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얼어붙었던 땅이 녹는다.


새햐얗던 하늘이 어지러운 오색으로 뒤덮인다.


한없이 추해보였던 매연가득 먹은 눈은 온데간데 없고, 언제나 거무죽죽하게 대지에 자리했던 흙만이 바람에 말라 더욱 단단해져간다.


겨울의 살이 에는 것만 같았던 추위는 어딜 간 것인지.


봄의 따스하고도 향긋한 바람이 콧잔등을 간지럽혔고.


텅 비어있던 거리와 들판엔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과 초목이 헌사롭다.


높이 뛰면 닿을 것만 같았던 구름은 언제 저리도 높이 올라간 것인지.


평안하디 그지없는 봄의 정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심란해져만 간다.


“…….”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니, 발아래 작게 응어리진 검은 눈덩이가 보인다.


세상을 덮을 것만 같이 세차게 내리던 폭설은 봄의 따뜻한 기온에 모두 녹아내려갔고.


길고 길던 겨울은 이 작디작은 눈덩이 하나만을 남겼다.


이 눈덩이까지 녹아내린다면 겨울은 끝이 나는 걸까.


이례적으로 추웠던 겨울마저 시간의 흐름에 녹아 사라지고, 어떠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고개를 들어 쳐다본 들판엔 사람들이 모여있다. 다가온 봄에 취해 웃음꽃을 만개하며 뛰어 노는 아이들이 꺅꺅대며 들판을 울린다.


“…….”


결국 잊고 지우는 편이 좋은게 아닐까.


그리 생각한 순간.


겨울이 내게 속삭였다. 상념에 빠져 내가 조용히 있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정도로 작게. 그리고 낮게.


웅얼거리는 뭉개진 발음으로.


사실 그래서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아니, 듣고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겨울이 길었다. 길고 긴 겨울에 얼어붙고 헤진 이후라 이런 겨울의 편린을 보는 것 조차 내겐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생기를 가득 머금은 봄의 햇살마저 따갑게만 느껴질 지경인데 다시 겨울을 마주할 용기따윈 내 안에 남아있지 않았다.


허나 이상하게도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내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손을 포개어 검게 변색해버린 추한 눈을 들고 집으로 달려가는 자신을 보았다. 눈앞에서 절찬리 녹아내리는 눈을 마치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숨겼다.


신발차 벗지않은 채로 흙발로 뛰어들어온 집.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부모님의 시선마저 뒤로한 채, 나는 냉동고의 문을 열었다.


“…….”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답답한 것인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혹 화가나는 것인지.


결국 그토록 강렬했던 감정마저 스러지고 사라지며, 아름다웠던 추억마저 낙엽에 쌓이고 풍화되어 썩어간다는 말을 인정하기 싫어서.


갖가지 감정이 한데 응어리져 무엇 하나 제대로 판별하지 못할정도로 검게 물든 눈으로.


냉동고의 가장 깊숙한 곳을 물색한 나는.


차마 꺼낼 생각은 들지 않겠으나, 영원토록 녹지않고 자리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에.


검게 변색한 추하디 추한 눈을 올려놓았다.




* * *





모든 걸 녹여버릴 것만 같았던 여름이 지나고 나면 가을이 찾아온다.


봄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풀의 향기를 품으며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간지럽히는 가을. 무언가를 창작하기에 썩 좋은 풍경을 그리며 점점 쌓여가는 낙엽과 발가벗은 나무를 보고있으면.


가슴께를 간질이는 오래전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래봤자 한 순간.


스쳐지나가는 기억에 불과하기에 다시 부여잡아 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마치 서늘하고도 기분좋은 가을바람이 그렇듯, 그 오묘한 감각이 지나가고 나면 저도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곤 하는 것이다.



 ♬~♫♪~



빈 교실을 울리는 피아노 소리.


낮은 음부터 차츰차츰 발판을 쌓아올리다가 위로 쭈욱 뻗어나가서는 아름다운 선율을 그려낸다.


그 누구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 즉흥연주. 오로지 연주자만을 위한 노래.


마치 빈 도화지에 지금 껏 배워오고 쌓아왔던 기량을 마음 껏 뽐내는 화가인양. 비어있는 오선지에 자신만의 음을 녹여낸다.

  

비어있는 보면대를 바라보고 눈을 감기도 하며 오감을 연주로 하여금 표현한다.


