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결전 전날 밤.


마지막 하루만큼은 하고싶던 것을 하며 보내자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런 이유에서 용사 일행은 마왕 토벌 전날, 용사가 나고자란 북쪽 마을 어귀에서 각자 헤어졌다.


죽기 직전 동정을 떼야겠다는 놈도 있고, 칼을 갈겠다는 녀석도 있었다. 동생과 저녁식사를 하고 오겠다는 아이도 있고, 멍 때리며 눈 내리는 하늘을 지켜보겠다는 분도 계셨다.


용사는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


그의 어머니는 선대의 마녀이자, 이계의 난봉꾼으로서 마왕에 대해 여러가지를 알고 계셨다.


용사는 그녀로부터 과학적 마법론과 검술을 배워 신검(神劍; 에고이스트)을 손에 넣고, 자동 계산의 검술(ASA; 오토소드)을 익혔다. 


이제 인간 누구도 그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어머니조차도.


내리쬐는 가로등 사이로 시커멓게 비어버린 하늘을 올려다 보면, 여전히 육각무늬의 예쁜 눈송이들은 하늘하늘 내려온다. 


죽은 눈으로 맥없이 응시하는 눈앞엔 여전히 성탄의 밤을 준비하는 북쪽 고향 마을의 소복한 분위기가 있었다. 


눈 내린 거리에 모인 현악단이 평화의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한다. 


그 유랑 악단 주위엔 생계 유지를 위해 벗어둔 모자가 놓여있다. 코흘리개 꼬마와 수다쟁이 동네 아줌마의 동전 몇 푼어치가 그 모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용사는 가만히 서서 눈을 맞으며 그리웠던 고향의 풍경을 되새겼다.


사박 사박. 용사는 쌓인 눈을 한걸음 한걸음 밟아나가며 태어났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낡은 문고리엔 침엽수 가지를 둥글게 만 조촐한 성탄 장식이 달려 있고, 그 옆엔 '행복한 용사님의 집' 이라고 없는 솜씨로 조악하게 만든 작은 나무 팻말이 걸려 있었다. 16년 전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묘한 온기와 짤막한 단풍꿀의 박하 향이 추억처럼 아득히 뇌에 박혀 온다.


"다녀왔습니다."


허공에 뿌려지는 인사말.


결론. 멍청하게도 이럴 줄 알면서 무의식적으로 이곳에 찾아 왔버렸다는 것. 


당연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새벽처럼 거실과 주방은 짙푸른 침묵만이 있었다. 


주방 찬장의 조미료 진열장에 모셔진 후추 통에 먼지만 가득 쌓여 있을 뿐이었다. 용사는 유년기의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대략 그가 아직 코흘리개 소년이었을 적 일이다.


'레미, 편지를 쓸 때엔 펜을 기울여서 써야 한단다. 편지지에 날카로운 펜촉이 닿아서는 안되거든.'

'호박 파이가 좋니? 아니면 사과 파이가 좋니?'

'아버지는 레미 네가 태어나기 전에 마계전선에 지원하셨단다. 멋지지?'

'레미. 용사 따위의 운명을 물려줘서 엄마가 미안해.'

'호호호, 후추를 너무 많이 넣었나 보구나. 요새 눈이 잘 안보여서 그만.'

'레미… 엄마가 내일 마왕이 된다면 어떻게 할거니?'


어머니는 전대 용사에게 영원한 봉인(죽음)을 당했다. 


그 일이 있던 후로 그는 용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건 운명이었다.


용사가 된다는 것의 의미. 그것은 복수귀의 고독을 물려받는 것. 


마을 처녀의 순수한 고백을 이 악물고 짖밟아야 하며.


굳은 결단에 찬 그 칼날은 태아를 써는 데 몰두해야 하고.


최종장엔 마왕의 목을 쳐 부수고 동귀어진해야 할 운명.


그리고. 이제 최종장까지는 하루도 남지 않았다.


이번 마왕은 사탄의 성녀 에스케리카. 내일이면 그녀도… 


그런 식의 생각을 반복하던 도중, 용사는 안방에서 인기척을 감지하고는 조심스레 다가가 보았다.


방 문 틈으로 뭔가가 보이는 듯 했다. 그림자일까. 환영일까.


