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창빈 안씨(昌嬪 安氏)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해보죠.








1. 사랑받는 며느리



원래 안씨는 간택 이런 게 아니라 8살의 나이로 궁녀로 들어왔습니다. 미모가 출중하진 않지만 싹싹하고 착한 성품 덕에 자순대비(정희왕후)의 총애를 받았고, 대략 21살이 되던 해에 자순대비가 후궁으로 추천해 중종의 승은을 입은 뒤, 정5품 승은상궁이 됩니다.


※  보통 일반 궁녀가 상궁이 되려면 15년에서 20년은 걸리는데, 왕이 궁녀에게 승은을 베풀 경우, 준 후궁인 승은상궁이 됩니다.


이후 소격서 혁파, 조광조 사사 등 여러 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승은상궁으로서 조용히 지내다가 경빈 박씨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이 몰락한 '작서의 변'이 일어난 뒤 2년 후, 종4품의 숙원에 올랐으며 중종이 죽기 4년 전에 종3품 숙용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중종이 죽은 후 1품이 올라 정3품 소용으로 진급합니다. 평탄한 삶을 살았던 것을 보면, 남편과의 관계는 평범했다 치더라도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 여인천하에서는 작중 내내 '창빈'이라고 불렸으나 생전 그녀의 최고 지위는 소용이었습니다.







2. 정실부인과의 돈독한 사이



소용 안씨는 승은상궁 시절에 아들인 영양군, 딸인 정신옹주를 낳았고 숙원이 된 이후에 또 다른 아들인 덕흥군을 낳았습니다. 중종 치세에는 후계를 둔 갈등이 심각했는데 아들을 둘 씩이나 낳았지만 안씨는 전혀 후계 다툼에 개입을 하지 않았고, 조용하고 다정한 성격은 예나 다를 바 없어 당시 계비이던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후궁들은 자신이 모시던 왕이 죽었을 때, 자식이 없으면 궁을 나가 여승이 되거나 혹은 결혼한 군(君)이나 옹주가 궁 밖에 있는 경우, 거기로 가서 살아야 했는데 소용 안씨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안씨와 친했던 성렬대비(문정왕후)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만류했고 소용 안씨에 대한 예우는 물론이고 그녀가 낳은 아이들까지 잘 보살펴주면서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3. 움켜쥔 조선의 혈통



일생을 조용히 덤덤하게 살아갔지만 어찌됐건 소용 안씨는 아들을 둘이나 낳은 상태였습니다. 똑같이 중종을 섬겼지만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으로 아들 복성군과 함께 쫓겨난 뒤 죽임을 당한 경빈 박씨, 성렬대비가 권세를 휘두르던 명종 시기에 자신의 아들 금원군이 역모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덩달아 궁밖으로 쫓겨난 희빈 홍씨 등과는 달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궁에 머물렀습니다.


※ 작서의 변; 저주 등에 사용되는 작서(팔다리를 자르고 온 몸을 불에 지진 쥐의 시체)가 세자(훗날의 인종)가 머무는 동궁 인근에서 발견된 사건.  이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유배형을 당했다.

※ 가작인두의 변: 작서의 변이 벌어진 지 6년 후, 세자와 중종, 문정왕후를 저주하는 내용의 목패와 저주 인형이 궁에서 발견된 사건. 경빈의 둘째 딸인 혜정옹주와 그 남편 홍여가 연루된 바람에 유배형을 받았던 경빈 박씨는 사약을 받고는 죽었다.


그리고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과 명종은 성렬대비의 등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단명했고, 명종의 정비이자 대비가 된 의성대비(인순왕후)는 다음 후계로 소용 안씨의 둘째 아들인 덕흥군의 아들 '하성군'을 왕위에 세웠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입니다.




선조와 그 후대 왕들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이후 조선의 왕들은 모두 하성군, 즉 선조의 후손들이었고 그 하성군은 소용 안씨의 후손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소용 안씨는 살아생전에는 죽은 듯이 살았지만 조선의 역사에 거한 발자국을 찍은 셈이었죠. 선조 역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소용 안씨의 작위를 올려 '창빈'이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소용 안씨가 이른바 '창빈 안씨'로 불리는 것은 이 때부터입니다.








4. 뜻밖의 명당


소용 안씨는 죽은 이후 경기도 양주의 장흥에 묻혔으나 터가 좋지 않다는 얘기가 나와 명종 시기에 과천 동작리로 이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장하자마자 손자인 하성군이 왕위에 올랐고, 원래 후궁의 묘에는 비석조차 세우지 않았는데 조선의 명맥을 이어준 존재라는 명분으로 숙종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주변 백성들은 창빈 안씨의 묘를 '동작릉'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 선도비: 무덤의 남쪽 방향에 세우는 비석으로서 죽은 이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인근에 국립현충원이 생기면서 창빈 안씨의 묘는 현충원의 뒷편 쪽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그 주변에...



쟁쟁한 대한민국 역사 속 대통령들과 장군들이 창빈 안씨의 묘를 옹기종기 둘러싸고 있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참배객이 많은 대통령들 사이에 끼어있다보니 덩달아 인지도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