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 또 온다. 고글 껴."


잘난 년의 다급한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꺾었다. 과연,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좆나게 큰 폭풍이 똬리를 틀며 모래란 모래를 그 몸뚱이에 있는 대로 처바른 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염병한다 진짜, 오늘 하루만에 본 폭풍만 세어도 열 손가락 다 채우겠네."


"기관지에 모래 코팅할 생각이면 안 말리련다."


의리도 공감도 없는 년은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또 지만 몸이지, 속으로 투덜대며 나도 왼쪽 팔목 언저리를 더듬었다. '보험'은 언제나 왼쪽 팔목에 감아두기, 언제라도 먼지로 흩날릴 수 있는 우리들끼리의 몇 안 되는 약속이었다. 지이이- 고막을 먹먹하게 하는, 언제 들어도 익숙할 리 없을 듯한 소리와 함께 무형무색의 막이 몸을 조이는 것이 느껴졌다.


"넌 씨, 하나밖에 없는 파트너한테 그게 할 소리냐? 저번부터 느꼈지만 넌 진짜 하품해도 눈물 한 방울 안 튀어나올 거 같다. 진짜 속상해서 참……."


"나한테서 유대감을 느끼고 싶으면 먼저 입부터 다물어. 3분도 채 버티질 못하고 쫑알쫑알, 듣는 사람은 생각도 않고."


"그건 네가 말 한 마디도 없는 냉혈한이니까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그런 거지! 아이스 브레이킹 몰라?"


내 진심 섞인 외침은 언제나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년의 철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보다 정확히는 타이밍 나쁘게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당도한 눈치 없는 모래폭풍의 굉음에 묻힌 거지만, 이 년이 바람에 숨어서 코웃음쳤다에 내 얼마 없을 수명의 절반 정도는 걸 수 있다. 그러고도 남을 년이니까.


"하, 씨팔 진짜. 운도 지지리도 없지."


짜증을 가득 담아 뱉은 침은 입을 떠나기가 무섭게 온몸을 짓이길 기세로 퍼붓는 돌풍에 휘말려 자취를 감췄다. 뒤따라 우리를 기어이 찢어놓겠노라며 선언하기라도 하듯 일직선으로 다가온 폭풍이 어마무시한 힘으로 '보험'의 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번 놈은 언제 끝나나 몰라."


"……."


"야, 또 안 들리는 척 하지 말고 그 잘난 잔재주 좀 뽐내봐."


"……."


"계속 그렇게 내 말 씹으면 내가 자기 전까지 계속 말 건다? 너 말고 내가 잘 때까지."


"지금. 그러니까 이제 쉿."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 같은 이 통신 기능은 영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평소처럼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는 년의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혀 자꾸만 귓구멍에 손이 갔다. 그 불편한 감각과는 별개로 년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는 점에 감사해야 할까. 귓구멍에 손가락 박고 두어 번 휘저을 즈음, 폭풍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퍼런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보험'을 끄고 다시 날 것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후, 머리를 매만지며 앞서가는 년의 뒤를 좇아 걸음을 재촉했다. 퍼서석, 폭풍에 휘말린 모래 입자가 기존의 모래와 한데 뭉친 덩어리들이 낡은 부츠에 밟혀 바스라졌다.


"끄으으, 옘병할. 여긴 뭔 물건이 잠들어 있길래 날씨가 이리도 지랄맞나 몰라."


일부러 열받으라고 기지개를 요란하게 켜며 말을 걸었지만, 년의 눈에 살짝 생기가 돋는 걸 보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알고 싶어?"


"하, 조졌네."


말 그대로 조졌다. 이 년이 이렇게 눈을 빛내며 '알고 싶냐'고 묻는 건, '지금부터 난 이 지역의 역사와 찾는 물건과의 연결점, 그것이 가지는 온갖 가치들에 대해 일장연설을 펼치겠다'고 선언한 꼴이나 다름없으니까. 난 역사는커녕 당장 일주일 전의 오전 7시에 뭘 했는지조차 모르는 인간인데, 대체 그 까마득한 과거가 뭐가 재밌다고 저리 극성인지 참 알 수가 없다.


"여기는 '가라앉는 방주' 프로젝트의 연구동이 있던 곳이야."


그런데 이게 뭔 일이람. 이 년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대충 흘려듣기엔 너무 익숙한 부류의 것이었다. 평생 목숨 보전에만 온 신경을 쏟겠다 다짐한 나조차 알 만큼, 너무 친숙한.


"가라앉는 방주."


전 세계의 모든 유기물을 대상으로 한 대행성급 프로젝트이자 쇠락해가는 지구 문명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AI 기반의 구원 시스템. 인류라는 한 행성의 지배종을 한순간에 에너지원으로 치환하고, 수천년에 달하는 찬란한 과학 문명을 몇천만년 전으로 후퇴시킨 사상 최악의 작전이 화두에 오르고 말았다.


"응, 가라앉는 방주. 대외적으로 나돌던 양산형 쓰레기들 말고, 원형-프로토타입이 아직 여기에서 기동하고 있을지도 몰라."


"오호. 그렇다면 이 모래바닥 아래에 있다는 말이렷다?"


우리 엄마를 생매장해버린 씹새끼의 본체가.


"그쯤은 되어야 이 근본 없는 날씨의 이유도 설명이 되니까. 그럴 확률이 높을 거라고 봐."


그렇게 말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훑던 년이 어느새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꺼내 내게 향했다. 파란색 바탕에 모서리에 금칠이 된, 다소 낯선 모습의 카드가 내 명치 앞에 도달했다.


"뭐야, 이거?"


"액세스 카드. 들고 주변 좀 돌아봐. 폭풍 오면 방향 꼭 숙지해서 말해주고, 색이 조금이라도 바뀌거나 하면 그 자리에서 '보험'으로 나 불러."


"이젠 노골적으로 짬 때리려고 하는 거 봐. 넌 뭐 할 건데?"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처럼 무시하는구나 싶어 몸을 돌리는 바람에, 이 년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을 놓칠 뻔했다.


"…예전에 했어야 했던 거."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내려다본 액세스 카드인지 뭔지는 내 악력쯤은 우습게 버티는 탄력 있는 소재로 만들어진 건지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