그것은 그림자도, 환영도 아니었다. 명백한 인간형의 무언가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살갗이 미묘하게 드러나는 고딕 양식의 드레스. 


머리 위로 길게 자라난 염소의 뿔. 고급스럽다는 생각까지 드는 단정한 흑수정빛 긴 머리. 


그리고 보라색 불덩이가 개화하는 듯 한 자수정의 깊은 눈동자. 


용사는 그것과 똑바로 마주쳤다. 자신이 알고 있던 마왕과 정확히 같은 그 모습에.


.


.


.


"그래서, 넌 마왕이고 마지막 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여기 왔다는 거지?"


혀 끝을 잠깐 내밀었다가 눈을 깔고 손가락을 비비던 그녀는 용사의 눈을 교묘하게 피하며, 문 바깥을 가리켰다.


촛불의 그림자가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용사와 마왕 사이의 묘한 대기를 일그러뜨린다.


마왕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이 쪽 언어가 어색한지 손짓 발짓을 전부 동원해 자신의 말을 설명한다.


"서, 성탄 축제. 마을에… 에스카, 카토. 베르타?"


"이봐. 성탄절 축제를 즐기고 싶다면 여기가 아니라-"


그녀는 따지듯 내밀어진 용사의 팔을 탁 하고 잡으며,


"에스케리카와 함께. 축제. 함께 해줘. 마지막 해야 할 일과 소원이야. 메리슘."


용사는 간절한 시선을 느꼈다. 마지막 해야 할 일.


그녀의 절박한 시선이 용사의 팔과 문고리를 오간다. 


어정쩡한 미소를 조금 머금은 그녀의 귀여운 머리칼이 살랑인다. 


내일 운명이 결정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불합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감정은 오묘하고도 신기해서 절대로 이번 생 안엔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고 용사는 확신했다. 


그래. 어차피 결전은 내일이다. 라고 생각한다. 


"내일은 죽여야 할 상대로 만나겠네."


그의 짧은 빈정거림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살짝 갸우뚱 하며 '그럼 가자!' 하며 용사를 끌고 나갔다. 


그 악마처럼 예쁜 얼굴에 환하기 짝이없는 웃음 꽃이 핀다. 


힘껏 잡아당기는 그 팔엔 양기가 가득 차 이번 성탄 축제의 활기찬 기운이 절로 느껴졌다. 


마왕 안내를 위해 이곳의 지리를 기억해 내려던 찰나, 마왕이라는 소녀(사탄의 성녀 에스케리카)는 기쁨에 젖어 온 사방을 튀어다녔다. 


얼마나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으면. 그녀의 고딕 드레스가 휘날리며 만들어낸 미약한 바람이 어둠이 깔린 코스모스 언덕을 가르며 마치 코스모스 자체가 그 바람결의 일부분처럼 되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을 때 마다 한겨울 야시장의 약간 뜨뜻한 등불들이 그녀의 잿빛 살갗을 핑크빛으로 물들인다. 


에스케리카는 완전히 '소원'을 잊은 듯 했다.


"저기. 함께 다니고 싶다며?"


용사는 그녀로부터 두 시간 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고작 글자 몇 자 따위로 표현하기조차 벅찬 이 막막하고 덧없는 감정이 그의 눈 안쪽에서 지긋이 맴돌았다. 살짝 지끈거리기도 했다. 


초저녁 말기 무렵의 환한 야시장 불빛에 어지럼증을 느낀 건지, 미묘한 감정 탓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국적인 감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역사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지.'


하고, 용사는 생각했다. 대략 28년 전의 오늘이었다. 성탄 기념을 위해 마족과 인간이 모두 싸움을 멈추던 날.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이려고 안달이 난 마족과 인간이 악수를 하고 만담을 나누던 날.


서로를 죽이기 위해 인생을 걸어온 용사와 마왕이 결전 하루 전날 축제를 즐긴다.


저 멀리 거리의 악단들로부터 들려오는 <G선상의 아리아> 가 들려주는 선율은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날 밤의 고요 같았다.


마왕이 드레스를 펄럭이며 용사에게 다가온다. 그녀의 손에 달콤한 사탕 몇 자루가 들려 있다.


