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은 소련을 공격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발렸다. 할힌골전투 함 찾아봐라. 그리고 나중엔 각자의 관심사가 달라.. 소련은 유럽 일본은 남방.. 아예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다. 2. 일본은 호주를 공격하려 과달카날과 파푸아뉴기니까지 갔지만 실패했다. 미국쪽 동태평양과 아시아-호주쪽 서태평양을 가르는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전투가 태평양전쟁의 분수령이었다. 3. 초기엔 이탈리아군이 사기 하나는 최강이었다. 다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연달은 패배가 결국 사기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통일후 수십년이 흘렀지만 아직 제대로 중앙집중화된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군 시스템이 없었다. 그리고 무솔리니로 대표되는 정치꾼들의 무대포 전쟁 결정.. 준비가 안된 군대를 전쟁터로 밀어넣는 오판.. 군사논리를 완전히 무시한 그런 정치꾼들의 정치논리 등등이 대표적인 원인들이다.
1: 일본은 1933년 만주사변이후 소련이랑 국경문제로 오랜 분쟁을 일으켜왔습니다. 장고봉 사건이나 건자차도 사건등 여러분쟁이 벌어지며 갈등이 쌓여왔고 그 갈등은 할힌골 전투(일본측은 노몬한 사건)라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의 막강한 화력에 부서지고 소련의 명장 주코프 장군의 지휘아래 일본군들은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일본은 할힌골 전투의 패배로 큰 충격을 받았고 가뜩이나 중일전선도 시급한 마당에 소련까지 적으로 돌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소일불가침조약을 맺게됩니다. 거기에다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독일의 오판도 있었는데 히틀러는 소련 침공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일본에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본이 조만간 소련이랑 불가침조약을 맺을것이라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그 사실을 숨겨왔습니다. 물론, 나중에 독소전쟁에서 계속 승승장구하던 독일은 일본한테 독일이 어느 도시를 점령하면 같이 양면전쟁을 벌이자는 협의안을 받았긴 하였지만 하필 그 도시의 이름이 바로 스탈린그라드........
2: 일본군이 호주까지 내려가지 않은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상륙할 육군이 별로 없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일본 육군의 대부분은 중국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고 태평양 전쟁 발발시때도 없는 병력을 겨우 차출해서 남방으로 보낸 것입니다. 어쨌든 일본군은 그나마 그 있는 병력으로 간신히 뉴기니 북부를 함락하긴 했지만 호주를 침공하려면 현 파푸아뉴기니의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를 공격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뉴기니 섬 북부와 남부는 거대한 산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에 일본 해군이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려 했으나 산호해 해전에서 패배하고 해군의 작전은 실패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육군이 나섰지만 그 결과는 코코다 트랙 전투라는 임팔작전의 마이너 버전 참사가 일어났고요. 나중에 해군이 다시 어느 전투를 끝마치고 포트모르즈비를 공략하려했지만 하필이면 그 전투의 이름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인지라.....
3: 이탈리아는 유럽 참전국가들 중에서 공업력이 상당히 후달리는 나라였습니다. 어느정도냐면 그 마이너한 추축국인 루마니아한테도 밀리는 정도..... 이탈리아는 우선 무기부터가 당장 상대해야할 영,프,미 연합국에 비해서 매우 딸렸고 양또한 매우 부족하였습니다. 그런 점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 복엽기를 보내 지원한 것만 봐도 알수가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지도층들은 자뻑에 취해 온갖 전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을 일으켜도 결국에는 힘이 부쳐 맨날 독일한테 도움이나 받아야 하니 당연히 사기가 저하될수 밖에 없었죠. 또다른 이유는 이탈리아군의 주 전선지가 바로 발칸 반도와 북아프리카였다는 점도 있습니다. 발칸 반도는 일단 점령은 했지만 엄청난 게릴라에 시달려야 했으며 북아프리카는 그 뜨거운 사막위에서 전쟝을 해야 했으니 군대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