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역사가 없다시핀한 일본 사학계에서는 심해에 뭍힌 초고대문명에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소서노여왕이 비류를 데리고 열도까지 내려와 원주민을 규합하고 최초의 문명을 시작했다는 가설이 있음.... 거기다 임진왜란도 자신들의 아버지(주몽)나라 를 되찾기위한 항쟁이었을 거라는 개소문도 존재하지요..
신라가 꽤 오랫동안 왜에 쩔쩔맸다는데 그걸 가야 등지에 남아있던 한반도 원주민 세력으로 해석하고, 삼국시대를 만주 쪽에 살던 한민족이 내려오며 한반도 원주민들을 일본 열도로 몰아낸 과정으로 보는 학설도 있더라..
역알못이라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꽤 설득력 있다고 느낀 학설이었음
그리고 뭍힌이 아니라 묻힌이다 게이야..
애초에 '도래인'이란 개념이 왜 생겼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면 완전 뜬구름잡는 틀린 이야기도 아닐듯.
다만 일본 사기나 고대 유물이라던가 그런게 한반도에서 비해서 너무 턱 없이 부족하고 거의 없다 싶이 하니 타임머신이라도
생겨서 그 시절까지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누구도 완벽한 팩트는 알 수 없죠, 거의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꼴이니..
조선이랑 고려가 처한 시대적 상황이 달라서 무조건 퇴보라 보기도 어려움. 가령 도자기 같은 경우는 청자보다 백자가 더 만드는데 난도가 있는데다 중국, 중동, 유럽도 백자를 더 선호하게 됨. 또 임진왜란으로 기술자들이 일본에 대거 납치되면서 인력 손실을 겪은데다 양반들도 백자보다 놋그릇을 더 선호하고, 해금령과 기타 여러 상황으로 해외 수출할 방법도 없다보니 기술발전할 동인이 다른 나라들보다 부족했음
취향의 차이나 다른방향으로의 발전으로 볼수도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입장에서보면 그것 이상으로 퇴보가 크다고 봄.
특히 상공업을 하대한게 너무나 치명적임. 고려때는 실크로드랑 청해진을 발판으로 가히 전세계랑 교류한다고봐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교역에 힘쓰고 부의 쏠림현상이 심해도 저잣거리 아낙도 금가락지, 옥가락지 하나정도는 들고다니더라 라는 글귀가 있을정도로 부유한 시기였음.
코리아라는 단어가 이 때 고려에서 유래되 전세계에 퍼져나가서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한국을 부르는 이름으로 쓰일정도로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도 매우 활발하던 때였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부정할 여지없이 퇴보라 보는 입장.
상업은 조선이 억상으로 상업을 통제하려는 부분도 있지만 명나라가 150여년 동안 해금령을 때려서 조공 무역 이외의 사무역을 금지시킨 것도 큼. 당이나 송, 원은 해외무역에 긍정적이었지만 명은 아님. 동북아에서 가장 큰 시장이 조공 무역 이외의 사무역을 일절 금지시켜버리는데 어떻게 해외무역을 하겠어?
게다가 일본은 남북조시대를 겪는 과정에 왜구가 활개를 치면서 바닷길이 위험해짐. 그나마 조선 초 대마도 원정으로 한반도를 향한 왜구 공격이 수그러졌지만 왜구 자체가 없어진 것도 아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구 금지령 때리기 전까지 왜구가 남아있던 판국임. 조선 초 동남아 국가들과 잠시 교류가 있었다 끊긴게 동남아 사신들이 중간에 왜구선에 걸려 약탈당하고 죽임당해서 그럼.
공업 부문에서는 애초에 고려시대부터 공장 차별이 시작되었고 고려말 왜구의 한반도 침략으로 공장들 수도 부족해지면서 조선 초기에 관영으로 때우면서 제대로 발달하기 힘든 것도 있음.