사실 연주자에게 있어서 필요이상의 감정을 녹여내는 것은 독. 완숙한 연주자가 아니라면, 원래의 곡의 경향성을 헤치기 쉽상이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로 쓰이는 연주가 되려 청취자의 감상을 방해한다. 그것만큼 우스운 꼴이 없겠지.


그렇기에 보통은 수학공식을 다루듯 접근하고 나중에 가서야 문학작품을 써내려가듯 자신의 색을 조금씩 타는 것이다. 작곡가가 한차례 자신의 색을 타 완성해낸 곡에 마치 조미료를 뿌리듯.


선행은 곡에 대한 해석과 기본기. 그 기본이 되는 것을 쌓아올린 철의 망루. 그 위에 서있는 연주자.


그리하여 완성된 곡은 청취자의 심금을 울린다. 그래. 결국, 연주의 끝은 문제지의 답을 써내려가는 것 이상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인생을 피아노에 녹여내고, 경험을 쌓아올리며 그 마지막에 가서 결국 자신의 감정마저 자유로이 다루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뽐내는 마스터피스.


손의 끝마디가 떨려온다.


처음으로 콩쿠르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처음으로 건반을 눌렀던 그 순간.


주변의 사람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고, 뒤이어 공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피아노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오감(五感)이 잊혀지고, 새하얀 백색 공간이 펼쳐졌다.


부유감.


일순, 피아노의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아 당황하지만, 수백 수천번 어쩌면 그 이상 쳐왔을 곡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손이 움직인다.


구름을 어루만지듯 마치 허공을 치는 것만 같은 타건감.


그리고 그 당시,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연주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연주는 하지 못할 것이란 걸 말이다. 내가 되었든, 나를 제외한 참가자들이 되었든.


어린나이의 치기어린 피아니스트 지망생의 생각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그리 확신했었다.


아마 어쩌면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연주를 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연주가 끝이 맺어지고, 이어지던 흐름이 고요해져가는 순간.


끝세로줄 직전의 마지막 음표를 눌렀던 손이 떨어지고.


그제서야 제자신이 자리해있는 곳을 파악한 나는.


볼 수 있었다.


관객과 심사위원들의 환한 미소를, 놀람을. 한없이 나의 연주에 긍정적임을 내보여주는, 그러한 감정을 담고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이 아이는 필히 클래식계를 주름잡을 거장이 될 겁니다.


당시의 전율을 복기하며 잠시 손을 멈췄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약간의 갈색빛을 머금은 노을빛이 교실을 비추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



태양의 남중고도가 본격적으로 낮아지기 시작하는 가을은 낮의 길이가 짧다.


6시. 이르면 5시부터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잠시 한눈을 팔고 있으면 금세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 길고 긴 밤이 찾아오는 것이다.


해가 지기시작하는 그 애매한 시간. 5시 즈음. 


—노을이 진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붉은 주황빛으로 건물이 물든다. 선생님이 환기를 하려 걷어놓은 커튼과 창문 사이로 화사한 노을빛이 들어온다.


지금 시간은 5시 30분.


저 아래에서 아이들이 하교하는 소리가 잔잔한 반주가 되어 귓볼을 간지럽히고.


가을의 풍족한 풀내음이 가슴을 화사하게 채운다.


불을 끈 빈 교실마저 노을빛이 이리저리 반사되어 밝게 빛나는 와중.


그 빈 공간을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이 가득 메운다. 어느샌가 움직이고 있는 손을 발견한다. 끊지않고 오히려 더 풍부한 감상을 담는다.


연주에 감정을 녹이는 것은 독.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담아두기엔 너무나 거대한 이 충동을 이렇게라도 뿜어내지 않는다면 속이 곪아버릴지도 몰랐다.


가을은 창작의 계절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주억일 무렵.


연주의 클라이막스가 다가온다.


바닥을 가득 메운 농작물과 낙엽의 풍족함과 화사함. 그곳에서 조금만 고개를 들면 발가벗은 나무가 눈에 들어오며 고독과 외로움을 자극한다.


다채로운 감정. 반대극단의 감상을 녹여 이도저도 아닌 곡이 되어가는 연주. 혼란. 그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


—연인의 계절이기도 한 가을.


