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디컬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여성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래디컬 페미니즘이 여성이 잃어버린 권익을 되찾아옴과 동시에 여성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해악과 진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해악, 그리고 페미니즘을 확산시키고자 하는 자들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20세기 미국의 백인 여성 중심의 페미니즘 운동이 전개된 양상을 참고하면 됩니다.


여성에 대한 참정권 부여와 자유로운 직업 선택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출몰한 페미니즘은 당대 여성 지식인들을 고무시켰습니다.


여성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여성도 남성들만 누리던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상류층 백인 여성 지식인들만의 것이었고, 사회의 최하층에서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고 있던 유색인종 여성, 극빈층 여성들에게 전혀 와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 교육을 받고, 자신처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와 결혼한 여성들이었습니다.


가사노동은 가정부를 고용하여 해결할 수 있었고, 육아 역시 베이비시터나 가정부에게 전담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축소되자 여성들은 남자들의 영역이었던 '자유로운 직업 선택'과 '참정권'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도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기득권은 그러한 요구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교육 받은 여자들도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것, 정치에 참여해 본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상류 사회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엔 직업 선택의 자유라던지, 정치 참여의 기회라던지 그들이 주장하는 것들과 동떨어진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빈민층 여성들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가게 점원이 그나마 사정이 나았고,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가거나 심지어 몸을 파는 일이라도 해야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루 벌면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비참한 사람들의 현실을 엘리트 여성들로 구성됭 페미니즘 집단은 외면했고, 실제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사는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투표소로 끌여들여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치인에게 표를 던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성 해방'을 외쳐댔지만 그들이 진정 원하는 건 여성 해방이 아닌, 기득권 획득과 부의 유지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활동을 통해 진짜로 '해방'된 여성은 없습니다.


이미 가질 만큼 가진 엘리트 여성들은 기득권으로 올라서기 위한 허들을 낮추는 데 주력했고, 인종차별과 양극화로 고사되어가는 여성들의 삶은 더 비참해졌으면 비참해졌지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백인 엘리트 중심의 페미니즘 운동의 해악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가 되기 시작한 건 고등 교육과 여성해방에 관심을 가진 흑인 여성들이 대학가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고부터입니다.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는 대학을 다니며 백인 페미니스트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여성의 발언권을 철저히 통제하려 들었으며 빈민층 여성들을 포괄하는 여성 해방론을 외치는 것에 대해 격한 반발을 보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 이론은 엘리트 여성의 기득권 획득을 위한 차별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용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벨 훅스를 비롯해 기존 페미니즘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지식인들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흐름은 차별주의와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의 행태를 돌아봅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여성 해방'을 외치지 않습니다.


남성들에 대한 여성들의 적개심을 자극하여 사회를 남자 대 여자의 구도로 갈라놓고, 여성 여론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조종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여론을 등에 업고 정계로, 학계로 진출을 모색합니다.


적당한 위치에 올라선 이들은, 기존의 부패한 기득권이 그랬듯 남성들을, 그리고 여성들마저 착취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은 신분상승의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헛된 망상에 경도된 페미니스트들은 기득권으로 올라서려는 자들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그들의 장기말로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의 병폐는 이미 깊숙하게 뿌리내렸고,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반지성주의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때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페미니즘 때문에 뉴질랜드가 망했다는 가짜 뉴스가 횡행한 적이 있습니다.


페미니즘 때문에 남자들이 뉴질랜드를 떠났고, 경제활동 능력이 없어진 여자들이 관광객들에게 몸 파는 게 유행하게 되었다는, 뉴질랜드인들이 들으면 분개할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병폐를 극복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미래는 그 가짜 뉴스에서 이야기한 뉴질랜드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회를 분열시켜 기득권을 '탈취'하려는 가짜 여성해방론자들을 극복하기 위해선, 이러한 문제를 논리적이고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절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