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찾아와 해가 산을 넘어 세상을 비추자 거리엔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신씨 가문의 자제인 유민은 그저 새의 지저귐과 연못의 물소리만으로 세상을 그려야 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오도카니 누워있는 지팡이를 짚어들고는 바닥을 몇 차례 내려치니 방 밖에서 사람 둘 정도가 들어와 옷을 갈아입혀주고 그의 꼭 감긴 눈에 안대를 감아주었다.


 유민은 지팡이를 짚으며 자신의 방을 나섰다. 일정한 간격으로 귀를 때리는 지팡이의 투박한 소리는 부엌에서 타오르는 장작의 소리, 마당에 쌓인 낙엽을 누군가가 쓸어 담는 소리,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삐걱대는 소리와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의 말소리를 만나 하나의 곡조가 되어 그의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비록 그는 이 세상은커녕 자신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지만 그만큼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기에 행복했다.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유민은 산책을 나섰다. 마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었기에 그는 산책 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시끌벅적한 시장 속 인파의 북적임을 즐기던 그는 갑자기 어느 한 가게에 발을 들였다. 그곳에 가게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어째서 그곳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으나 반드시 그래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그를 휘감았다.


 그 순간 유민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들려오던 모든 소리들이 사라졌다. 거리를 가득 채우던 상인들의 목소리도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던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도 국밥집에서 흘러나오던 정겨운 수다 소리도 마치 안개에 덮인 듯 들리지 않았다. 오직 희미한 곰방대의 냄새만이 그의 코를 찌를 뿐이었으며 마치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고조된 긴장감 속 예상하지 못한 다른 이의 접촉에 화들짝 놀란 그는 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층 더 심해진 곰방대의 냄새 속에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시오, 비극 속의 젊은이여. 본인은 인간의 좌절, 즉 패망을 먹어치우는 귀신라는 이름의 식망귀라 하오. 금일 본인의 가게엔 어떠한 사정으로 발걸음해 주셨는지 들려주실 수 있겠소?.”


 순간 당황한 유민이었으나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친 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하하. 송구하오나. 소인, 눈이 조금 좋지 않아 길을 잘못 든 듯합니다. 다음에 연이 닿는다면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유민이 능청스럽게 말하며 출구를 찾으려 하자 식망귀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이것 참 뻔뻔한 젊은이 구려 그래! 그러지 말고 본인과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눠 보세 그대의 좌절을 먹어드리지! 그대에게도 해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야!”


평생을 시각없이 살아온 유민은 그의 목소리와 말투에 은은하게 배어있는 교활함과 거짓됨을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였다면 필히 몰랐을 것이다.


“소인은 짧은 생을 살았습니다만 이승에 이 한 몸담았던 시간 속 단 한 번도 좌절이나 절망을 느껴본 적 없기에 제안은 감사하오나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는듯합니다.”


유민의 단호한 말투에 식망귀는 시비 거는 투로 말했다.


“진심으로 그 빌어먹게 불행한 눈을 갖고도 그리 말할 수 있소?”


퍽 공격적인 말투에 적잖은 불쾌감을 느낀 유민였지만 침착함을 잃을 정도는 아니였기에 그는 자신이 진심으로 생각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었다.


“소인은 소인의 눈이 불행하다 생각지 않습니다. 이 눈은 남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을 저에게 선물해 주기 때문이죠. 오히려 소인은 이것이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식망귀는 유민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듯했다.


“허허 어리석은 젊은이여 그러지 말고 내 제안이라도 한 번 하게 해주시오. 말하지 않았소, 이것은 그대에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라.”


 여전히 식망귀의 말에선 거짓됨이 섞여 들려왔기에 유민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출구를 찾았다. 그러자 식망귀의 얼굴이 매우 화가 난 듯 일그러졌다가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예의 없는 젊은이여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소. 그대의 욕망은 무슨 맛이 나는지 내 알아봐야겠소. 본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용서 해주길 빌겠소. 그럼 부디 좋은 꿈 꾸시길.”


그 순간 만큼은 그의 목소리에 거짓 한 점 없었다.


“욕망…?”


그 말을 끝으로 곰방대의 냄새는 사라졌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그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왔고 유민의 안대를 부드럽게 벗겨 땅에 떨궜다. 비로소 그의 눈에 진짜 세상이 담겼다. 소리 하나만으로도 가득 채워져있던 그의 세상은 비로소 실체가 생기고 색이 덧씌워져 결국 넘쳐났다. 그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그렇게 유민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를 비추는 세상을 비췄다.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 각기 다른 모습의 가게, 그곳에서 팔고 있는 음식, 날아가는 새와 그 뒤를 따르는 연, 그리고 자신의 손. 그가 축복이라 생각하던 뛰어난 청각과 후각은 시각을 만나 비로소 완전해졌다. 그곳에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세심히 가슴속에 새긴 뒤 그는 천천히 발을 때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그는 자신의 집 마당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낯선 얼굴이었으나 그것은 그의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그 순간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내 다시는 눈을 감고 싶지 않소.”


그 순간 유민의 코에 익숙한 곰방대의 향기가 스쳤다.




"바로 그거요! 훌륭한 욕망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