낙엽이 차츰차츰 떨어지기 시작하는 산책로. 단풍이 떨어진다. 쌀쌀한 날씨. 적막한 오후의 인적 드문 길가. 한쌍의 연인을 그려낸다. 추락하는 낙엽과 내밷어지는 거친 말. 음이 점점 격화 된다. 서로에게 쌓여가는 오해. 떨어진 나뭇잎은 썩어가고 바스러진다. 불협화음. 배신감을 그려낸다. 눈앞으로 떨어지며 쌓여가는 낙엽. 초가을의 스러지는 분위기가 맺어지고, 끝나가는 가을의 포근함과 풍만함이 코를 간질인다. 과거를 복기하며 추억. 수북히 쌓인 낙엽을 으스러트리며 나는 바스락 소리. 고개를 돌리며 동시에 마주한 남녀. 노을지는 하늘 아래에서 다시 마주한 두 연인. 


그때 말라 비틀어지는 낙엽을 덮는 한떨기 눈송이.


그리고 그 사이……


“맨날 그러고 있으면 안 지겹냐?”


퉁———


“아.”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음이 사라진다.


어쩌면 다양성이 메마른 반도의 클래식 음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했을지도 모르는 영감이.


이 세상에 드러나길 거부한다.


“어~이~”


아니, 거부당했다. 


나는 한박자 느리게 저 증오스러운 목소리에 최대한의 분노를 꾹꾹 눌러담아 대답했다.


“…어.”


“뭐야 들리잖아. 왜 대답을 안해. 지금 몇번이나 불렀는지 알아?”


“14번.”


“그러니까. 피아노도 좋은데 주변을 좀…… 어, 뭐야 어떻게 알았어?”


마지막 건반을 눌렀던 손 모양 그대로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느껴진 감정은 절망. 어쩌면, 예전의 그 만족감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기회가 사라졌다.


나는 욕짓거리를 내밷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건반에 머리를 박았다.


뚜웱—


괴상하게 얽힌 음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옆에 서있던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사실 저 치도 자기도 지금 뭘 잘못하는 것인지는 알 것이다.


내가 연주 중에 방해한 것으로 화를 냈던게 한두번이 아니니까. 긴 세월간 얽힌 인연은 서로의 정보를 더 많이 알 수 있게 해주며 이는 곧 서로가 지정한 선을 실감할 수 았게 해준다.


그리고 그 인연이 가까워지면 보통 그 선을 넘더라도 어느정도는 용인하게 된다. 인간관계의 신비함 중 하나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저 속이 얹힌 듯한 표정을 짓고있는 여자도 어느정도는 내 선에 들락날락할 최소한의 권한은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것도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 사안이었다.


음악에 한 해서는, 그것도 연주 도중에 한 해서는 모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인해 그어진 선은 설령 부모님이라 하여도 쉬이 넘게 두지 않았다.


헌데, 지금 그 선을 이년은 또 쳐 넘었다. 내가 몇번이고 대가리에 주입식 교육을 박아넣어줬을 텐데.


“……하아.”


“제송함미다….”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자 금세 쭈구리가 되는 꼴이 퍽 웃겼지만, 나는 표정을 풀지 않은채로 물었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다소 가시가 돋친 말투. 그럼에도 평소와 비교하여 좀 누그러진 듯해 보여서 였을까.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뒤에 숨겼던 봉투를 내보이며 답했다.


그래.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내가 짜증을 낼 것을 알았음에도 기어이 내 연주를 방해한 것이라면 그녀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라면 내가 좀 짜증을 낼 것 같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무언가 내가 놀랄만한 소식을 들고온 듯 보였다. 쭈글해졌던 상체가 쭉 펴지며 허리를 꼳꼳히 펴고 입을 열다가 말고, 이제는 또 한박자 숨을 쉬더니 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안의 중함을 강조하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내쪽으로 몸을 기울여서는,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통과됐대.”


“뭐가.”


하지만, 나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기에 시큰둥히 답했고.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두팔을 크게 벌렸다.


“리즈 콩쿠르! 올해 국내에서… 너 하나만 예선 통과된 거라고!”


“음.”


“네가 우리나라 대표라니까?! 이해가 안되는거야?? 듣기로는 한예종 애도 떨어졌다는데..! 너는 통과한거라고!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영국! 헨델의 나라!”


말을 멈추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를 마주 응시하며 생각했다. 어찌해야 가장 재수가 없어보이지 않게 내 심정을 표현 할 수 있을까.


