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대한민국에서 역적이 되고 아내는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사례가 있으니 바로 박헌형, 주세죽 부부로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이다.


박헌영은 대한민국의 금지어급 인물이지만 아내인 주세죽은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로 2007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들의 유일한 딸인 박 비비안나씨가 어머니의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령 했으며 어머니의 묘소에 대한민국 정부가 추서한 건국훈장 애족장을 내려놓기도 했다.





박헌영,주세죽 부부는 일제강점시 시절 행적만 보면 까일게 없는 독립운동가로 주세죽과 박헌영 모두 3.1운동에 참여 했으며 주세죽은 그후 신흥청년동맹,조선여성동우회 같은 항일운동단체에 가입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26년에는 6.10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1927년에는 여성 항일운동 단체인 근우회에 가입 했는데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블라디보스톡으로 남편 박헌영과 함께 망명한다.


박헌영 역시 1921년 중국 상하이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1933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1939년 석방 되었으며 그후 1941년 일본경찰의 추적을 집요하게 받은 독립운동가였다.




박헌영과 주세죽 부부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벌어지니 바로 광복후 박헌영이 김일성이 있는 북한으로 월북을 하는 일이 벌어진것으로 당시 박헌영은 미군정의 수배를 피해 김일성에게 합류한다.


그후 북한의 부수상이 되어 한국전쟁의 원흉이 되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원수가 되었으며 그후에도 북한정권의 핵심으로 활약하는데 박헌영은 제일 먼저 남침을 주장한 인물중 하나이다.


다만 박헌영을 견제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어 1953년 김일성에 의해 처형 되었으며 박헌영은 자식들만이라도 살려달라고 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의 유언을 들어주지 않았다.




박헌영의 전부인인 주세죽 역시 1945년 광복이 되자 전남편인 박헌영이 있는 북한으로 딸과 함께 가려고 했으나 어쩌면 주세죽에게 다행인일이 벌어지고 만다.


바로 당시 소련의 실권자인 스탈린이 주세죽의 북한입국을 막은것으로 주세죽은 북한에 가지 못하는 동시에 이때 병에 걸리면서 평생을 소련에서 살게된다.


1953년 모스크바 역에서 딸을 보려다 결국 딸인 박비비안나를 보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으며 참고로 이때 전남편인 박헌영도 김일성에 숙청되어 사망하고 만다.


 



박헌영과 주세죽 부부의 딸인 박 비비안나씨는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공산주의를 혐오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주세죽이 소련에서 사망하게 된건 결과적으로 신의한수가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북한정권에 참여하지 않은게 되어 독립 유공자 심사를 통과하게 된것으로 박 비비안나씨는 1992년 모친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에 입국해 아버지 박헌영의 고향을 방문했다.


2007년 모친인 주세죽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어 주한 러시아 대사관을 방문해 모친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그날 이떄 씁슬한 말을 한다.


어머니는 러시아 땅에서 죽어 고국으로 부터 훈장도 받고 독립 유공자로 인정이라도 받았지만 아버지는 월북을 하는 바람에 너무 비참하게 죽어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아버지에 비하면 어머니는 편안하게 가신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