"나는 사탕이 좋아. 용사 씨는? 어때."


"글쎄. 이가 썩는다고 야단은 많이 맞은 것 같은데."


"용사 씨는 뭘 모르는구나. 달콤한 건. 키슈… 좋은 거야."


"몰라서 유감이네. 나는 어째서 에스케리카, 당신이 결전 하루 전날 여기에 찾아온 건지 궁금한데. 죽으러 온 거야? 난 여기서 조금만 마음 먹으면 널 죽일 수 있어. 네가 마왕성 밖에선 저기 있는 평범한 마을 소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거든."


자칭 마왕이라는 그 소녀는 전혀 모르겠다는 투의 얼굴로 두 눈을 꿈뻑이며 의문에 찬 고양이가 되어 용사를 올려다보았다. 약올리는 꼬마아이같이 얼굴을 잔뜩 찡그린다.


"싫었어. 내일 싸우는거. 그래서 용사 씨를 만나서. 오늘만은 메르켸프… 화해하자고 하러 왔어. 그런 것도 몰랐던 거야?"


"나는 운명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장난인 척 넘어가려는 부류를 무척이나 싫어해. 넌 내일 나와 싸워야 해. 그건 신조차 절대 바꾸지 못하는 운명이고, 절대 그냥 '화해하자' 따위로 넘어갈 수 없는 문제야. 네 목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걸려있는지… 알기나 해?"


"그래. 알고 있어. 그치만, 나는 싸우기 싫은걸."


"약한 소리 할거면 이 자리에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그딴 정신머리로 꼴에 마왕이라고? 바로 내일. 둘 다 죽을 때까지 싸울 운명인 걸 인지하고는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대체 왜..! 실망이다. 에스케리카."


"화해했으면 좋겠어. 그냥.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샤이탄… 인간과 마족이 죽었는지 계속 봐왔잖아. 내 목에 걸린 사람들의 수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이 희생됐잖아. 알고 있어?"


"이제와서 싸우기 싫다거나 화해하고 싶다거나 따위의 말은 통하지 않아. 애초에 이 증오의 연쇄는 네가 시작한 것도 아니지. 우리는 훨씬 이전 세대부터 그렇게 싸워왔고, 너와 내가 죽으면 그 다음 용사와 마왕이 서로를 죽이려고 하겠지. 결코 그 억센 연쇄작용은 끊을 수가 없어. 자연 법칙을 거스르려고 하지 말라고."


그녀는 걷다가 말고 잠시 지나치던 노란 등불의 누들 점포에서 올라오는 김을 노려보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아하! 용사 씨는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라시튜, 누들? 이라는 거. 계속해서 이어지는 거. 하지만 이거? 목 안막히고 먹고 싶으면. 적당히 먹기좋게 잘라야 해."


용사는 작은 한숨을 그냥 숨인 것처럼 거짓으로 내뱉은 뒤, 호주머니에서 클래식한 은시계를 꺼냈다.


"이봐, 지금이 오후 열 시라는 건 알고 있기나 한 거야? 두 시간 후면 성탄 축제를 명분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임시 휴전은 끝나. 다시 말하지만 네가 마왕성 바깥에서 힘 못쓰는 건 알고 있어. 나는 두 시간 후면 네 심장을 반으로 갈라버릴 수도 있을 테지."


그 마족 여성은 용사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능청스레 점포의 높은 자리 의자에 낑낑대며 올라탄다.


"모르겠어. 용사 씨.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


"그야, 그게 우리 일이잖아."


"일?"


"그래. 일."


"용사 씨는 내가 싫어?"


"응. 죽여야 할 만큼 싫어."


"그럼 왜 죽이지 않는데? 여기서."


용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그의 자유의지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반면에 그녀. 에스케리카에겐 의지라는 것이 있는듯 했다. 그 높은 의자에 앉아 열심히 누들을 먹고 있다. 한껏 재채기도 한다. 사레에 걸린 걸까.


"국물이 매워. 용사 씨. 물 있어?"


고요히 침묵을 지키던 용사는 '소원'을 떠올리곤, 머뭇거렸다.


완전히 어색해지기 직전에. 답이 나왔다.


"...소금 통 옆에 있는게 물이야."