당사자보다도 더 기뻐하며 좋아해주는 모습은 나름 가슴을 간질이는 묘한 울림이 있긴 한데, 정작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하.. 아니, 이게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건 아닐테고, 아니! 왜 나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데!”


방금까지 자신의 실책으로 나를 화나게 만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모습은 어딜간 것인지 양 껏 흥분해서는 날뛰기 시작하는 그녀.


노파심에 말하자면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연히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콩쿠르의 예선을 통과하는 것도, 존경하는 음악가가 자리했던 이국의 땅을 밟아 연주를 하는 것도. 둘 중 무엇 하나 짜치는 것 없이 매력적인 것들 이었다.


이젠 꽤 익숙해질만 했는데도, 매번 그 자리에 서있다 보면 저절로 전율이 일고 심장이 떨리는 것을 보면 그것이 상당히 기쁜 일인 것도 분명했고.


근데, 그것도 가서의 이야기지.


“고작 예선인데.”


지금 기뻐한다고?


왜?


“통과하는게 당연한거 아니야?”


말을 내밷고 난 직후 헛숨을 들이켰다.


최대한 자중하고 있는데, 이리되면 또 허영심과 자만에 빠진,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몰락한 늙은 예술가만 같게 보이지 않은가.


나는 그런 미래를 원하지 않는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피아노를 치다 세상을 뜨는 것이 나의 염원인데, 벌써부터 이런 사고괸을 지녀서는 재수없는 음악가로 낙인찍혀 몰매맞고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니, 뭐… 음…”


나는 뒤늦게 분위기를 조율해보기위해 안간힘을 써 표정관리를 하며 덧붙였다.


 “와아아아….”


“뒤늦게 놀란 척 하지말라고….”


“후.”


뽀록났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봉투를 건네는 모습을 잠시 멍하니 응시하다, 뒤늦게 그녀가 건넨 봉투를 받았다.


이미 한차례 뜯은 자국이 있지만, 그거야 뭐 알바는 아니고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종이를 꺼내어 펼쳐봤다.


무어라 길게 쓰여있기는 하다만, 결과적으로 예선을 합격했다는 내용. 아마 이것 외에도 후원단체라던가 몇몇 다른 곳에서 봉투를 보내왔을 터지만 그런 잡다한 것까지 들고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마 그녀 딴에 잘 처리해 줬겠지. 이런 쪽은 나보다 그녀가 더 잘 아는 분야이니.


“뭐.. 그렇게 됐다.”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아쉽게 됐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볼에 바람을 넣고는 쏘아붙였다.


“뭐야! 그 은근히 걱정해주는 듯한 말투는…! 필요 없거든?!”


“필요없긴 뭐가.”


하루도 빠짐없이 종례가 끝나면 이곳으로 달려오던 그녀다. 이년은 매번 이상한 가요나 밴드노래 같은 것들을 들고와서는 부지기수로 내 명상을 방해하곤 했다.


헌데 이주 전 즈음이었던가, 열에 아홉은 모습을 드러내던 그녀가 일주일을 통으로 이곳을 찾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공백기에 해당하는 기간인 이주 전 즈음은 리즈 콩쿠르 예선 기간이다.


“…뭐가.”


대략 한달 전 즈음 부터, 뜨문뜨문 잡다한 이유를 붇여가며 일찍이 자리를 뜨거나.


부탁받았던 화성 정리 자료를 가지고 그녀의 집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예고한 바가 있었음에도 마치 뭐 이상한 걸 하다 들킨 꼬맹이처럼 화들짝 놀라거나.


뭔가 시이하고 기이한 스탠스를 취하기 시작한지는 한달.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일주일.


나는 그 일련의 행태를 되짚어보며 어디사는 탐정 꼬맹이처럼, 오늘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뭐.. 솔직히 근래의 그녀의 행태를 보면 의심이 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징그럽게도 오래 붙어 다녔으니만큼.


그렇게 알아낸 사실에 의하면.


“……….”


아마, 그녀도 예선에 나갔을 것이다. 아마 아버지의 인맥을 빌려 어디선가 추천장도 받아내 내가 알지 못하게 신청을 했겠지.


그렇담 왜 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일까. 부끄러워서?


그건 아닐 것이다. 고작 부끄럽다고 신청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이라면, 애초에 그녀가 내게 피아노를 배울 일도 없었겠지.


그렇담 어째서일까.