명나라가 해금령을 내린건 천조질서하의 모든 국가가 아니라 오로지 자국한정이었음.
자국내에서의 해적발호와 기술을가진 인구유출 방지, 북방기마민족만으로도 너무나 길어진 전선을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낸 명령이었지 그 명령에서 조선, 일본, 여진족 등 다른 나라는 전부 자유로웠다.
일본은 포르투칼 상인들과 교역하며 아퀴머스(조총), 기계술을 들여오고 여진족은 북방민족 실크로드 통해서 모피 내다팔고 다 보란듯이 교역했는데 조선이 외부와 단절한건 명나라가 관어한것이 아닌 오롯이 수뇌부의 판단과 실책이었음
명나라가 해금령 때린 이유는 왜구의 발호, 방국진같이 국가 통제를 받지 않는 거대 해상세력 발생 방지, 자국의 국가 위신 확립 요 3가지 목적이 컸고 이에 따라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강요함. 그래서 명나라를 상대로 하는 무역을 할때는 조공 무역이나 일본처럼 감합무역아님 답도 없는 상태고.
물론 네 말대로 조선이나 일본, 여진족은 자기들끼린 자유롭게 무역이 가능하지. 근데 일본도 15세기에 전국시대 열리면서 조선 입장에선 일본도 쉽게 가기 어려움. 다이묘들끼리 서로 부대끼며 싸우는데 거기 휘말리면 난감하니까.
그리고 유럽 열강들과의 접촉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건 교역을 먼저 제안한건 유럽이었지 중국과 일본이 먼저 유럽에 제안한게 아님. 쿠로시오 해류덕에 유럽은 16세기부터 중국이나 일본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한반도는 쿠로시오 해류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보니 유럽이 한반도에 자력으로 도달 할 수 있었던건 19세기 초나 되야 했음. 그전에는 풍랑으로 떠밀리는게 다였음. 유럽 애들도 중국이나 일본 가는 것처럼 한반도에도 가려고 했지만 당대 해상술로는 힘들었고 중국이나 일본의 비협조로 가는 방법도 알기 힘들었음.
그리고 해적들의 발호로 상공업이 위축된것도 이해는 해도 납득은 못하는게 해적이 발호하면 국가적으로 나서서 이걸 소탕하고 뚫어서 진압해서 교역할생각을 해야지 위험하니까 그냥 교역포기할래... 이건 실드불가능할정도로 엄청난 실책임.
고려때는 전문적으로 대양함대를 육성하고 해상안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해적족치고 다니고 여몽연합을통해 대마도 정벌 시도까지할정도였는데 조선들어가면서 아예 바다를 포기하고 이 억제제가 사라지면서 왜구, 해적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단초를 제공함,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차이지만 피해를 무서워해 고려 수백년간 쌓아왔던 해상무역 노하우, 인적자원, 해로, 해상술, 이권등을 싹 다 포기하고 수백년 내내 조공무역에만 의존하고 외부와 단절을 선택했다?
이건 진짜 당시 결정권자들 철퇴들고 대가리 깨도 무방한 판단미스임
고려시대 때 대양해군은 따로 없음. 고려시대 때 지역 해군을 담당하던 관청이 도부서인데 도부서는 양계에 각각 2개, 경상도와 전라도, 양광도를 담당하던 도부서 1개가 다임. 그나마 동계에 있는 도부서가 여진족 해적과 싸우느라 걔들이 실전 경험이 풍부하지만 그 도부서도 무신 집권기 거치면서 유명무실화 됨.
여몽연합 말하는 거는 일본 원정 말하는 것 같은데 어차피 일본원정은 몽골이 주가 되고 고려는 참여하기 싫다고 적극 의사표명했음에도 강압에 이끌려 간거임.
