 제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아카드를 서부시리아에서 자그로스산맥 밑으로는 아라비아반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이끌었던 왕은 바로 사르곤이였다(BC2350-BC2295).

사르곤(샤루킨)이라는 의미는 아카드어에서 '정당한 자'또는' 정통성이 있는자'을 의미한다.

정통이라는 말은, 그의 왕위 계승은 이미 정해진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혹은 모든 사람들을 동의시켰다는 뜻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아카드 최초의 국왕이었던 사르곤을 정통성 있는 왕으로 임명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사르곤 왕이 정통성이 있는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대하여 기록한 '사르곤 전설(legend of sargon)'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여사제였기에 그가 태어나자 유프라테스 강에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유프라테스강은 인류 최초의 문명을 잉태한 강이지 않는가? 

강은 그 아이를 삼키는 대신 훗날 강의 닿는 모든 곳의 지배자가 될 수 있도록 살려주었다. 

결국 사르곤은 유프라테스강에서 물 긷는 사람 아키(Akki)에게 발견되어 친자식처럼 키워졌으며, 키시왕국 궁전의 물잔 나르는 이(cup bearer)또는 랍샤케(아카드어로 원예사)가 되었다.


여기서  물잔 나르는 이와 원예사가 어느정도에 직책인지 궁금해할텐데

이당시 왕에게 물이나 술을따르는 이는 연회때마다 왕과 함께하는 사이이므로 친밀하고 먼저 독이 있는지 검사하였으며 왕의 총애또한 받아야만 할수있는 직책으로 상당한 권력을 가진 직책이였다

또한 원예사는 수목만을 가꾸는것이 아닌 도시의 수로를 관리하는 대단히 중요한 직책이기에 사실상 이마저도 고위급 공무원의 직책이였다



다음의 문구들은 '신-아시리아 시대(기원전 934년 ~ 기원전 609년)'의 <사르곤 전설> 기록문의 일부다


  -> 나는 사르곤, 힘센 왕, 아가데(아카드)의 샤르(아카드어로 왕)이다.


  어머니는 고귀한 신분의 여사제였다.


  아버지는 모른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언덕(hills)을 사랑했다.


  내 고향 도시는 아주피라누(Azupiranu).


  유프라테스 강기슭에 있다.


  지체 높은 여사제였던 어머니는 나를 밴 후 남들 모르게 나를 낳았다.


  골풀로 만든 궤짝에 나를 넣고 뚜껑을 닫은 후 역청으로 봉했다.


  어머니는 나를 강물에 띄워 보냈다.


  강물은 나를 덮치지 않았다.


  강은 나를 아키(Akki), 물 긷는 자에게 보냈다.


  아키(Akki), 물 긷는 자는 물병으로 물을 긷다가 나를 건졌다.


  아키(Akki), 물 긷는 자는 나를 자식으로 키웠다.


  아키(Akki), 물 긷는 자는 내게 원예사의 임무를 주었다.


  내가 원예사였을 때 이슈타르(수메르,아카드 신화에서 사랑과 대지,전쟁을 관장하는 여신)는 내게 사랑을 주었다.

  ....

  이하 생략





사르곤은 도시국가 키시(Kish) ( 당시에 패권국들중 하나 )의 왕 '우르-자바바'의 물잔 나르는 시종이 되었다

사르곤은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좌를 찬탈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신-바빌로니아(기원전 626년 ~ 기원전 539년) 시기의 <사르곤 연대기>에 "이슈타르 시기(Era of Ishtar)에 일어섰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슈타르 여신을 모시는 신전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신-바빌로니아 시기의 <사르곤 연대기>에 나오는 문구



  -> 사르곤, 아가데(아카드)의 왕, 이쉬타르 시기(Era of Ishtar)에 일어섰다. 경쟁자도 적대할 자도 없었다. 그는 온 나라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마력(魔力)을 뿜었다.

  





일개 시종에서 키시(Kish)의 왕이 된 사르곤왕이 단순한 왕위찬탈자였다면 과연 경쟁자나 적대세력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가 왕위에 오를만큼의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은 물론, 신전측의 지지가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사르곤왕은 아카드 제국에 잠재되어 있던 힘을 중동 전역에 떨치게 된다. 

