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제 다들 좀 알고 있겠지만 병자호란은 사실 질 전쟁이 아니었다.


청은 호왈 10만이었지만 실제 병력은 약 45,000여 명이 전부였음. 이중 1만 명 가까이가 한인(중국인)을 징발해 쓰는 노역자들이었기에 실제 전투병은 3만 명을 간신히 좀 넘었다고 보면 됨.


반면 조선은 비록 훈련도는 높지 않았지만 개전 후 총합 8만에서 10만('총융청'의 군사가 2만인데 얘들이 '속오군(향토예비군)'하고 병력이 일부 겹쳐서 구체적인 수치가 오락가락함)에 육박하는 대군을 편성하는 데 성공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 동원 체제가 어느 정도 확립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번숨쏴서 이긴 임진왜란과 반대로, 어지간하면 질 수가 없는 전쟁을 뻘짓으로 말아먹은 게 병자호란임.



침공 개시 당시 청은 50일치 식량밖에 없었고, 군영에는 천연두가 돌고 있었으며, 명과의 오랜 전쟁으로 본토까지 기근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뭐 자세한 건 다른 글에서 적기로 하고,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병자호란의 방향성을 바꿔놓을 수도 있었던 출병"에 대해 논하도록 하자.


영화 [남한산성] 등 미디어에서 묘사가 다소 부족해 현재까지도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당시 척화파 대신들은 단순히 명에 대한 의리만을 내세우는 명분론자가 아니라 분명하게 합리적인 판단이 있었음.


당시 오히려 청의 국력(당시 청의 실효인구는 60여만으로 700만을 초과하던 조선의 10%도 안 되었으며, 국토는 나름 넓었지만 그중 농경지는 제주도보다도 좁았음)을 객관적으로 파악, "지금 우리가 청에 굴복했다가 나중에 명이 청을 제압해 버리면 그땐 어쩔 것이냐?"가 기본적인 척화파의 논조였다고 하겠다.


물론 척화파 중에서도 좆병신은 있었으니 사극에서의 묘사가 아주 틀린 건 아님.


이 때문에 당시 척화파 대신들의 척화 논거는 "조금만 더 버티면 명에서 원군이 올 것이고, 그럼 임진왜란 때처럼 함께 청을 몰아낼 수도 있다"는 것도 분명 있었음.


그래서 그 잘난 명군이 왔느냐?


놀랍게도 왔다


그것도 임진왜란 때(약 4만 5천)보다도 많은 70,000여 명의 대군이 출병했다


저 7만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은 명나라의 금주(锦州, 진저우)인데, 만리장성의 관문 중 하나이기도 함.


당시 무주공산에 가까운 만주에서 활개치던 청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명의 제대로 된 요새 중 하나(이 외에도 산해관 등 연계된 요새가 몇 개 더 있음)


이곳 금주의 명군을 지휘하던 인물은 이 조대수(祖大壽)라는 사람으로,


6~7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2월 20일 출병, 무주공산이 된 요동을 치고 청의 본거지를 파괴하기로 작정했다.


근데 청과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던 삼자하(三叉河)라는 곳에 도달했더니, 그 부하 장수들이 다들 청나라군이 돌아올 것을 무서워해서 그냥 철수했다고 한다.


기록에는 부하 장수들이 무서워해서 돌아왔다고 되어 있긴 한데 정황상 이미 조선이 항복했고 청 주력군이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모양.



조선이 너무 빨리 무너져 버린 것이다.


구체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음.



[비가 옴. 고 태감이 도로 관상(關上)으로 갔다. 이곳에 와서 들으니,


“2월 20일쯤에 태감과 군문이 조 총병(祖摠兵)과 함께 관외(關外)의 철기(鐵騎) 6, 7만 명을 거느리고 삼차하(三叉河)를 건너갔다가, 오랑캐의 군사들이 보이지 않자 퇴각하여 3월 10일쯤에 진(鎭)으로 되돌아왔다.”


하였다. 이는 대개 조대수(祖大壽)의 아들이 포로가 되어 적중(賊中)에 있으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몰래 ‘오랑캐의 군사들이 동쪽으로 쳐들어갔으니 지금이 바로 빈틈을 타서 들이치기에 좋은 때이다.’ 라고 통보하였으므로, 조 총병이 단단히 마음먹고 군사를 진격시켰으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겁을 내어 논의가 일치되지 않은 탓에 마침내 돌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점심때 모인이 와서 보면서 말하기를,


“무대(撫臺)가 이미 용무영(龍武營)의 천총(千摠) 장성공(張成功)에게 맡겨서 병선 4척을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무대는 군문(軍門)을 이른다. 부 참장(傅參將)에게서 소식이 전혀 없는데, 내가 22일에 배를 타겠다고 일찍이 군문을 만나 보았을 때 말하였으므로, 이곳에서 장관(將官)을 차정해서 보낸 것이다.] - 조경일록 1637. 윤4. 18.






세줄 요약


1.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들은 명의 지원군이 오리라 믿었다

2. 실제로 7만 대군이 출병을 했다

3. 도착하기 전에 조선이 쳐발렸고, 명군은 오다 말고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