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순 없는 법이다.


*


[“3통제반 관측보고, 적 케이트 편대, 8방향 12km 지점에서 아함 서편으로 접근중!”]


늦은 오후, 느닷없이 귓전을 때리는 관측보고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어뢰를 매단 채 아 함대의 호위전투기를 피해 몸을 비틀고 있는 뇌격기 무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석양이 짙게 드리워진 지금에서야 목표에 도달한 저들의 처지를 걱정해줄 만큼 이쪽 상황이 낙관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공격 이후의 상황을 장담하지 못하는 판에 행동을 강행한 걸 보면, 저쪽 머리들도 어지간히 급한 듯했다.


“하나포 확인했다 알리고, 베이커 사이트 사격통제 레이더 전파 조사 바람.”


함대 호위 구축함의 대공화망을 무시한 채 곧장 이쪽을 향해 날아드는 적기의 수가 셋, 넷, 여섯….


석양을 등진 검은 실루엣들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고 있었고, 우현 전타와 함께 드문드문 비어있던 대공포좌를 향해 내달리는 수병들의 모습은 더 이상 느긋하게 무전기나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반증했다.


무전을 친지 얼마 되지 않아 FCT망에 불이 들어오고, 지령신호에 맞춰 선도각을 먹여주자 포신이 8방향 1524밀을 향해 지향되었다.


“어째 요즘들어 구멍 뚫리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반장님.”

“그러게. 아이스크림은 지들끼리 죄다 처먹는데 말야.”


왼편에서 탄박스를 끌어안은 채 불평을 늘어놓는 병사 하나에게 그리 답해주는 찰나, 3방향에서도 편대 하나가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이어졌다.


원래 함대방공은 항모에서 이함한 전투기들이 맡고, 우리같은 방공포병들은 조종사 나으리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항공전력끼리의 난전이란건 필연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을 불러오기 마련이고, 그런 난전속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여줘야 하는 것도 우리 방공포병들이었다.


“옵니다.”


적기가 유효사정권 내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통제반의 무전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환형 조준기에 바짝 눈을 붙이고 있던 병사의 읊조림이 이어졌고, 이쪽에 할당된 FCT의 사격제원이 동일한 걸 확인한 나는 그대로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외쳤다.


“쏴!”

‘쿵!’


장약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주먹만 한 빛덩이들이 긴 꼬리를 그리며 나아갔고, 그와 동시에 화약지린내 섞인 가스가 밀려 듵어와 코끝을 자극했다.


“제원 수정, 8방향 3km 1420밀!”


바로 옆과 맞은편에서 날아드는 포탄들은 적기가 진입 중인 공역을 향해 십자포화를 수놓았고, 실시간으로 수정되는 사격제원에 맞춰 불을 뿜기도 잠시, 쌍안경 너머로 선두의 뇌격기 하나가 균형을 잃고 곤두박질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1번기 격추, 사수 2번기 조준. 제원 동일! 탄약수 탄 32발 적재 실시!”


적기 하나를 격추한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뒤이어 날아드는 표적을 상대할 준비를 한다.


다음 표적은 어뢰를 떨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열을 이탈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쪽으로 접근하는 녀석, 설마 육탄 공격이라도 하려는 건가.


“반장님, 저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계속 쏴!”


이미 엔진에 불이 붙은 채 검은 매연을 토해내고 있는 표적은 여전히 이쪽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고, 거리는 조종간을 붙잡고 있는 놈의 표정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좁혀져 갔다.


‘펑!’


순간 귀를 찢는 폭음이 일었고, 그와 동시에 거의 코앞까지 날아들었던 표적은 문자 그대로 분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촌각을 다투던 방금전의 상황이 무색하게, 호위 구축함들의 대공화망이 이쪽과 겹쳐지자 얼마 되지 않던 적기들이 정리되는 것도 금방이었다.


이마에 일장기를 둘러매고 끝까지 조종간에서 손을 놓지 않던 녀석을 조각낸 것도 아마 호위 구축함의 방공포였겠지.


스스럼없이 어깨에 팔을 두르는 부사수나, 건너편에서 탄약수의 뺨에 입을 맞추는 둘포 반장이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조금 이른 작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그게 나쁘단 건 아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불과 몇십 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걱정해야 했었다는 것이.


다만, 이번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


커튼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코끝을 간질인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창밖을 내다보니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지난 전투 이후 수리와 보급을 위해 진주만에 입항 한지도 벌써 일주일.


지금도 맞은편 침대에서 배를 까놓고 자고있는 항공대 소속의 이름 모를 중위 나으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수병들 대부분이 이 잠깐의 휴식을 각자의 방법대로 즐기고 있었다.


더 자기도 뭐해서 병영식당으로 나가 커피 한 잔을 얻어 들고 두어 시간 전쯤 나이 지긋한 CPO들이 읽다 말았을 법한 신문을 주워들자 1면부터 재미없는 기사가 실려있는 게 눈에 띄었다.


‘사쿠라 엠파이어, 군사실무회담 또 거절. 그들은 진정으로 공멸을 원하는가.’


