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친 중에 신이 없으면서 상식적이고 예의 바르면서 신들에게 감사 인사 잘 드리고 주변인들 중 신에게 원한 산 인물까지 없어야 함


고대-용역깡패들에 이름만 좀 번지르르하게 붙여준 수준이 평균이던 그리스 영웅들답게 이 조건을 맞추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단 한 사람, 저 조건을 모두 만족해서 영웅으로 불렸음에도 천수를 누리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페르세우스





고대 그리스의 아르고스에는 아크리시오스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음


그는 꽤 나이가 있었음에도 외동딸 다나에만을 슬하에 두었고 아들을 갖지 못하자 크게 아쉬워하며 델피로 가서 아들을 얻을 방법에 대해 신탁을 받고자 했는데, 오라클에게 신탁을 청하였을 때 그가 들은 답은 충격적인 것이었음


'그대는 앞으로 영영 아들을 가질 수 없을 것이요, 딸이 낳은 외손자에 의해 살해당하게 될 것이다'


이 끔찍하고 손발이 덜덜 떨리는 신탁을 들은 아크리시오스는 곧장 아르고스로 돌아와 다나에를 성탑 안에 가두어 그 안에서만 지낼 수 있게 하지만 이미 다나에는 제우스의 눈길을 받고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이 늘 방법을 찾는 제우스는 황금으로 이뤄진 빗줄기로 변해 성탑 안으로 들어가 다나에와 관계를 맺고 그로 인하여 태어난 것이 페르세우스...라는 것이 흔히 알려진 전승임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실상은 좀 더 딥다크한 것이었으니, 아크리시오스에게는 프로이토스라는 이름의 동생이 있었음


그는 아르고스의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것 때문에 형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었고, 아크리시오스가 받은 예언에 대해 전해듣자 외손자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복수하기 위해서 한밤중에 아크리시오스의 행세를 하며 조카 다나에를 겁탈하였음


딸이 자신인 척한 동생과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크리시오스는 진실이 어찌 되었든 간에 생긴 오점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다나에를 안전한 곳에 유폐해두기로 하였고 다나에는 그렇게 갇힌 성탑 안에서 페르세우스를 낳게 된 것*


*이 점 때문에 흔히 제우스의 사생아들에게 지랄하고 시련을 내리던 가정의 여신 헤라가 페르세우스를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후원한 거라고 함, 제우스의 사생아가 아니라 종조부의 같잖은 탐욕으로 인해 태어난 가정 파괴의 피해자니까



아무튼 페르세우스는 태어났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은 아크리시오스는 다나에에게 아이의 정체를 물어 제우스의 아들(고대 그리스에서 사생아를 뜻하는 은어)이라는 답을 듣게 됨


동생이 딸을 겁간한 뒤로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아크리시오스는 동시에 외손자가 자신을 죽인다는 예언을 떠올려 공포에 질렸고, 예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나무상자 안에 가두고 바다에 흘려보낸다는 끔찍한 결정을 내림*


그렇게 원래대로라면 두 모자는 바다를 떠다니다 파도에 집어삼켜질 운명이었지만, 이 모자의 사연을 가엾게 여긴 포세이돈이 파도를 잠잠하게 만들어 주었기에** 나무상자는 평안하게 세리포스 섬까지 흘러가게 됨


*바다에 흘려보낸 이유는 자신이 직접 죽이면 존속살해로 천벌을 받을까봐 겁이 나서 그런 것

**제우스가 가엾게 여겨 포세이돈에게 해역 통제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고도 함



어느 날, 세리포스 섬의 서쪽 해안에 살며 어부 일을 하던 딕티스라는 남자는 바다에 웬 커다란 나무 궤짝이 떠밀려오는 것을 보게 됨


사람 두 명은 너끈히 들어갈 만한 상자가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직진으로 스르륵 미끄러져오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긴 딕티스는 상자를 건져올려 열어보았다가 한 여인과 아이가 갇혀있던 것을 발견했고, 딕티스에게 구조받은 페르세우스 모자는 딕티스와 그 아내 클리메네의 돌봄에 빠르게 건강을 회복함


딕티스는 왕족이었지만 왕위에 관심이 없어 순순히 왕위 경쟁에서 물러나 어부 일을 하고 사는 인물*이었고, 부부가 쌍으로 마음씨 좋고 소탈한 인물들이었던 덕에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는 식객으로 세들어 살면서도 친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으며 페르세우스는 딕티스를 친아버지처럼 여기며 올바르게 성장해 딕티스와 함께 어부 일을 하게 됨


*옛날에는 신선한 생선이 쉽게 구하기 어려웠던 특성상 어부들이 은근히 부유한 경우가 많았음, 포르투갈의 경우 국책 사업으로 참치 어업을 하다 대항해시대를 열었을 정도이니 고대 그리스에서 왕위 포기한 왕족이 어부 일 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고



그리고 페르세우스가 성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평화로운 생활에 지장이 생기게 되니 딕티스의 형인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테스가 동생 집에 놀러 왔다가 다나에를 보고 반하게 된 것임


폴리덱테스는 곧장 다나에를 신부로 들이고 싶었지만* 그 옆에는 페르세우스가 자기 엄마를 첩으로 데려가는 건 절대 못 본다며 버티고 있었고, 그런 페르세우스를 떼어놓기 위해 폴리덱테스는 자신의 결혼 선물**로 자신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갖다 바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됨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고 해도 어쨌든 왕명은 왕명이라 페르세우스는 그대로 메두사를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남


*폴리덱테스는 이미 피사의 공주 히포다메이아와의 혼약이 잡혀있는 상태였기에 다나에를 측실, 그러니까 첩으로 들이고자 하였음

**고대 그리스에서 왕의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하는 이들은 왕에게 말 한 마리씩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페르세우스는 식객이다 보니 왕에게 결혼식 선물로 말을 바칠 수 없었음, 이에 대신 다른 선물을 구해달라고 요구한 것



한 인간 영웅이 메두사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이 올림포스에 전해지자, 신들은 석화 빔으로 출몰지 일대를 싸그리 초토화시키며 문제를 일으키던 그 골칫덩이*를 처단한다는 용감한 자를 후원해주기로 결정함


그렇게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전령신 헤르메스가 길을 가던 페르세우스에게 찾아갔고, 그들은 놀라지도 않고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예의바른 청년에게 신들이 하사하는 선물을 전달해줌


아테나는 자신이 사용하던 뒷면이 흐릿한 거울처럼 비춰지는 방패 아이기스를 선물해주었고, 헤르메스는 자신이 전령 일을 할 때 신는 비행신발 탈라리아를 선물해주었으며, 아레스는 강력한 적을 벨 때 꺼내드는 강철 낫 하르페를 내어줌


하데스는 착용자에게 그림자와 하나가 되는 능력을 주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투구 퀴네에를 주었고, 헤라는 석화 능력은 기본에 머리카락이 뱀이라 어지간한 주머니는 산산조각 내놓을 수 있는 메두사의 머리를 담을 수 있게 키비시스라는 마법 주머니를 줌


그렇게 그리스 최고의 템빨영웅이 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 사냥을 떠나게 되고...


*메두사가 아테나 신전 근처에서 포세이돈과 정을 통하고 난 뒤 저주로 괴물이 되었던 관계로 올림포스 근처가 초토화되는 상황이었음(근데 원흉인 그남충 포세이돈은 자기 영역 아니라고 알빠노를 시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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