그리고 원간섭기 거치면서 고려군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에서 원나라도 맛이 가고 일본은 남북조시대로 내전 터지면서 왜구가 한반도를 침략하면서 어지간한 해안 도시들은 큰 피해를 입음. 그 과정에서 해상 무역 노하우나 인적자원도 큰 피해를 보고. 결국 조선 세종 떄 대마도 정벌로 왜구 침략이 수그러들고 남은 왜구도 본토나 중국으로 시선을 돌리다보니 굳이 대양 항해할 동인이 없음.
명나라가 수도를 계속 난징에 두었으면 모르겠는데 영락제 때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더더욱 없고
내가 말하는 대양해군은 현대의 명확한 규격에 따른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대양까지 영향력을 투사할수있는 능력과 규모를 가진 함대를 말하는거고 고려수군이 그 대양해군이라 부르기에 합당한 능력을 가지고있냐한다면 답은 그렇다임
네가 말한건 어디까지나 국가에서 관리하는 정식 기관, 이를테면 현대의 해군같은 개념이고 민간까지 그 범위를 확대하면 순수 고려해군의 규모는 동아시아 탑급이었음.
그리고 설마 당시 명, 일본해적들이 전부 국가의 정식적인 지원을 받는 공식기관으로 생각하는건 아니리라 믿고 말하자면 당시 해상무역은 상인 하나, 상단 하나하나가 단순히 거래를 위한 운반인의 개념이 아닌 당시 혹독한 상황을 이겨내기위한 반군사조직, 정병이나 다름 없었음.
네가 말하는 수군의 공식적 규모로 따지면 당시 중국과 일본은 고려보다 훨씬 보잘것 없었음. 특히 일본은 공식 해군이 타국과의 교역을위한 사절단파견에만 임시편성될정도로 없었고.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는 해적들이 타국가의 선박을 노릴정도의 힘과세럭을 가졌듯이 당시 상인, 상단들도 그런 해적들이 나오면 '이랏샤이마세'하며 상품주는게 아니라 최소 대등하게 대응할정도의 기본적인 군사력, 세력을가지고 있었고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가 상선에까지 장착될정도였음. 이것까지 더하면 고려는 명백히 부정불가능한 해상강국임.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일본이나 중국 해적들을 누르고 해상패권을 차지할수있었을정도로 강한 수군전력과 영향력을 오롯이 포기하고 판옥선 위조 건선해서 연안방어에만 집중했다?
고려 해상들은 고려 성종 대에 최승로의 건의로 외교 업무나 국가의 필요가 아닌 이상 자유롭게 해외로 나가서 무역하는게 금지됨. 그래서 고려대 해상무역은 송상이나 다른 나라 상인들이 고려로 와서 무역하는 비중이 높음. 네 논리라면 고려나 다른 나라로 많이 간 송상들이 더 많으니 송나라 수군이 대양해군에 더 부합함.
최무선이 상선에 대포 실었다는 얘기는 근거가 뭐임? 고려사 세가나 진포 해전에 참가한 나제 열전에는 전함이라고만 나옴. 당시에는 최영이 전함 증강시키려고 건조 노력도 하는지라 이 배가 상선이라는 명확한 근거가 없음
누차 말했듯이 조선이 해상진출을 해야한다는 동인이 마땅히 없음. 명나라는 조공무역만 받아주고 일본은 전국시대로 치고받는데다 왜구는 아직도 있고. 그 상황에서 어디로 감?
이슬람, 포르투칼, 인도, 에스파냐, 베트남 수뇌부에서 의지만 있으면 뚫을만한 곳은 얼마든지 있었음.
당시 항해술, 무역수준을 너무나 낮게 책정하는데 멀리 갈것도 없이 조선이 포기한사이에 일본이 가져갔던 지분, 하다못해 대에스파냐, 대포르투칼 무역, 둘 중 해ㆍ만 가져갔어도 조선이 5백년간 땅만 주구장창 파면서 이룩한 부보다 훨씬 더 많이 이룩했을거임,
상선들이 화포장착한건 당시 고려갔다온 이슬람상인들 여행기에 공공연히 적혀있다 '이 나라는 물이 맑고 시원하며 질 좋은 약재와 보석이 많아 교역하기에 좋고 대포를 장착한 상선을 쉬이 찾을수있어 해적들이 감히 범치못한다'
당시 인근 해적들, 수군 수준? 화포는 무슨,육박전밖에 안되서 직접적으로 선박약탈은 거의 못하고 해안가 마을 상륙해서 털어가는수준이었음.