마셜제도에 있을 때부터 떠돌던 휴전협정에 대한 소문은 말 그대로 뻐꾸기였던 셈이다.


하긴, 공동선을 추구한다곤 해도 근본부터가 다른 것들하고 대화가 통할 리 없지.


정치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상황은 나 같은 말단 군인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요원하기만 했다.


세이렌과 레드 액시즈, 아즈루 레인의 지루한 3파전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 각국의 국민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영위하고 있는 일상과 한시적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이어지는 협상과 결렬, 재협상과 일방적인 파기 통보는 민간인, 군인 할 거 없이 피를 말려대기에 충분했고, 그 과정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 죽어 나가는 건 우리 군인들이었다.


“소위도 지금 일어난 건가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파자마를 차려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CVL-29 바탄. 내가 승함중인 배의 정신체였다.


선이 가는 몸매에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푸근한 미소가 인상적인 친구.


대다수의 수병들은 워싱턴이나 노스캐롤라이나 같은 육감적인 모델을 선호하고 있었지만, 이들의 본질을 생각하면 외형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뭐, 그런 셈이지.”


재주도 좋게 커피에 병아리 모양 쿠키까지 얻어온 녀석에게 그리 답하며 테이블 구석의 각설탕 상자를 건네주자 꾸벅 고개를 숙인다.


함장님 하고도 말을 편하게 하는 존재에게 인사를 받다니, 이 짓도 오래 하고 볼 일이다.


“아무 일도 없을 때는 혼자 느긋하게 뒹굴거리는 게 최고야.”

“어쩐지 알 것 같네요.”


아무렇게나 던진 그 말에 공감해주는 녀석의 얼굴엔 아직도 졸음이 잔뜩 걸려있었다.


아침잠이 많은 전쟁 병기라…. 우리와는 본질부터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존재가 이런 인간적인 면모도 보이고 있는 건, 처음 칸센이란 존재를 만들어낸 이들이 의도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거만 한 악취미도 없을 거다.


“다음 주 목요일이 다시 출항이던가?”

“네, 이번에도 TF58 체제로 움직일 거래요.”

“또 정규항모들 똥받이나 하겠‥ 아.”


거기까지 말하고 무언가 실수했음을 깨달은 나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틀린 말도 아니고.”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리 답하는 녀석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입이 거친 말단 군인의 실수 정도로 여겨준 걸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거라면 나중에 사과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실제로 우리를 포함한 경항모들은 TF 내에서도 패트롤이나 대잠전 지원 같은 허드렛일이나 하는 게 현실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방금전의 태도도 그렇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아이스크림이라도 많이 챙겨주면 좀 열심히 해볼 마음이 생길 텐데.”


전혀 엉뚱한 쪽의 푸념을 늘어놓은 바탄은 손에 들린 병아리 모양 쿠키를 머리부터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게.”


그런 거 없어도 그 미소를 계속 지켜볼 수 있다면 열심히 하고 싶어지지만.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그 말을 애써 속으로 집어삼키며 한동안 녀석의 옆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병영식당의 창문 너머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다가오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칸센지휘관도 아닌 군인이 녀석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봤자 위아래로 좋은 소리 들을만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어디 가세요?”

“잠이나 더 자두려고.”


그리고 그런 걸 직설적으로 내뱉어 녀석을 무안하게 만들 정도로 나의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다.


꾸벅 인사를 한 뒤, 다시 병아리 쿠키를 깨작대는 일에 열중하는 바탄의 모습을 뒤로하고 억지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갑작스런 만남에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을 메우기 시작한다.


당신의 눈부신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항상 수병들을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다소 유치하기까지 한 그 말 몇마디를 전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걷는 것도 잠시, 타이밍 좋게 칸센 지휘관 한 명이 부두에서 순양전대 소속 함선 소녀들에게 사열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수병들과는 다른 전장을 거닐고 있는 사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미없는 열등감을 드러내는 것보단 저 양반을 비롯한 칸센 지휘관들이 올바른 결단을 내려주길 바래야겠지.


이 전쟁에서 내 역할은 그저, 그렇게 쓰여질 부품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


진주만에서의 짧은 휴식이 끝나고 항해를 시작한 지도 보름, 마리아나 제도 폭격 이후 놈들이 절대 국방권이라 주장하는 방어선의 턱 밑까지 치고 올라간 우리 함대는 작전을 앞두고 한때의 여유를 즐기는 중이었다.


“별일입니다. 이 시기에 특식으로 함대 전 인원 아이스크림이라니.”

“한입 먹을 때마다 CPO님들한테 감사하면서 먹어라 임마.”


지난주에 상병으로 진급한 탄약수가 그리 말하며 막 받아든 아이스크림을 떠 넣는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단순히 병사들과 한 번이라도 더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을지, 아니면 일전에 바탄과 나누었던 잡담 중 그 아이의 푸념 섞인 바람을 이런 식으로나마 이룰 수 있어서였는진 모르겠지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출항 전 결산 중, 사기진작을 위해 희망하는 간부들끼리 돈을 걷어 아이스크림을 좀 더 사두는 게 어떻냐는 나의 제안을 두고 젊은 놈이 건방 떤다는 말을 안 들은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동의해주는 분위기였고, 함장님께서도 머리가 굳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내 사심 섞인 제안은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근데 인당 0.5파인트는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싫으면 그거 나 주던가.”


