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뭘 해야 하나.


눈을 뜰 때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때리는 이 질문은 원시적이며, 그만큼 폭력적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못한다. 정확히는 생식의 대가로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지 않느냐 묻는다면 그래서 일을 주기는 하느냐 되묻고 싶다. 어렸을 적부터 망가진 몸은 현역의 훈련소마저도 거부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체의 장애를 호소하기에는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다고 한다. 심함의 기준이 무엇인지, 지금도 간단한 서빙 업무 몇 시간에 다리와 허리의 통증을 느껴야 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이러다 사고가 나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심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지레 짐작만 할 뿐이다.


이런 말에 남들은 손가락질하며 근성의 부족을 지적하고 나의 가치를 폄훼한다. 너는 다 좋은데, 일을 어떻게든 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문제야. 세상 살 때 누구나 다 힘들고 괴롭지, 뭐 자기만 힘든 줄 아나. 그들은 일반화의 과정에서 나라는 개인을 배제한다. 내가 가진 고뇌와 고충을 알지 못하고, 정신과 육체가 서로 합을 맞추지 못할 때 흘리는 불협화음을 듣지 못한다. 누구에게든 나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고자 수많은 단어를 헤치고 어휘를 골라 보여주자면, 그들은 얼어붙은 눈으로 자그마한 가슴을 갈라 내부를 드러내고 핀을 꽂는다. 마치 시상이 끝나고 게시일이 지난 시들이 그럴듯하게 짜인 파티션의 장식들과 이별하고, 여러 갈래로 찢기고 널브러져 끝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줌 재로 화하듯. 해체와 분석, 가치의 산정과 폐기. 인간과 시는 필시 같은 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죽는 이의 안에서 먼저 끓고 연기 되어 흩어지는 욕구와 감정, 존재하고자 하는 자아의 구현이 대부분 무관심 속에 스러지는 것마저도 같으니. 이 일련의 발상들조차도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 목소리이고, 내 뒤틀린 심상처럼 끈적히 들러붙는 체액으로 휘갈긴 한 줌의 시일 것이다.


나는 몇 줄 글을 써내리는 데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고, 도서관의 쿰쿰한 냄새와 그가 품은 활자들의 무한한 가능성에 희망을 가졌던 사람이다. 학생 시절에도 공부보다는 글을 읽고 쓰는 것에 탐닉했던 사람이다. 아프지 않고 내가 키운 재능을 살려 잘 하고 싶은 것에 목을 매는 것이 근성을 논할 만큼 부족하고 해이한 것으로 보인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근성이 모자란 모양이다. 그래서 사회가 정한 '누구나 다'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이리 덜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는 보겠다고 숨을 쉬고 무언가를 먹으며 이리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양이다.


일어나. 이대로 썩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주인공은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약에 취해 잠든 이 10시간이 무용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나는 이제부터 움직여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하라며 종용한다. 그래,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은 맞다. 내가 원하는 것, 그저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것 정도의 목표를 위해서는 나는 무엇이든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아까까지 정의한 나의 모자란 근성이라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자 한다면, 나는 지금부터 움직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사고는 다시 정지한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언제든 내 속대로 굴러가는 일이 없다. 몸을 세웠을 뿐임에도 간헐적으로 눈 옆을 찌르듯 찾아오는 삐이이이이──── 이명과 희끄무레한 암흑. 나는 다시 어머니 대지를 찾아 몸부림치는 지렁이 모양으로 바닥에 엎어진 채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얼추 다섯에서 일곱 사이에 시야는 다시 멀쩡히 돌아오고, 머리는 살짝 어지러운 정도에 그친다. 이 더럽게도 익숙한 악마의 친구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매일 아침을 함께하면서도 종종 제 존재를 부각하고는 한다.


또 왔네, 으. 꼴도 보기 싫은 그거.


주인공이 제 고운 얼굴을 양껏 찌푸리며 불평을 토로하지만, 나로서는 무어라 할 말이 없다. 구체성을 띠지 못하는 현상에 관념과 사상의 상징을 박아보아도, 정말 아쉽게도 나는 이를 죽일 방도를 찾지 못하는 까닭이다. 단순히 증상의 치료로 이를 죽일 수 있노라 자신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며 동시에 자신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다. 나는 일개 인간임을 알기에,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하는 어려움을 안다. 정말 그런 이상적인 통제가 가당키나 했다면, 진즉 내 속에서 떠들어대는 저 주인공이라는 치는 이 세상에 태어날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무얼 이제 와서 나를 부정하려는 거야? 너의 욕구와 나의 존재, 이만큼 이해가 잘 맞는 존재가 어디 있다고 그래.


그도 그렇네. 나는 억지로 얼굴을 비틀어 웃는 상을 취해본다. 너는 나로 인해 태어난 유일한 존재니까. 나는 너로 인해 사는 유일한 존재니까. 이토록 단순하고 확연한 관계도는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타자의 개입이 일절 이루어지지 않는, 자아와 자기의 관계는 으레 그런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주인공을 통해 세상에 나를 내비쳐야 할 것이며, 주인공은 끊임없이 나로 인해 관계를 정립하게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움직여야지.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니까.


주인공이 다시 주도권을 잡는다. 나는 일단 주인공의 의도를 따라, 천천히 컴퓨터에 앉아 전원을 누른다.

피폐, 중도.

제목을 써넣으며, 나는 어스름이 아주 걷힌 창 밖으로 잠시 눈을 돌린다.


이대로, 잠시만 있는 건 어떨까.


마지막 말은 주인공이 건넸는지, 내가 먼저 꺼냈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