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금전쟁

호라즘원정이나 남송원정에 밀려 비교적으로 잘 알려져있지 않다.




몽골제국과 여진족의 금(金)조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무려 23년간 진행되었음.






라시드 알 딘 하마다니의 야호령 전투 기록화




1211년, 칭기즈칸은 금 해릉양왕에게 처형당한 암바가이 칸(汗)의 복수를 이유로 10만의 기병으로 금나라를 침공하였다.

몽골군은 2만명 가량의 피해가있었으나 오사보, 야호령에서 30만 군대를 격파, 회하보에서 금의 패잔병들을 쓸어버리며 금나라를 단숨에 압박했다.




당시 금나라의 중갑병.






화친을 맺은 이후 몽골의 주력군이 서역을 정벌함에 따라 잘라이르 씨족의 무칼리가 2만의 몽골인 군대+ 6만가량의

타민족 군대로 재침공, 산둥일대와 당시 금의 수도였던 개봉근처 대부분을 점령했다.

또한 1215년 무칼리가 20만의 금군을 격파, 요하강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남쪽의 송나라를 공격하는데 힘을 낭비하였고 결과적으로 송나라또한 적으로 돌리게되어 그동안 받던 세폐또한 끊기게 되었다.



1227년, 금나라가 몽골의 사자를 죽임에 따라 2대칸이였던 오고타이칸은 금원정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금나라는 1229년 대창원(현 칭양시)에서 몽골 군대를 격파하고,  1231년 도회곡(현 상시성 일대)에서 오고타이, 툴루이, 수부타이의 군대를 격파화하는등 변화의 징조를 보였다.




하지만 1232년 2월 9일 삼봉산(현 쉬창시)에서

개봉을 구원하러 가는 금군 15만(총사령관 이랄포아)이 오고타이와 툴루이가 이끄는 기병 5만에게 기습당해 주력군이 사실상 궤멸됨에 따라 금나라는 더이상 저항을 이어나갈수없었다.

(금군 총사령관 이랄포아는 참수)




이후 당시 수도였던 개봉이 몽골뿐만이 아니라 몽골과 동맹을 맺은 송나라에게까지 위협당하자  

금황제는 채주(현 주마뎬 시)로 도망쳤으나 

끝내 채주가 함락됨에 따라 금조 9대황제 애종의 시체가 불타고 두개골이 갈라져 송나라로 보내졌고, 1234년 2월 9일 애종으로부터

황위를 양도받은 완안승린(完顔承麟) 금말제역시

양도받아 황제로 즉위한지 하루만에 몽골군에게 참수당하여 효수되었다.


이로서 금나라는 10대 119년만에 멸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