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부자관계를 자랑한 왕들이 있으니 바로 부왕 샤를 7세와 아들 루이 11세로 이들은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부자관계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이유는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선조와 같은 성향을 띠게 된것으로 사실 루이 11세의 경우 샤를 7세가 견제하는 세력들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루이 11세는 황태자 시절 아버지의 정부에게 칼을 휘두를 정도로 아버지와 사이가 최악이었지만 아버지의 병크로 인해 돌이킬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루이 11세의 경우 왕자시절 부터 아버지 샤를 7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오죽하면 아버지의 정부에게 칼을 휘두를 정도로 부왕과 사이가 최악으로 좋지 않았다.


다만 어린왕자에게 유일한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의 구국영웅 이자 오를레앙의 성녀 잔다르크로 루이 11세는 왕자시절  잔다르크를 만났으며 오를레앙의 성녀는 외로운 왕자의 유일한 친구가 되주었다.


잔다르크는 샤를 7세의 충직한 신하이자 아버지와 사이가 최악이던 루이 11세의 유일한 친구로 루이 11세는 잔다르크에게 프랑스를 구해준것을 늘 고맙게 여겼다고 한다.


사실 샤를 7세의 경우 잔다르크 덕분에 왕위에 오를수 있었으며 오늘날 프랑스 충무공으로 추앙받는 프랑스 국민영웅이자 황태자의 유일한 친구중 하나였다.




루이 11세와 샤를 7세가 강을 건널수 없는 사이가 된건 바로 샤를 7세의 토사구팽으로 새를 7세의 경우 잔다르크가 연전연승을 하자 슬슬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잔다르크에게 병력을 조금만 보내주거나 아니면 일부러 경계를 했는데 마치 선조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경계한것과 마찬가지로 잔다르크가 친영국파 귀족에게 잡히자 바로 잔다르크를 버려 버린다.


그결과 잔다르크는 영국군에게 잡혀 마녀재판으로 화형을 당했으며 그걸보고 제일 충격을 받은건 황태자 루이 11세로 자신의 유일한 친구 이자 충직한 신하를 저런식으로 토사구팽한 부왕의 행각에 충격을 받고만다.


부왕에 대한 혐오심이 극에 달해 루이 11세는 샤를 7세를 아버지가 아닌 인간 쓰레기로 보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샤를7세와 루이 11세 사이의 사이는 요단강을 건너고 만다.





1441년 루이 11세는 부왕에게 불만이 많은 귀족들을 선동해 부왕 샤를 7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니 바로 프라그라의 난으로 반란이 진압되자 17년동안 부왕에게 유배를 당한다.


유배가 풀린뒤에도 역모에 가담하며 부왕 샤를 7세를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으며 샤를 7세의 유일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부왕을 만나지 않았다.


즉 잔다라크 사건은 안그래도 사이가 좋지않은 부자사이레 기름을 부은 하나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말았으며 루이11세는 잔다르크를 버린 부왕과 부왕의 친위세력을 없애버릴 기회만을 노린다.





1461년 부왕 샤를 7세가 죽자 루이 11세는 프랑스의 왕으로 등극 했으며 왕이 되자마자 부왕의 측근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잔다르크 죽음의 원인중 하나인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 시키는 왕권강화정책을 핀다.


우선 영국의 요크왕조의 초대왕인 에드워드 4세와 강화를 맺어 100년 전쟁을 종식 시키는 동시에 제후들의 우두머리 격인 용담공 샤를 1세가 스위스 용병의 공격으로 죽자 바로 제후들에 대한 공세에 나선다.


1480년 친영국파 제후들을 모두 제압했으며 그후 우편제도 창설,민병제도의 확충,상공업을 육성 시키며 프랑스 절대왕권의 기초를 닦는 명군으로 성장한다.



 루이 11세는 자신의 둘째딸에게 잔다르크의 성인 잔을 붙여주며 자신의 친구를 기렸는데 루이 11세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늘 잔다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잔다르크를 만난순간과 잔다르크가 프랑스에서 세웠던 공적등 여러가지를 자식들에게 말해 주었으며 평생동안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오를레앙의 성녀를 그리워 했다고 한다.



애초에 친영국파 제후들을 부순것 자체가 잔다르크가 친영국파 영주들게 잡혀 죽은 동시에 중앙정부가 힘이 약해 제후들을 통제하지 못해 생긴일로 간주해 일생 동안 제후들을 제압하는 동시에 중앙집권정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