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주인공을 죽였다. 이유는 별 것도 아니었다. 그럴 만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의미도 없는 텍스트의 나열과 끝없이 침잠하는 분위기를 억지로 환기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란 내 소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몸부림을 그만두었다. 비루먹듯 썩어든 눈깔은 제 놈의 버릇을 채 고치지 못해 조회수를 향한다. 84, 가장 높은 수. 1, 방금 올린 마지막 화에 붙은 수. 저기에 붙은 숫자들이 곧 나를 염탐하는 이들의 렌즈였다. 나는 저 렌즈로 투과된, 다소 과장스러운 형상을 취해 그들의 눈에 닿겠지. 그들 또한 내게 있어 투과된 결과물일 것이다. 백미러의 거울에 비친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듯, 죽어 마땅한 인물의 별 볼 일 없는 생애가 읽히는 것보다 멀리, 왜소히 비칠 테고, 이내 렌즈에서 눈을 떼면 언제 있었냐는 듯 없어질 테다.


왜 그런 표정이야?


주인공은 여느 때와 같이 웃으며 나를 배회한다. 마치 제가 산 것이라도 되듯, 죽었노라며 결정을 내린 내 의지의 표명, 의사의 표출, 반항의 지표를 일절 부정하며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물어온다.


원하는대로 나를 죽였잖아. 너의 이야기를 또 하나 죽였어. 이제 너의 사고는 새로운 장르를 노리나 봐, 시리얼 킬러?


개소리. 나의 생을 장르로 치부하자면 르포 드라마의 영역에 가까울 것이었다. 진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되 이를 재연하는 인물은 배역에 선정되었을 뿐인. 맡은 배역에 충실할 뿐이면 그저 그것이 사실로 덧대어질 뿐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극중인물에 불과한 주인공에게 조소한다. 그녀의 말대로 나의 창작이 연속적인 살인으로 폄하되기에는 죽은 인물은 단 하나뿐이었으며, 그것을 일반적인 살인으로 조명하기에는 그 현장이 개인으로 국한될 뿐이었으니까. 나는 가장 자연스럽고 손쉬운 자살을 택한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연기한 배역일 뿐이고.


재미없는 소리. 결국 타자에게서 투영한 인물상인데. 네가 흔히 보는 포르노 같은 거잖아.


그럴지도 모른다. 타나토스의 영역에 깊이 발을 들이면 생의 의미를 강박적으로 성에서 찾으려 드는 것이 내 오랜 버릇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손에 쉬이 잡히는 포르노 매체는 삶의 교보재로 보기엔 참 우스운 것이었다. 삶을 탐닉하기 위해 몸을 파괴하는-죽이는 행동, 쾌락을 좇는다는 것은 한꺼풀 벗으며 약점을 드러내고는 이게 사는 거라며 울부짖는 모순투성이의 매저키즘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그래서 너는 나를 벗기고, 학대하고, 아프게 하고 괴롭히다 끝내는 죽이는 거지. 가장 완전하게 파괴된 것이야말로 가장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하니까.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나를 부르고, 또 벗기기를 시작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귀를 간질이는 주인공의 목소리는 끈적하게 내려앉아 나의 음습한 욕구를 불러온다. 내게 있어 주인공이란 늘 그런 것이었다. 한 장만을 걸친 채, 그것을 벗겨내면 제 몸을 파괴하는 대신 자꾸만 나의 이데아에 불을 비춰보는 것이다. 그 단 한 장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운지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노골적으로. 이는 포르노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교보재다. 나는 다시 내 손으로 목을 조른 작품의 시신을 매만진다. 새로운 댓글이 나를 향해 노골적인 비난을 드러내고 있다. 개연성의 부족, 역량의 부족, 심리의 부족, 묘사의 부족. 남들보다 잘 아는 자기소개서의 요약본을 남이 읽어주는 모양새는 생각하는 그 상황과는 별개로 퍽 수치를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벗어난다. 구석이 깨진 디스플레이가 누런 얼굴을 검게 칠하고, 나는 다시 무대로 복귀한다.


가진 것은 수면제 하나에 다룰 일 없는 화상 하나, 가족의 약속을 파기하고 홀로 남은 생물학적 부모가 하나, 그마저도 현재는 외출로 존재하지 않음. 제아무리 꾸며낸 이야기라 해도 무에서 유를 자아내는 마임의 영역까지 손을 댈 만큼 광기에 생을 기대지는 않았기에 준비된 배경은 이 좁아터진 방 하나가 전부다.


이걸로는 무엇 하나 연기할 수 없어. 있는 게 겨우 현실뿐이잖아.


불만이 많은 주인공이 볼멘소리를 내지만 이번만큼은 차마 조소를 던질 수 없다. 내가 생존을 위해 택한 것이 창작, 그리고 창작된 배경 위에서의 감독이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장 큰 역할이라면 지금의 내가 구현할 연극이라고는 실현(失現)-묫자리를 보며 발을 뻗는 일뿐이니까. 생존을 위한 본능적 모방의 형태는 결국 모두의 죽음의 형태로 귀결되는 잠을 좇게 되는 법이다. 나는 얌전히 곰팡내 스미는 이불 밑을 더듬어 수면제를 꺼내든다.


다음 연기는 보다 그럴듯했으면 하는데.


마지막 대사가 주인공의 독백이었는지, 나의 다음 지시였는지는 혀 끝에 감도는 쓴내만이 암시를 던질 뿐이다. 나는 이제 또 새로 죽을 곳을, 죽일 곳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서서히 수마에 잠겨가며, 그 잠겨간다는 단어에 이끌리며, 다음에는 익사를 조사해볼까, 얼핏 생각하고, 그러다 결국.


오늘을 연기하는 이의 숨을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