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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가 카이로 회담 출발 전에 휘하의 군사위 참사실에서 올린 의제로 중국 영토 회복 다음으로 한국 독립 승인 건이 올라 있었고, 국방 최고위 비서청에서 올린 의제에도 정치 부문에서 첫머리에 한국 독립 건을 내세웠다. 장제스가 카이로로 떠나기 바로 전날의 일기(1943년 11월 17일)에도 회담의 의제를 기록했는데 조선 독립 항목이 들어가 있고, 의제 전 항목도 국방 최고위에서 제출한 내용과 같았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이 즉시 한국의 독립을 공동 혹은 개별적으로 승인하거나,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한다"는 조선 독립 조항을 위한 교섭 지침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장제스의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강고했다. 회담 중 걸림돌이 발생할 경우의 전략까지 언급했는데 "한국 독립 조항이 미·영의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아 선언에 삽입할 수 없게 된다면, 중국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일본 패망 후에 한국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정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염려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소련 역시도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은 관계로 의견 제시가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장제스는 영국 때문에 미·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이 주저하게 되겠지만, 중국이 독단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세계는 연합국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게 되고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결국 영국과 미국의 타협안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중국의 판단대로 흘러갔고 장제스의 강경한 태도에 반대 입장을 피력한 영국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 후에 장제스는 한국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이라고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었다. 출처 https://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127_0010442823&cID=10101&pID=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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