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자국내 경제 사정이 안좋아 지고 민주화 운동이 지속적 으로 일어 나자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당시 100년간 영국령으로 있던 근해섬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 한다.



포클랜드 제도에는 영국계 주민 1800명과 영국군 코만도 100명이 주둔 하고 있었으며 아르헨티나군은 지상군 4000명을 이끌고 포클랜드 제도를 전격적으로 침공 한다.



여기서 영국군 코만도는 아르헨티나군 16명을 사살 하며 저항 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포클랜드 제도는 아르헨티나에 점령 되었으며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국의 반응을 살핀다.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당시 경제난에 허덕 이고 그리고 정규 항공모함인 아크로열을 퇴역 시켜 이발 빠진 호랑이 라고 평가 받는 영국을 전쟁 상대로 정한다.


국제사회 역시 영국이 협상을 하고 섬을 주는것으로 보았지만 마거릿 대처 총리는 영국군에 포클랜도 제도 탈환을 명령 했으며 영국군은 군함 100여척, 허미즈.인빈시블 같은 경항모 2척과 해병여단과 코만도,공수여단등 총 28000명의 군대를 모아 지구 반바퀴 짜리 참교육 여정을 떠나러 간다.


영국의 경우 당시에 해외에 많은 영국령 섬을 보유 하고 있었기에 포클랜도 제도와 가까운 영국령 어센션, 세인트 헬레나 제도를 보급기지로 삼아 전쟁을 준비한다.





첫교전은 영국 해군 대잠 헬기가 포클랜드 제도 근해를 정찰 하던중 수상한 물체를 발견 하면서 시작 되니 바로 아르헨티나 해군의 잠수함 산타페 였다.


이에 영국 대잠 헬기 파일럿은 즉시 헬기에 장착된 시스크아 대함 미사일을 산타페에 발사 했으며 그결과 산타페는 대함 미사일을 맞고 근해에서 좌초가 되고 만다.


잠수함 산타페는 사우스 조지아섬에 지원할 아르헨티나군 병력 50명을 수송 하던중에 영국 해군 대잠 헬기에 걸리고 말았으며 결국 미사일 공격을 엊어 맞고 좌초 된다.



영국군은 사우스 조지아섬에 특수부대와 공수여단 병력을 상륙 시켰으며 아르헨티나군의 경우 결국 영국 해군 대잠헬기가 무서워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


그결과 영국군운 총한방 쏘지 않고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을 받아 내어 사우스 조지아섬을 무혈 탈환 했으며 사진처럼 다수의 아르헨티나군 포로들을 생포 한다.


사우스 조지아섬이 탈환 되자 마거릿 대처 총리는 하원에서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으며 영국군의 마지막 목표는 포클랜드 제도의 중심지 포트 스탠리 였다.




영국군은 포클랜드 제도를 공격 하기전 먼저 스탠리 공항을 먼저 무력화 하기로 결정해 영국령 어센션 제도에 주둔중인 영국 공군의 아브로 벌컨 폭격기를 이용한 공습을 시작 한다.


사실 시해리어 전투기로 공습을 하려 했지만 영국군 수뇌부에서 퇴역 직전의 아브로 벌컨 폭격기를 한번 사용 해보자는 의견이 대두 되어 어센션 제도에서 날아간 아브로 벌컨 폭격기가 스탠리 공항 활주로에 폭탄을 투하 한다.


공습의 결과는 신통치 않았 지만 의의로 아르헨티나군에 심리적 타격을 엄청 나게 주면서 아르헨티나군은 주력기인 스카이 호크와 미라주 전투기를 본토로 귀향 시켜 버리는 최악의 결정을 내린다.









영국 해군이 포클랜드 제도 방면 아르헨티나군에 함포 사격을 가하기 시작 하자 아르헨티나 공군은 대거, 스카이 호크 전투기를 동원해 영국 해군 함정들을 공격 하기 시작 한다.


그런데 이때 영국 공군의 시해리어 이착륙기 편대가 아르헨티나 공군을 기습적으로 덥치 면서 공중전이 시작 되는데 사실 영국 공군의 시해리어 이차륙기의 경우 경항모에 수송 하기 위해 무장을 상당히 제한 한체 출격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바로 미국이 지원 해준 사이드 와인더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로 시해리어는 아르헨티나 공군 전투기들에 사이드 와인더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이들을 격추 시켜 버렸으며 공중전에서 시해리어는 단 한대도 격추 되지 않은 반면 아르헨티나 공군은 시해리어 와의 공중전에서 24대의 전투기들을 손실 하게 되며 제공권을 영국 공군에게 내주게 된다.





전투가 진행 되던중 영국 해군의 핵잠수함 컨커러는 심해를 정찰 하던 도중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재너럴 벨그라노가 영국 해군 함대를 쌈싸 먹으려는 시도를 보게 된다.


즉시 이를 상부에 보고 했으며 마커릿 대처 총리는 컨커러의 함장에게 재너널 벨그라노를 격침 시킬것을 명령 했으며 핵잠수함 컨커러는 즉시 타이거 피쉬 어뢰를 벨그라노에 발사 한다.


그결과 아르헨티나 해군의 순양함 재너럴 벨그라노는 즉시 침몰 되었으며 아르헨티나 해군 수병 300명이 사망 하고 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해군은 영국 해군의 핵잠수함의 위력을 무서 워해 모든 함정들을 출항을 금지 시켰으며 영국 해군의 경우 포클랜도 제도의 재해권을 장악 하는데 성공 한다.




