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는 독재자였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사실상 패배한 장제스는 대만 섬과 해남으로 국부천대를 감행했고, 그에겐 원대한 구상이 있었다.


 1년 동안 준비하여 2년에 대륙수복을 실시하고 3년에 모든 것을 소탕하여 5년에 성공시키는 것. 

 그것이 이 중화민국 총통의 계획이었다.


 장제스와 함께 국부천대를 한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대만은 다시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 중의 교두보에 불과했다.


 모든 것을 바꾼 것은 6.25 전쟁이었다. 1950년 5월 해남도를 점령한 중공군은 1950년 10월 대만 침공을 계획했으나, 김일성과 박헌영의 환장할 불놀이덕분에 대만 침공군을 한반도로 투입했다.


 6.25 전쟁은 대만이 함락될 위기를 막아주었으나, 그 대신 중공의 공산권내 발언권 확대와 국내 결속에 기여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중국 일통을 이뤄냈고, 이것은 장제스의 대륙수복이 이미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했지만.


 장제스는 대륙수복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대만에는 계엄령이 걸렸고, 국민당과 관제야당 외의 다른 정당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만 원주민들의 처우는 신경쓰지 않았고, 장제스는 대륙수복의 기치 아래 군대를 훈련시키면서


 초대, 2대, 3대..4대..5대..죽을 때까지 총통 자리에서 군림했다. 그의 유언은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동포를 구하라, 대륙을 다시 공격해서 중국을 구하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징궈는 독재자였다. 그리고 장제스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꿈이 허황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만의 많은 것을 바꿨다.


 대만에서 국민당의 평은 최악이었다. 독재 정권인 것도 모자라 대만인들을 천시하고 본토인을 우대하는...장제스 시대에 대만에서 두 종류의 계급이 있었다. 본토인과 대만 원주민.


 장징궈는 대륙을 수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대만인들과 본토인들의 관계회복을 위해 나섰다. 그는 스스로 대만인이라고 말하며 대만인들과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는 내정을 다지는 것에 주력했다.


  또한 마오쩌둥 이후 중국 주석이 된 덩샤오핑과 아주 오래 전부터 친구였던 것을 이용해 중국-대만 간의 관계 개선에도 나섰다.


 또한 미국의 지원과 경제 호황에 힘입어 나날이 성장하던 대만 경제를 지원했다. 그의 아버지가 그것에 관심없었던 것과는 다르게.


 또한 1986년, 국민당과 관제 야당들 외의,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진짜' 야당인 민진당의 창당을 수용했다. 당시 대만법상 민진당의 창당은 불법이었으며, 국민당의 간부들은 이 '반동분자'들의 명단을 장징궈에게 내면서 처벌하라 했지만


'권력을 사용하기는 쉽지만 권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은 어렵다'


라는 말을 하면서 민진당의 창설을 허용했고, 국민당 인사들이 이러면 우리 국민당이 권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하자,


'세상에 영원한 집권당은 없다.'


그것이 장징궈의 답이었다.


이후 그는 법을 수정하여 민진당의 창당을 합법화했다.



1987년, 장징궈는 대륙 수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했다.

그는 그 해에 중국-대만간 가족방문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한국에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바로 그 1987년에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계엄령을 해제시켰다.


1988년 그가 신문발행금지령을 철폐하고 죽었을 때 그의 친구인 덩샤오핑은 장징궈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3차 국공합작이 이뤄졌을 거라고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1988년에 천안문 사태가 벌어졌으니.




장징궈는 독재자였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독재를 포기한 독재자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막았다. 그것이 대만이 북한과 달라진 이유였다.


물론 난 좋은 독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장징궈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