아마 그녀가 생각했던 건 두개의 통과 봉투를 들고와 나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 와 같은 것이었겠지.


“…왜 그렇게 보는건데.”


평소처럼 밝게 웃지만, 유감스럽게도 타인을 관찰하는 데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경지에 이른 나다. 


이는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고 다사다난한 어린시절이 내게 유일하게 안겨준 능력이라면 능력인 것이었다.


여하튼, 어디사는 닌자의 눈처럼 붉게 물들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뛰어난 관찰력을 바탕으로 보건대.


“기특해서?”


“……무,뭐?!”


그녀는 지금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 * *




“어머, 다녀왔—”


“네.”


쿵—!


“어머, 싸가지.”


거센 소리를 내며 닫힌 방문에 뒤이어 띠리링— 소리를 내며 닫혀지는 현관문.


귀엽디 귀여운 동생이 한 껏 찡그려진 얼굴로 들어오더니 금세 방으로 들어가선 문을 틀어잠군다.


“…또 뭔 일이래.”


약간의 걱정이 묻어나오는 눈길로 동생의 방문을 쳐다봤지만, 문은 이미 얕은 미동도 없이 굳세게 잠긴 후.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언니를 보고는 품에 달려와 안기지는 못할 망정 사춘기 소녀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가정과 단절을 고해버린다. 이젠 좀 익숙해졌다만, 역시 좀 섭섭함과 치사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거두고 소파에 몸을 뉘였다.


나직이 한숨을 쉬고, 잠시 내가 이러려고 저 기지배를 업어 키웠나. 하는 아련한 시선으로 먼산을 쳐다보고 있자니.


돌연, 단절된 동생의 방에서 익숙한 피아노 멜로디가 들려왔다. 얘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피아노를 치다니.


하지만,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또 제이 팝인지 뭔지 하는 요상한 노래일지도 모른다. 싶어 귀를 기울인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여졌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멜로디였기 때문이다.


쇼팽 에튀드 연습곡 5번. 


쇼팽 에튀드 중에서도 압도적인 인지도를 가진 그것은 대중들에게는 ‘흑건’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백건’으로 편곡되어 나와 대중들이 가장 잘 아는 클래식 음악 중 하나라해도 과언이 아닌 곡이다.


뭐.. 사실,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온 것 때문에 대중들 사이에서는 흑건의 인지도가 천정부지로 올라간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음악의 길을 걷는다 자부하는 자가 피아노의 기틀을 닦고 뿌리를 퍼뜨린 위인(偉人)의 음악에 영화라는 사족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영화가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고, 나는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중심과 테두리를 분명하게 나눠야 할 의무를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길 뿐이다.


절대로, 그 ‘말할 수 없는 비밀’로 인해 어딜 가나 들려오는 흑건의 소리에 진절머리가 나는 것을 변명하는게 아니다. 


…아니, 그래. 뭐 솔직히 좀 이상하지 않은가. 평소에는 피아노나 클래식 하면 진부하고, 틀딱(스무살이다)같고, 뭔가 고지식한 그들만의 리그 취급이나 하는 치들이 주변에 피아노 좀 친다 하는 자들이 있으면 우루루 몰려가서 아는 척이라도 해보려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말하는 꼴이란.


평소에는 BTS의 신곡이 나왔니 뭐니 하며 가사나 안무 토 씨하나 안틀리고 외워버리는 년들이 클래식에는 왜 혀를 내두르는지. 대중적 인식이라는 것도 참 뭣하다. 실용음악에는 그리도 열광하면서 ‘고전’의 ‘고’만 나와도 인상을 찡그린다. 솔직히 실용음악이란 것도 고전음악의 한 분파가 아닌가. 모든 것의 뿌리에는 음표가 있기 마련이고 고전음악의 양식이 있기 마련인데, 어찌 역사를 잊은 민족과 같은 아둔하고도 단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를 배척하는가.(솔직히 배척이라기보단 그저 관심도가 낮을 뿐이긴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냥 부모님이고 뭐고 실용음악이나 배워서 적당한 곡 하나 만들어서 연금이나 타먹는 건데.


물론 어렵기야 하겠다만은 솔직히 객관적으로 봤을때 나름 자신은 재능도 출중한 편이었고, 없는 인지도를 만들어낼 인맥 또한 갖추고 있었다.


