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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로 해군을 갔다오고나서 무작정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별다른목표가 없었기에 이리저리돌아다녔다. 산을 올라타고 강을 넘으며 여러지역에서 자다가나왔다. 돈이 그렇게많은편이 아니라서 일부지역에 오면 몇달동안은 단기노동을 하였다. 노동일수는 그렇게많지는 않았다. 다른지역에 가면 일을 먼저구하고봤다. 별로 정착하고싶지는 않았다. 처음온도시도 몇달이 지나면 질리길마련이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때도 있었고 배타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으며 시골에 가서 소작을 하기도했다. 가끔은 정겹게 비가 오기도한다. 기차를 타거나 시외버스를 타면서 추억을 떠올리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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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을 시작했을때부터 가지고있었던오래된물건들. 고등학생때부터 써온서류가방, 10년전에 발매된지도책, 도시락상자, 건전지로 작동하는 손전등과 라디오, 외투, 지갑, 물병, 도끼, 카메라, 주민등록증, 전역증, 한달에 한번쓰는일기장. 필요한다른물건들은 다른지역으로 이동할때마다 사오거나 만든다. 대표적으로 지게. 철물점에서 살수있는 쇠파이프와 노끈, 비료포장지로 간단히만들수있다. 오래쓰다보면 부서지기때문에 여러번다시만들곤 했다. 여정을 시작했을때는 나무로 만들었었는데 나무를 자르면안되는지역에서 걸려가지고 파출소에 끌려간적이 있기때문에 그때부터 지게의 재료로 쇠파이프를 썼다. 따지고보면 '배낭여행'이 아니라 '지게여행'이라고 할수있겠다. 그래도 배낭보다는 지게가 더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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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내가 배낭여행을 그만두었다. 배낭여행을 시작한지 10년, 벼농사를 짓는지역에 있었다. 일손에 합류해서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하고나서 쌀반가마니와 여분의 돈을 받았다. 겨울의 농촌은 쉬기때문에 도시로 가야만 일을 구할수있었지만 몇달동안본 저기먼산에 가보고싶었다. 면사무소를 기준으로 지도책을 잡아보면 그산은 2km가 약간안되는높이라고 알수있다.. 하루에 몇백미터만 가도 일주일이 채안되기에 인생에 한번쯤은 가볼만하겠다. 필름이 세장분량정도 남았지만 혹시몰라서 도시로 나가 필름다섯통을 사서 다시돌아왔는데 도시로 나올때는 30년이 지나있을줄은 그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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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래생각을 아얘안하지는 않았다. 끝이 없을배낭여행도 쉰살이 넘어가면 할수없어질게 너무뻔했다. 그래서 일기를 쓰고 사진도 찍었다. 이런배낭여행은 나말고 한사람이 아마도 없을것이 분명하다. 그나이가 되면 일기와 사진을 정리해서 책을 쓰면 인세를 받아서 노년을 즐기면될것이다. 그동안 한달에 일기를 한편, 사진을 세장찍었으니 제1권과 제2권으로 나누면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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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동안 열심히등산한덕분에 산정상에 올라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내려갈때는 올라갈때 밟았던길과 달리 인적이 드문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돌무더기를 넘다가 화전민들의 마을을 발견했는데 그게 내인생의 변곡점이 되었다. 해가 지고있었고 눈도 세차게내렸기에 거기서 취침을 해결해야만했다. 마을로 들어서니 약간 누리끼끼하고 어두운한복을 입고있는여자들이 나를 반겼다. 나날이발전하고있는대한민국에서 아직도 한복을 시시때때로입고있는이들을 보면 너무이상했지만 그들의 말을 들으니 사정을 이해할수있었다. 40년전에 산사태로 길이 끊겨 여기서 계속살고있다고했다. 손으로는 돌무더기들을 치울수는 없었다고한다. 그러면 여자만 있는까닭은? 산사태때문에 남자아이들이 죄다죽었고 우연인지 뭔지 여자아이들만 태어났다고한다. 그나마있던나이있는남자들은 최근에 수명을 다해죽었고. 이 마을에는 희망이 더이상없었지만 내가 와서 희망이 다시생겼다고했다. 나는 돌무더기를 충분히넘나들어 나갈수있었지만 그들이 불쌍해서 돌무더기를 치워주기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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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는건 멈추지않았다. 여기에서의 삶은 가치있게될것이다. 그리고 나는 별수없는선택을 했다. 혼인을 하지않은세여자에게 아이를 만들어줬다. 다른지역사람들은 그나이에 받아주지않을게 당연했다. 평생독신일줄만 알고있었던나에게 마을사람들이 붙여줬다. 하고싶지는않았지만 그들은 아이없이 삶의 종을 치고싶지않았다. 이 마을에서 가장어린세사람이었지만 혼인할만한사람이 없어서 나와 나이대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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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밀기에는 너무무거워서 단단한나무로 지레를 만들어 작은돌들을 밑으로 굴려내렸다. 보리농사도 지었고 마을사람들에게 한글과 산수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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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더기들을 모두치우더니 10년. 마을사람들의 인적사항을 조사하고 모든짐을 챙기고나서 산밑으로 내려갔다. 벼농사를 했던그지역으로 돌아왔다. 마을사람들을 주민등록해주려고 면사무소에 갔는데 나는 법적으로 죽은사람이었다. 10년동안 소식이 없어서그렇지. 그래서 법적으로 부활했다. 10년이 지나서 이 지역도 많이발전했다. 솔직히 사람수는 줄었다고하지만말이다. 사진사는 진작에 은퇴해서 인화를 할수없다고했다. 돈을 주니까 도시에 있는 사진관에 보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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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들과 같이 마을로 갔다. 마을사람들의 주민등록을 위해 조사해야하기때문이었다. 10년동안 태어난내자식들(아들 세명에 딸 일곱명)은 학교를 가야한다고했다. 한달간은 뒤늦게라도 새마을운동을 하는듯 트럭이 오고가고 초가집들이 슬레이트판자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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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이 나를 버스터미널로 부르더니 고향에 돌아오고싶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했다. 그동안쌓아온경력이 형편없고 기술도 없고 터전은 그 마을에 잡았고 꾸려나가야할가족도 있기에 떠날생각이 없다고했다. 면장은 부모얼굴은 봐야하지않겠냐고물었는데 난 사실 고아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고아원에서 쭉살아왔다. 내 사정을 이해한면장은 가지온돈으로 버스표대신 아이들에게 줄 학용품들을 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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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장도 한장밖에 안남았고 필름도 한번찍으면 끝이다. 환갑이 오기까지 하루남았다. 인화한사진도 잘받았고 책내는것도 준비해야지. 근데 내 맏딸은 책이라는구식기술을 쓰면 절대로 인기가 없을거라고 신신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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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그런지 몸이 안좋아져 도시에 있는병원에 입원했다. 사회와의 교류는 빈번했지만 그때이후로 도시를 이제서야 오게되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건 참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