영국군도 아르헨티나군에게 역습을 맞게 되는데 바로 영국 해군 42형 구축함인 HMS 셰필드가 아르헨티나 공군 쉬페르 에탕다르 전투기에서 발사한 엑조세 미사일에 피격 되어 침몰 하는 사건이 벌어 진것 이다.


HMS 셰필드가 피격 되면서 영국 해군 수병 13명이 현장에서 즉사 하고 함정은 침몰 했으며 침몰 영상이 영국 국민들에게 방영 되는 참사가 일어 나고 만다.


문제는 아르헨티나군은 본인들이 HMS 셰필드를 격침 시킨것을 몰랐으며 영국 방송을 보고 서야 셰필드의 격침을 알았 는데 문제는 이미 영국 지상군이 포클랜드 제도에 상률 했다는 점이 었다.






영국군은 공수여단, 해병여단과 구르카 대대를 포함한 지상 병력을 산카를로스에 상륙 시켰으며 포트 스탠리로 가기 위한 통로들인 구스 그린과 다윈에서 아르헨티나 지상군과 전투를 벌인다.


구스 그린에서 영국군 제 2 공수 대대는 아르헨티나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대대장인 존스 중령을 비롯해 18명이 전사 했지만 아르헨티타군 45명을 사살 하는 동시에 961명을 생포 한다.


구스 그린 전투에 참가한 영국군 제 2 공수 대대 병력 600명 구스 그린을 방어 하던 아르헨티나 방어군이 1400명으로 무려 961명이 생포 되었으며 영국군이 제대로 된 지상전을 벌인 전투는 구스 그린 전투가 다였다.







영국군이 오자 아르헨티나군 병사 들의 경우 도주 하기 시작 했으며 또한 영국군이 구르카 병들을 데리고 섬에 들어 오자 구르카 병들을 두려워 해 저렇게 군장비르 버리고 도주 하거나 항복 했다.


구르카 병들은 이러한 아르헨티나군의 태도에 상당히 기분이 나쁜 반응을 보였 으며 구르카 대대으 경우 하도 아르헨티나군이 항복 하는 경우가 많아 본인들 무기인 쿠크리를 한번고 꺼내지 않았다.


그결과 영국군은 구스 그린, 다윈 전투 이후 쭉죽 포클랜드 제도의 중심지 포트 스탠리로 진군 했으며 마침내 포트 스탠리에서 아르헨티나 지상군 1만명과 조우 한다.






영국군은 해병,공수 여단 그리고 코만도 대대를 비롯한 지상 병력 4500명을 포트 스탠리로 진군 시켰으며 아르헨티나 지상군 10000명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루게 된다.


하지만 영국군의 전투력에 결국 아르헨티나군이 항복 하면서 포트 스탠리가 영국군에 의해 탈환 되어 시가지에 유니온 잭이 게양 되며 3개월 간 펼쳐진 포클랜드 전쟁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영국군 지휘부는 포클랜드 제도는 주민들이 원하는 국가에 의해 통치 될것 이라는 전문을 영국 본토에 남겼 으며 여왕 폐하를 보호 하소소 라는 고전적인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영국군 전사자 258명 아르헨타군 전사자 669명 영국군의 경우 3개월 간의 단기전으로 전쟁에서 승리 했으며 아직 대영제국이 죽지 않았음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아르헨티나군의 경우 669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그나마 전사자가 적은 이유는 지상전이 시작 되자 전투를 하기전 거의 대부분의 병사들이 영국군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 이다.


영국군이 생포한 아르헨티나군 포로들이 10000명 이상으로 당시 섬에 상륙한 영국군의 규모가 4500명임을 감안 하면 사실상 거의 대부분 항복 한거나 마찬 가지 이다.





영국 국민들의 경우 영국군이 남미 군사 강국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승전을 하자 대영제국이 아직 죽지 않았 다며 환호성을 질렀 으며 나라안이 완전히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마커릿 대처 총리는 다시 재선에 성공 하며 11년 동안 영국의 총리로 재직 하며 영국병을 자신의 방식 대로 고치 는데 성공 한다.


다만 엘리자베스 여왕 과는 사이가 멀어 지는데 이유는 대처 총리가 여왕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를 전쟁에 참전 시켰기 때문으로 앤드류 왕자의 경우 하마 터면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으로 전사 할뻔한 순간이 굉장히 많았다.


대처 총리 역시 사람 인지라 전사자 258명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위로의 편지를 작성 했으며 자신의 휴가를 반납 하면서 까지 위로 편지를 일일히 작성 했다.





갈티에리 정권의 경우 승전 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이게 국민들게 걸리는 바람에 결국 정권을 내놓고 퇴진을 했으며 결국 그해 전쟁의 패전으로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리고 알폰신을 위시로 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 선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전쟁의 패전의 영향을 다이렉트로 받아 남미의 패권을 브라질에게 넘겨 주었으며 지금도 그영향을 받고 있는 실정인데 경제 위기 까지 다이렉트로 받게 된다.


영국의 경우 서방세계가 아르헨티나에 무기를 판매 하는것을 금지 시켜 버리면서 아르헨티나군 현대화를 아예 막아 버리고 있으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