사실 용사는 마왕의 이전 질문에는 답할 수 있었다. 


'왜 죽이지 않는데? 여기서.'


여기서. 마왕성을 벗어났기에 아무 힘도 없어진 그녀를 죽일 수 있음에도 결단코 마왕성에서 <완전한 사탄의 성녀>가 된 그녀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는.


16년동안 칼을 갈아온 목적지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목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관성처럼 달려온 이 자리에 남은 것이 허무라니.


납득할 수 있을리가. 그럴리가.


어서 마왕성에 그녀를 감금해서라도 완전체가 된 마왕과 결전의 사투를 벌여야 한다.


툭 치면 픽 하고 쓰러질 법한 마왕. 그따위 걸 죽이기 위해 이 험준한 길을 달려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결전 하루 전날 마왕이 성을 나온다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저기. 용사. 여기는 먹고 나서 돈이란 걸 내야 하나 봐. 돈이 뭐지?"


마왕은 그새 점원과 잡담을 시도하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가 익숙하지 않아 중간중간 짤막한 마족어가 작게 튀어나오고 있다.


"아, 손가락에 낀 이거. 주면 돈이란 거, 안 내도 돼? 주면 타무크, 그러니까... 마음껏 먹어도 좋다고?"


내버려 두면 그대로 바가지를 쓸것임에 틀림없을 정도로. 마왕은 언어 이외에 인간의 세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까의 사탕은 돈을 내고 가져온 걸까.


"음. 그것도 좋지만, 나 오늘 하루 밖에 남은 시간이 없어. 엣. 아, 뭐야. 그러면 돈이란 거, 안 내도 상관 없다는 거야?"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 야토 헤라사, 꼬뉴... 그래서... 하루 정도 시간이 남았단 것도 사실, 저기 옆에 있는 용사 씨 마음에 따라서 두 시간 남짓일 수도 있고, 스물 세시간이 될지도 몰라."


"글쎄.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은데, 아직 복잡한 문장은 어렵네. 오늘을 위해서 공부했지만 역시나 모자랐나 봐. 그치만 공부만 하다간 오늘을 놓치게 되니까. 여기서 보낼 수 있는 건 오늘 하루 뿐이거든. 아마 내 마지막 날이야."


"아. 하루만 시간이 있다면, 산에 있는 사원에 가 보라고? 음. 사원에 가면 나 맞아 죽을지도 몰라. 다른 곳 없어?"


대화가 끊겼다. 듣고있던 용사는 어느덧 부담스런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어올리자, 누들 점포의 점원과 에스케리카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용사 씨. 어디를 가야. 메토... 그러니까. 마지막 하루를 잘 보냈다고 생각될 수 있을까.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어. 사실. 나. 다른 곳엔 가 본적이 없거든."


점원이 말을 다시 붙이자, 마왕이 고개를 휙, 돌려 점원을 다시 쳐다본다.


"아, 이 마을에 있는 그 사원이란 거. 가도 맞아 죽지 않을 거라고? 저, 정말이야? 책으로 봤을 때는 거기. 가면 무조건 죽을 거랬어. 뭐? 죽을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런 책이 어디 있냐고?"


용사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결정을 내린다.


"글쎄. 죽지 않을지도 모르지. 열심히 기도하고 회개한다면."


거짓말이다. 사원에 사탄의 성녀를 알고 있는 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마왕의 권능이 발휘되지 않는 지금 시점에. 그녀의 최후는 '맞아 죽는다'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들 점포 점원이 말한 곳은 이 북쪽 마을의 아주 작은 사원이다. 사탄의 성녀를 아무도 모를지도 모른다. 이곳의 점원처럼.


"자, 용사 씨. 열 시 반이야. 사원에 도착하면 열한 시가 될 거고. 거기서 한 시간을 보내면, 당신이 나를 살리던 죽이던. 마음대로 해."


"같이 가준다고는 하지 않았어."


"아... 용사 씨가 같이 가 줄 필요는 없어. 용사 씨 일행분들도 각자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잖아? 내 소원이라는 거. 애초에 용사 씨가 들어줄 의무도 없고."


