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는 300년 사직을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오삼계가 산해관의 문을 열면서 마침내 청나라군대는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군대와 함께 이자성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여진족은 400년만에 다시한번 중국의 화북을 차지한다.

하지만 아직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한게 아니였다.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나라는 망했지만 남은 명나라 관료들과 황족들이 강남으로 피신해서 여전히 청나라에 저항하고 있었고 여전히

청나라는 화북지역만 차지했을뿐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강남지역은 남명이 차지하고 있었다.


(1644년 청나라에 북경을 점령하고 화북일대를 장악했을때 세력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문제는 남명은 그런 남명을 하나로 단결해서 청나라에 싸울수 있는 구심점이 없다는 것으로 

남명은 눈앞에 청나라가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후계자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서 자기들끼리 서로 각각 다른 황제를

옹립해서 서로 싸우고 있는 상황이였다.

청나라는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북지역을 장악한후 빠르게 화북지역을 안정화시킨이후 곧바로 친왕 도도를 총사령관

으로하는 13만이 넘는 대군을 파견하고 제대로 된 구심점이 없는 남명의 도시들은 청나라의 대군앞에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했고

청나라의 대군은 전투없이 무혈입성으로 빠르게 남명의 도시들을 점령하며 남명의 수도 난징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그때 청나라에 발복을 잡으며 저항하고 있는 도시가 있었으니 그 도시가 바로 양주다.

양주는 바로 남명의 수도 난징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고 양주가 함락당하면 그대로 남명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잘알고 있었는 남명의 마지막 충신인 병부상서 사가법은 항복하라는 도도의 요구에도 거부하고 결사항전으로 싸우는 쪽을 택하였고 결국 13만에 달하는 청나라의 대군이 남명을 공격했고 그렇게 명청교체기 당시 가장 치열했던 공성전이 펼쳐졌다.  9일동안의 치열한 혈전끝에 청나라의 군대가 성벽밑에 땅굴을 파서 성벽밑에 거대한 폭약을 집어넣고 성벽을 폭파시켜서 마침내 양주성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청나라군대는 양주성을 점령하고 사가법은 청나라군에게 포로로 붙잡여서 처형당한다.

9일동안의 치열한 공성전으로 청나라군은 수천명에 달하는 전사자와 1만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당시 중국에서의 경험을 목격한 이탈리아 선교사 마르티노 마르티니가 쓴 달단전기에는 양주성을 공격하던 도중 청나라 황족중 한명이 양주수비군의 공격을 받고 죽었으며(버이서급의 황족으로 추측된다.) 그밖에 수천명에 달하는 청나라의 군대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가 개국한이후 이렇게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적은 없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군대는 자신들의 피해에 분노했고 총사령관 도도는 이에 모든 양주성 주민들을 도육하라는 도육명을 내리고 이에 그동안 남명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약탈을 하지 못했던 청나라의 군대는 양주성에서 무차별적인 살인,약탈,강간 , 학살을 자행하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양주대학살이다.

(양주10일기 삽화)


당시 양주대학살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작성했다는 왕수초의 양주10일기에는 청나라군이 양주성내에서 7일동안 무차별적인 약탈과 강간 학살을 자행했으며 그렇게 죽은 양주성의 주민이 무려 80만명에 달했다고 적혀있으며 마르티노 마르티니가 쓴 달단전기에는 도시전체가 약탈당하고 성안에 군민들이 거의다 죽임을 당했으며 청나라군은 양주성의 주민들의 시체가 너무많아 성안에 역병이 퍼질것을 염려해서 죽은 양주성 주민들의 집위에 시체를 산처럼 쌓고 도시를 불태워 잿더미를 만들고 양주성을 폐허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주십일기로 인해서 오랫동안 청나라의 군사가 양주성을 점령하고 80만명에 달하는 양주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전해졌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러한 수치들에 의문점들이 제기되어 왔다. 

중국역사가 장더팡은 양주십일기에 나오는 사망자수의 의문을 제시하면서 당시 양주 근처 인구여러 마을의 보고에 의하면

양주지역 전체인구는 79000가구 , 즉 50만명 정도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근대 시대당시 100만명이라고 알려진 도시들은 상당수

인구가 과장되게 알려진 도시들이 많다.(대표적으로 통일신라시대 경주역시 100만명에 달하는 대도시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경주가 그시대에 100만명이 거주할수 있을만큼 그렇게 넓지도 않았고 또한 경주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비해 대우가 높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 중에서도 경주에 거주한다고 가짜로 보고하는 경우가 많아서 실제로 경주인구는 100만명보다 훨씬더 작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청나라군이 공격해오자 양주성으로 몰려들었는 최대 인원은 20만~30만명이라고 지적했다.

장더팡이 그렇게 지적한 이유로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번째로 관련 기록에 따르면 많은 주민들이 양주성으로 피난갈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이며 두번째로는 주민들이 적군을 피해 

대량으로 성안으로 몰려들려면 도시에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가 있으며 주변에 언덕이 많아서 방어하기 매우 유용한 지역이여야 하며 또한 성안에 적에 저항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가 성안에 주둔해있어야 하는 두가지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데 일단 양주성은 주변이 평원으로 둘러싸인 평지성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딱히 아니며 양주성안에 있는 주둔군도 불과 만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양주성안으로 몰려들었다는 점은 믿기 힘들며 세번째로는 청나라군이 양주성에 도착하기 하루전 양주성

주민들이 관문을 끓고 탈출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오히려 청나라군이 양주성을 공격하기 전에 양주성에 주민수가 늘어난게 아니라

오히려 성을 탈출하는 자들이 늘어났으며 네번째 이유로는 양주십일기에도 청나라군이 성을 학살하고 7일뒤에 구호품을 내보내자 구호품을 앞다투어 받아가는 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구호품이 전부다 없어졌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는 학살뒤에도 살아있는 양주성 주민들이 많았다는 묘사로 이는 양주십일기서 말하는 청나라군이 거의모든 양주성 주민들을 전부다 학살했다는  내용들과 반대되는 묘사라는 점(즉 청나라군이 양주성 주민들을 거의다 학살했다는 양주십일기의 주장은 양주십일기 내에서도 모순이 되는 주장이라는 것.)마지막 5번째로는 보통 시신 한명을 태우려면 약 100kg의 나무가 필요한데 80만개의 시신을 전부다 태울려면 무려  8만톤의 나무가 필요한데 당시 기술로는 그정도로 많은 대량의 나무들을 청나라군이 양주성안으로 옮길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호주의 동아시아사 박사인 안토니오 핀네인 역시 양주십일기에 기록된 80만명의 수치는 상당히 과장된 수치로 명청교체기

당시 사상자 수치는 대게 신뢰할수 없는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지적하며 이는 학살의 공포에 대한 진술로 실제보다 상당수 부풀러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양주대학살당시 양주성내의 주민들은 최대 20만에 30만명 사이로 추정되며 최대 당시 양주성 주민 전체 인구의 80%인 16만명에서 24만명 사이에 주민들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