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막대기가 박인 이들


2023.08.10

시작은 거창했으나 끝은 미미하고, 끝이 거창하나 시작이 미미하나 이것들은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지어다.

선은 설정놀음이라고밖에 할 수 없고, 후는 예열이 너무 오래 걸릴 뿐이다.

종합한 문학은 시작이 미미하면 끝이 미미하고, 끝이 거창하면 시작도 거창해야하느니라.


왜 중간이 없는가? 싶다면 연필을 쥐고 시를 써보거라. 모든게 공평하게 분포된 시가 나오는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고 혼자 문학에 취하는 것은 몰락의 길이자 자기만족의 징조이니라.

몇몇 이들은 이것을 시로 볼 수도 있겠다. 난 수필로 입문했으나 시로 전향했을 가능성을 가진 이리니.

어쩌면 시인지 수필인지 소설인지에 달린 일은 주관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결국은 맞는 모양새를 갖출 뿐이다.


목에 막대기가 박힌 이들, 보아라. 이것은 그대들을 위한 소극적인 비탄일 지어다.

모든 것이 허무로 되돌아가도 자유가 될 수 없는 이들, 보아라.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니라.

이 문학을 청취한 이들, 보아라. 이것은 우리를 위한 문학일 수 있다.


끝이 거창해도 시작이 미미하면 그것은 좋은 문학이 아니고, 반대도 역시 같은 처지일 것이다.

어쩌면 몇몇 청취자들은 이것이 누군가를 모방한 표절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허나 그것은 내가 그대들의 문학을 청취했던 한 이었기에 가능할 수필일 수도 있겠다.

결국 문학을 써내려가는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토끼일테니까.


이쯤되면 왜 수필의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은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과장이리다. 결코 이 수필의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쩌면 광고일 수도 있겠느니라.


이 수필이 써내려가는 이의 심상에 의해 멋대로 흘러간다 생각하면 그것은 정답이다. 내 모든 문학작품을 그렇게 흘러갈 지어다.

어쩌면 내가 너무 많은걸 바라는 어미일 수도 있겠다. 허나 난 많은걸 바라지 않는다 : 내가 바라는건 짧은 후기뿐.


나도 똑같은 익명의 작가이자 청취자이다. 문학에 머리를 맡기고, 잠시 멍 때리는거도 어쩌면 청취라 볼 수 있겠느니라.


일딴 베끼고 보라. 그럼 언젠가는 스스로 비행할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