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이 글을 쓴 계기)

https://arca.live/b/singbung/44103722


참고.

(출처)

https://aristotelecom.tistory.com/48



사실 대만이 한국을 혐오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과거의 단교 때문이다.


한국과 단교하기 전에 영국, 인도네시아 (1950), 이집트 (1956), 프랑스 (1964) ...(중략) 미국 (1979), 사우디아라비아 (1990) 등과 같이 많은 나라들이 대만과 단교를 했다.


혐한 친일을 일삼는 현재의 대만인들의 생각과 달리 한국 단교 20년 전에 일본 역시 대만과 단교를 했다.


심지어 일본은 대만과 단교 당시 대만인 대사관 직원들을 경찰까지 동원해 물리적인 방식으로 퇴거시켰다.


그럼 대만은 왜 우리나라를 혐오하냐고?


대만이 그만큼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기에 더 절박했기 때문이다.


듣보잡 소규모 국가들과 외교를 근근이 이어가던 대만 입장에서는 그래도 궁색은 갖춘 한국이 유일한 희망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한국의 단교 조치는 일본, 미국 등과 같은 강대국들과는 달리 마지막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았다.


심지어 대만 측 주장에 따르면 당시 한국 대통령(노태우 대통령)은 "새 친구를 만나도 옛 친구를 버리지 않겠다"(중국과 수교하더라도 대만을 버리지 않겠다는 뜻.) 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대만이 행복회로를 풀 가동하도록 만들었다.


방금 얘기한 노태우 대통령과의 담화는 대만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데 1992년 5월, 대만은 장옌스 총통부 비서장(대한민국 대통령비서실장과 동급)을 총통특사로 파견하면서 한국 정부의 중국과의 수교 진척 상황을 문의하면서 수교 1년 연장을 요청했을 때 실제로 나온 담화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수교협상 사실을 부인하고 옛 친구론을 반복해서 언급하면서 대만 측을 안심했다.


한국 정부의 거짓말은 이로 그쳤으면 다행이지만, 거짓말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갔다.


1992년 7월, 한국과 중국이 9월 수교한다는 보도가 나갔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1992년 7월 20일, 대만 첸푸 외교부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9월 수교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 일방적 단교 통보의 대한민국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는 진수지 대사.

(자막에 김수기라 적힌 것은 진수기 대사에 진이 金을 썼기 때문이다. 현재는 진씨로 읽어야 한다.)


현 상황이 짐칫 안타까웠던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1992년 8월 15일, 광복절 리셉션장에서 진수지 주 한국 대만 대사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딸 결혼식 참석을 위해 잠시 출국할 것'이라고 말하자 '지금 여러 가지 상황을 보아서 한국을 비우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미국으로 가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는 답변을 하여 한중수교가 임박했음을 넌지시 알렸다.


하지만 시일은 이미 늦고 말았다.


3일 후 8월 18일 진수지 대만대사를 롯데호텔 객실로 부른 이상옥 외무장관은 한중수교 교섭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었음을 통보하면서 공식 발표 때 까지 보안을 유지해달라는 당부를 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한 격.


당연히 진수지 대사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즉시 대만 외교부를 통해 입법원에 보고되었고 입법위원들은 곧 대만 언론에 알리면서 극비리에 추진되던 한중 수교 협상의 내막이 공개되었다.


대만은 빡칠대로 빡친 나머지 고위층이 나서서 한국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대만 정샤요옌 외교부 정무차장은 "노태우 대통령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나 중화민국과 한국 관계에 있어서는 영원한 죄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는 성명을 통해 한국 정부를 맹렬히 비난했다.


또한 첸푸 외교부장은 "한국대통령은 리덩후이 총통을 비롯한 중화민국 고위 인사들에게 새 친구를 사귀어도 옛 친구를 버리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으나 옛 친구를 버렸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대만의 비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심지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인연이 깊은 하오보춘 행정원장 역시 한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 자신이 쓴 책을 발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하오보춘

(직업군인 출신으로 현대 중화민국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20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오보춘 행정원장은 8월 20일 행정회의(국무회의와 동급으로 보임.)에서 "한국 정부가 중국과 국교수립을 실현시키려는 것은 국제신의에 등을 지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국제조류에 위반하는 행위이며 구소련과의 국교수립, 국제연합 가입 등은 이해와 지지가 가능하나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갖는 것은 대만이라고 하는 옛 친구와의 인연을 끊는 처사."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또 "전세계의 공산국가가 계속 붕괴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 만이 공산당 전제정치를 견지하고 있는 정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일은 매우 부당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공식 단교가 있었던 8월 22일, 첸푸 외교부장은 외신 기자들을 피해 조용히 박노영 한국 대사를 외교부로 불러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시했다. 그리고 대만 외교부는 대 한국 보복 조치를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만 외교부는 한국에 대해서 주동적으로 단교한다.

② 단교협의를 위한 한국 특사의 대만방문을 거부한다.

③ 한국, 대만 간 <항공협정>을 중단한다.

④ 대한국 경제무역 우대조치를 취소한다.


단교선언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첸푸 외교부장은 "한국 측이 이렇게 상처를 입혔으니 지금부터 노태우 대통령 임기만료 시점인 1993년 2월까지 공식 접촉이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민간교류는 매우 길며 한국의 많은 친구들이 우리를 아끼고 보호해 주고 있으므로 우의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992년 8월 24일 오후 4시, 명동 대사관에서 대사관 직원 및 화교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국기 하강식이 열렸다. 고별사에서 진수지 대사는 "오늘 잠시 국기를 내리지만 우리는 머잖아 전 중국에 국기를 휘날릴 것"이라며 대사관 직원과 화교들을 위로했다.


밤 10시 20분, 중화항공 133편으로 김포 공항을 출발하여 진수지 대사 부부는 귀국했다. 비행기 트랩에 오르기 전에 진수지 대사는 "우리는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국은 대만과의 단교 후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는데 1994년 7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집계한 한국의 손실은 연간 3억 8천만 달러 수출 차질, 2억 4천 6백만 달러의 관광손실을 합쳐서 6억 2천만달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