 그야말로 청동기 시대 전성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정복전쟁



당시 수메르(Sumer)의 주도권은 우루크(Uruk) 왕이자 움마(Umma) 왕인 루갈-자게시(Lugal-Zagesi)가 쥐고 있었다. 따라서 사르곤과 루갈-자게시와의 격돌은 피할 수 없었다. 


루갈-자게시 왕은 50명의 엔시(Ensi)를 거느리고 사르곤 왕과싸움을 벌였다.

엔시는 한 지역을 다스리는총독 내지 왕자이었음으로, 우루크 왕국 (우르크 제3왕조)역시 50여개의 도시를 거느린 대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아카드와 우르크의 생존은 물론 나아가 온 수메르의 패권을 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루갈 lugal은 왕,통치자,대왕을 의미



 하지만 전쟁은 사르곤왕의 일방적인 우세속에 끝이나고 루갈-자게시 왕은 패배하고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사르곤왕이 우루크를 압도 할 수 있었던 것은 2륜 전차부대를 최초로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수메르는 4륜 전차였기에 기동성이 현저히 낮았고 또한 아카드는  복합궁을 사용한반면 수메르는 단일재료의 활을 사용했다) 

그리고 쇠사슬로 목이 묶인 채 니푸르(Nippur)에 있는 "엔릴의 문"으로 끌려나오는 치욕을 당하였다.


이어 사르곤 왕은 우르(Ur), 라가시(Lagash), 움마(Umma)를 차례대로 격파한다.

 <아가데(아카드)의 사르곤(Sargon of Agade)>에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모든 도시들의 성벽을 파괴시켜 버린 것이다. 

라가시의 항구 도시이자 페르시아 만으로 가는 길목에있던 에닌키마르(Eninkimar)도 사르곤의 군대 앞에 무너진다.


사르곤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페르시아 만의 바닷물로 무기를 씻는다. "아래 바다(Lower Sea)"를 정복했다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는 에닌키마르(Eninkimar)를 쳐부수고 성벽 박살냈다. 라가시에서 바다까지 이르는 모든 땅을 쳐부쉈다. 그리고 바닷물로 무기를 씻었다. 움마 사람들과 싸워 승리했고, 도시를 파괴했으며, 마찬가지로 성벽을 박살냈다.


 <아가데(아카드)의 사르곤(Sargon of Agade)에서, 아카드 왕조(BC 2334 ~ BC 2154) 시대>




제국건설



사르곤 대왕은 유프라테스 강변에 아가데(아카드)를 세우고 제국의 수도로서 삼는다.


자신의 수호신 이슈타르 여신을 모신 신전과 키시의 전쟁신 자바바(Zababa)를 모신 신전을 아가데(아카드)에 세웠다.

정복된 나라의 왕과 총독은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새로 생겨나는 관직은 모두 아카드인에게 돌아갔다. 아카드어의 중요도가 커져 수메르어와 등급이 같아졌다. 비문을 새길 때 아카드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르곤 대왕은 여전히 수메르 신(神)들을 숭배했다. 사르곤 대왕의 딸 엔헤두안나(Enheduanna)는 우르(Ur)의 수호신이자 달의 신인 난나(Nanna)의 여사제가 되었다

그녀는 최초의 시인이자 여성시인이다


사르곤 대왕 자신은 스스로 "안(An) 또는 아누(Anu)가 기름 부은 사제", "엔릴(Enlil)의 위대한 총독"이라고 불렀다. 기존 수메르 신들을 계속 숭배함으로써 사르곤 대왕은 자신이 정통성을 깨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메르와 아카드 영토를 지배하는 데 성공한 사르곤왕은, 수메르에 아카드인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딸을 최고 여제사장 지위에 두어 왕조원리에 바탕을 둔 통일왕국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프라테스강은 그에게 더이상의 시간을 주지않았고 기원전 2279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된건 없다


하지만 그는 중앙집권체제의 시초를 마련했고 이러한 체제는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제국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