솔직히 요즘 공장제마냥 찍어내는 곡 꼬라지를 보면 차라리 내가 만드는게——


“…흠.”


그녀는 얕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가슴 속에 응어리진 심마(心魔)를 다시 억눌러 잠재웠다.


비록 약간의 편집증적 성격은 예술가의 생명과도 같은 것인지라, 완벽히 떨쳐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다행히 종말론을 줄줄이 외는 세기말의 음악가에서 평범하게 동생을 걱정하는 언니의 포지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언니의 시선으로 봤을 때 동생이 짜증을 부리며 집에 들어와서는 바로 피아로를 켜는 모습은 그다지 청신호가 아니었다.


눈에 넣어도 안아플 귀여운 동생이지만, 그 속은 사탄마구니가 가득한 모순의 집합체. 그것이 바로 내 여동생 정수아의 정체성이 아니었던가.


추가로 당연한 소리지만 사탄마구니는 클래식같은거 안친다. 더군다나 흑건은 음악가임과 동시에 신학도의 길을 걷기도 했던 바흐를 열렬히 추종한 쇼팽의 음악이 아닌가. 어디 성불당할 일 있나.


“흐으음….”


수아가 클래식같은 건 좆까라며 부모님의 가슴에 비수를 박아넣고 사마외도와 같은 실용음악에 몸을 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 불과 수년 전의 이야기.


헌데 자신이 몇주간 집을 비우고 다시 돌아오니, 치고있는 건 또 클래식이네?


고작 이 몇주라는 자신이 없던 공백기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분명 중요한 일이라도 있던 것이라면 엄마나 아빠가 문자를 남겨놨었을 테고, 그것도 아니라면 운전사 아저씨가 말을 해줬을 텐데….


“아.”


순수하게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녀의 기복이 어디에서 기인했을 지 곰곰히 생각해보던 수련은 나지막이 탄식을 내밷었다.


지금 시기는 하반기 가을. 다소 길었던 영국에서의 투어로 잠시 계절감이 흐트러져 잊고있었다.


‘리즈 콩쿠르.’


4년 주기로 열리는 리즈 콩쿠르. 분명 기억하기로는 내년 중반기 즈음에 시작한다고 들었는데…


수련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캘린더를 확인했다. 날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찬 일정표에 잠시 어지러움증을 느낄 무렵, 그녀의 눈에 한가지 노랗게 칠해진 일정표가 들어왔다.


‘리즈 콩쿠르 예선.’


노란 형광펜으로 주우욱 그려진 선의 끝은 저번주 일요일을 가리키고 있었고, 붉게 칠해진 형관펜이 정확히 오늘에 지익 그어져있다. 


그리고 내용에 해당하는 그 위에 쓰여진 검은 글씨를 확인하려던 순간.


띵동—


현관벨이 울렸다.


곧 저녁 시간일텐데, 누가 찾아온 걸까. 갑작스런 벨소리에 반사적으로 수련의 시선이 옮겨졌고, 뒤이어 굳게 닫친 동생의 방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없다고 그래!”


마치 누가 온 건지 알기라도 하는 모양새.


호기심이 동한 그녀는 방금 확인한 정보를 머릿 속에 저장하며 몸을 일으켰다. 꽤 편히 쉬긴 했는지 찌뿌둥한게 기분좋은 저릿함이 몸에 감돌 무렵.


[수아 있나요.]


현관 카메라에 잡힌 손님의 면면을 확인하자, 그녀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아하~”


준수한 외모덕에 흉해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였구낭~”


어딘가 여우의 음흉함이 묻어나오는 듯한 미소였다.



* * *



“우리 현이 오랜만이네?”


“…왜 우리 현이인 겁니까.”


“에이~ 우리가 남이가! 섭섭하게 왜그래. 누나 지인짜 힘들게 몇주간 타지생활하다가 왔는데, 안보고 싶었어?”


“예.”


“….”


“조금?”


“여..역시 그렇지? 하하 난 또 우리 현이가 나 싫어하는 줄…”


친구의 누나란 건 생각보다 대하기가 힘들다.


완전히 남이라기엔 친분이 걸쳐져 있고, 게다가 그녀의 누나는 어찌보면 내가 그리는 이상향(음악적 소양에 대한 이야기다.)에 한발 걸쳐져 있는 인물이니 만큼 뭔가 수아를 대하는 것처럼 허울없이 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어깨 동무는 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