"그럼 누굴 기다리길래 출발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야. 넌 마왕이고 인간의 나라인 이곳에 네 편은 아무도 없어. 기다려도 누구도 같이 가 줄 리 없지."


용사는 차가운 말투로 일관했지만 에스케리카는 그자리에서 그대로 있었다. 육각의 눈송이가 내리는 겨울하늘을 향해, 손을 모으며.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마을의 성탄 축제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자정은 곧이었다. 어느덧 최후의 시간은 삼십 분도 남지 않았다.


용사의 심장은 마치 폭주한 기관차처럼 덜컹거렸다.


마왕 에스케리카와 용사의 끝이 다가오고, 파티원들이 다시 약속 장소로 모이기 시작했다.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하던 거리의 현악단은 어느새 <보칼리제>를 연주하고 있었다. 우울한 선율이 거리를 메워 안듯이 에워싼다. 용사 파티의 성전사와 암투꾼, 마법소녀와 요정궁사와 짐꾼은 엄숙한 표정으로 용사 옆에 선다.


사천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스케리카는 눈 내리는 밤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마을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사원. 그곳에 그렇게 가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걸까.


무심코 던져버린 '기도하고 회개하면 가도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시도중인 것일까. 어차피 내일 죽는 것은 확정지어 졌는데. 두려울 게 있을까. 의문만이 가득했다.


악의 결정체이자 연쇄적 비극의 주범인 그녀가 지금부터 마음을 비워 기도한다면, 자애로우신 신님은 그녀의 순수를 알아 주실까.


생각을 하던 찰나. 기도하던 에스케리카의 목에 직선이 그려졌다.


"레미. 뭘 하고 있는 거야? 이건... 마왕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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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네가 마왕의 운명을 이어 받겠네요. 알고 있었죠? 선과 악의 결정체가 사실 희생 재물에 가깝다는 불편한 진실? 인간도, 마족도 둘 다. 자. 에스케리카. 거의 다 된 것 같아요. 어서 날개를 펼쳐보세요. 그리고, 눈을 떠, 손길을 느껴요. 그리고. 그리고... 약속을 하는 거예요."


검은 그림자는 한 마족 여성의 손목에 글자를 새긴다.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어요. 새 이야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비극이 싹틀 테죠. 밤하늘의 별이 하루를 연주하듯이. 반복될거예요."


"응. 알고 있어. 하지만. 왜 그렇게 되야 하는 건데?"


"그야. 그렇게 정해진 게 우리네들의 운명인걸요. 이 이야기에 행복한 끝은 없도록 예정되어 있으니까."


"그거. 끝이 기쁨은 아닐 거란 얘기?"


"미안해요. 마족 소녀. 하지만 세상은 잔인해서. 네가 인간이던 마족이던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그럼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이야긴 아니겠네. 이 이야기 전체에서. 배드 앤딩이라도 좋은 순간들은 있잖아? 내가 이대로 살았어도 엔딩은 '죽는다'라는 배드엔딩 아니야? <이야기>가 배드엔딩이라서 잔인한 거면. <이야기>가 없는 세상도 잔인한 게 아닐까."


"좋을대로 생각해요. 규칙을 깨서 복수의 연쇄를 멈추는 선택권은 너와 용사에게 달렸으니까요. 그치만. 너희 둘은 서로를 증오할 수 밖에 없는 상대잖아요. 그걸 이해하세요. 그리고 깨진 규칙을 감당해야 할 인물도 너희들이죠."


"알겠어. 뭔가 깨달은 것 같다. 이대로 마왕성에서 빠져나가지만 않으면. 뭐든 해도 된다는 거지? 이제 혼자 남아도 될까?"


"이야기를 뒤집고 싶은 게 아니었나요?"


"뒤집지 않고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아서."


"행운을 빌어요."


그림자는 그렇게 떠나갔다.


흑수정빛의 에스케리카는 고고한 석좌에 앉아 기지개를 켠다.


앞으로 이어질 무료한 수만 번의 낮과 밤을 맞을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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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옛날에 쓴 소재 재활용해서 더 길되 안오글거리게 써봄. 로맨스 단편이다. 깨달은게 하나 있는데. 이딴 로맨스 소설을 쓰는 인간은 절대로 연애를 할 수 없다는 것. 


p.s. 익소챈 오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