왜 고려가 해상무역으로 이득보고 인근 국가들에서 해적들이 들끓었을까?
그 놈들은 바보라서 직접 교여하거나 하다못해 중개무역이라도 하는게 해적질보다 더 이득된다는걸 몰랐을까?
다 알았어. 근데 해로, 대규모 물량을 실을 함선건조술, 항해술, 이런거 능력이 안 되고 간신히 인근 항해만 가능해서 마을 약탈하고 대규모 해외무역 성공시키고 돌아오는 선단을 노린거지.
그리고 조선이 해안진출을 해야하는 동인이 없었다고 해안진출을 안했다는것 자체가 문제란거임.
현대로따지면 당장 돈 안된다고 가망 안보인다고 기술개발같은거 싹다포기한거나 다름없는데 그럼 뭐 다른 나라사람들은 안하면 안되는, 무슨 절대적인 이유가 있어서 무역이나 협정을 했음?
돈 더 벌고, 더 잘 살고. 더 영향력 넓히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회사세우고, 자본이 모여서 발전하고 교역한거지
욕망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치는 이유인데 조선이 동방의 은자. 소중화, 천조제일번신, 사농공상, 상업은 천하니, 공업은 하찮니, 쟁이노릇시니 뭐니 타령하며 체제유지에만 급급한 사이에 세상은 변했고 그결과가 어찌됐는지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종말이 증명하지
유럽과의 무역은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유럽이 먼저 중국과 일본에 도착해서 무역을 제안해서 이뤄진거지 중국이나 일본이 먼저 유럽을 찾아서 손을 댄게 아님. 당장 지도만 봐도 유럽에서 동북아로 해로를 타면 한중일 중에 중국과 일본이 접촉하기 제일 쉬움. 애초에 유럽이 자력으로 한반도에 도착한게 1787년에 울릉도와 제주도 해역을 측정한 프랑스 군함 부솔호임. 그 이전에는 난파선이 고작이었고.
그리고 고려 초중기때 바다 상황이랑 고려 말때 바다상황은 구분지어야 함. 고려 초중기는 중국이나 일본도 중앙정부가 멀쩡하다보니 지방 통제가 수월해서 바닷길이 딱히 위험할게 없었음. 동해 쪽은 여진족 해적때문에 위험했지만 동북아의 주요 해상 활동이 이뤄지는 쪽은 황해랑 남중국해 쪽이고 이쪽은 고려 초중기때 해적이 활개치거나 그런 기록이 전무함. 고려시대에는 왜구가 고종 때 처음 언급되지 그 이전의 고려시대에는 왜구가 없었음.
이슬람 상인 여행기는 내가 찾아봐도 주로 신라시대 언급하는 것만 있어서 그런데 네가 말한 이슬람 상인 여행기 제목 좀 알려주셈.
그리고 해안진출에 관해서는 오늘날의 시선으로만 보는 것 같은데 조선 초는 여말 혼란을 복구하는 것이 제일 우선 순위였고 당대에는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바로 코앞이라 굳이 동남아까지 갈 요인이 없음. 결과를 아는 지금으로 보면 안타깝지만 당대 지식인들의 지리 정보 수준이나 경험에선 중국이 제일 선진국이었고 따라서 조공무역 횟수를 높여서 선진문물 많이 받아들이는게 당대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음.
그리고 사농공상 사농공상하는데 정작 사농공상 충실하게 지킨 곳은 오히려 에도막부임. 조선은 후기에는 양반들도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생겨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