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15일, 서울 서대문과 마포형무소 경비병들이 트럭에 
*재소자들을 싣고 와서 사살한 다음, 
미리 파둔 구덩이에 모조리 처넣어 집단 처형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헌데 바로 그 부근에 영국 육군 29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연히 
영국군은 한국인 경비병들이 재소자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이 사실을 영국 언론에 알려 문제제기를 했다.


(*당시 재소자들은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을 당했는데
이들은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에 의하여
단심재판 및 증거설명 생략을 적용받아추정만으로도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당시 사건 현장을 목격한 영국 육군 찰스 페리(Charles ferry) 일병과 
윌리엄 J 론 상병(William J. Lawn) 등의 증언에 따르면 

경비병들이 재소자들을 구덩이 속에 밀어 넣고는 총을 쏘았는데, 
미처 죽지 못한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가운데에서도 경비병들은 계속 총을 쏘아댔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본 80여 명의 영국군 병사들은 “도대체 우리가 한국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이유가 뭐야?”라고 탄식을 했으며, 
지독한 혐오감과 모멸감을 느낀 나머지 차마 아침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영국군 준위가 상부에 이 사건을 보고함으로써 홍제리 집단 처형 사건은 공론화되었다.


그리고 영국군 29여단 사령관은 자신의 주둔지에서 사건이 재발될 경우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도 추가 학살을 위해 한국 경비병들이 다른 재소자들을 이끌고 홍제리에 나타나자, 
영국군은 이에 반발하여 경비병들을 강제로 무장 해제시킨 후 처형용으로 파두었던 구덩이를 다시 메우게 했으며,


아직 살아있던 재소자들을 서울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아울러 학살이 벌어진 지 사흘 후인 
12월 18일에는 더 이상의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 영국군 소총 중대가 배치되었다.

(*즉 "이런 사건이 또 터질 경우 국군하고 교전해서라도 막겠다"는 뜻이다.)

이후 경찰이 민간인 학살을 시도하자 파견대를 지휘하는 영국군 장교가 이유가 무엇이든 당장 살상행위를 중단하라고 하자 
한국 경찰은 영국군 장교에게 총을 겨냥하는것으로 응답했다. 
이에 영국군도 착검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고 
결국 경찰이 학살을 포기하고 물러났기에 민간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