나의 재미없는 농담에 과장된 몸짓으로 등을 돌려 스푼질을 하는 녀석을 보고 포반의 병사들 중 몇몇이 소탈한 웃음을 흘렸고, 뒤이어 지난 휴식 중 작업을 걸었던 여자 얘기나 내기 포커에서 얼마를 잃고 벌었는지에 대한 잡담이 오고 갔다.


[“총원 전투 배치.”]


그렇게 막 다섯 스푼째 아이스크림을 입에 떠 넣으려는 순간 울려 퍼지는 자비 없는 상황 전파에, 나를 포함한 포반 전원은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덩어리째 집어삼키고 함수의 대공포좌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씨발 오늘은 좀 느긋하게 먹나 했다.”

“누가 아니랍니까, 저 새끼들 눈치 없는 건 알아줘야 합니다.”


사격에 필요한 기자재를 세팅 중이던 부사수가 나의 불만 섞인 혼잣말을 받아줬고, 그 눈치 없는 새끼들을 찾기 위해 헤드셋을 목에 건 채로 쌍안경을 당겨 봐도 톤이 다른 엔진소리만이 들릴 뿐, 비행운 한 줄기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탄을 포함한 함대의 항공모함에선 분주히 전투기들을 이함시키고 있었고 함대의 전투함들도 기동 대형에서 원형진으로 진형을 변경하는 걸 보아 적 항공 군집이 진입 중이란 건 확실해 보였다.


“아직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너무 호들갑 떠는 거 아닙니까?”

“이 짓 한두 번 하냐. 이러다 제원 뜨는 거 금방이다.”


아이스크림을 제대로 먹지 못한 게 어지간히도 불만이었는지, 탄약수는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 함대 호위 구축함들의 대공포는 침묵을 지키고 있고 통제반 직통의 무전기도 조용했지만 그건 바다에 붙어있는 우리들 사정이었고, 지금쯤 조종사 양반들은 저 위에서 그들만의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게 자명했다.


그걸 뚫고 들어온 놈들은 지금 막 불을 뿜기 시작한 전함과 호위 구축함들의 양용포 세례를 견뎌내야 했고 그 다음은,


“3통제반 표적 정보 갱신 바람.”

[“적 지크 편대, 6방향 7km 지점에서 아함 서편으로 접근 중!”]


우리가 일을 해야 할 차례였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공격대를 엄호해줘야 할 전투기들이 폭탄을 매단 채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거였다.


“표적 6방향 거리 5km, 사수 1번기 조준!”

“표적 포착!”


FCT에 표정된 제원은 정확했고, 큰 이변이 없다면 저 이상하리만치 정직한 비행을 하고 있는 전투기 무리가 이쪽의 대공화망에 걸려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거리 3km, 사수 1번기 사격!”

“1차 사격!”


옆에서 복명복창하는 사수가 사격 페달을 밟는 것과 동시에, 네 개의 포문에서 빛덩이들이 긴 꼬리를 그리며 나아가 허공에 파편을 흩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에 선 전투기 하나가 캐노피에 검붉은 얼룩을 남기며 추락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1번기 격추, 사수 2번기-”


문제는 지금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놈들은 전투기였고, 선두의 동료기를 방패 삼아 접근한 바로 그 전투기들의 기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는 것. 반사적으로 몸을 굽히면서도 다음 표적을 조준할 것을 지시했으나 내 목소리는 콩을 튀기는 듯한 기총탄의 파열음에 묻혀버렸다.


“사수 2번기 조준!”


대답이 들리지 않아 쌍안경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리자, 사수는 목에 총탄이 박힌 채 쉰소리를 내고 있었고, 맞은편에 앉아있던 부사수도 상황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막 호위 구축함의 방공포탄에 두 동강이 난 놈들 뒤로 또다시 수 대의 항공기들이 엄습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염병, 탄약수 부사수 잡고 2번 탄약수 자리 교대해.”


남은 병사들에게 임무 교대를 명령하고 사수석에서 병사를 끌어내린 뒤, 자리에 앉자 환형 조준기 너머로 이쪽을 향해 접근 중인 전투기 한 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직접 페달을 밟아보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지만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없는 자신도 만들어내야 하는 것 아닌가.


“뒈져, 씨팔 좀 뒈지라고!”


캐노피 너머로 무어라 고함치는 녀석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사격 페달을 밟는다. 자욱한 포연과 화약지린내를 남기고 나아간 포탄이 전투기가 지나온 자리를 뒤쫓듯 검은 구름을 수놓았고, 그 앞에 선 놈의 기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씨발…!”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중지만 한 기총탄이 날아들어 어깨와 가슴팍을 헤집어 놨고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불로 달군 쇠말뚝이 박히는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내달렸다.


그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피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덕에 짧은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컥컥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만이 귓전을 맴돌았다.


우습게도 그런 와중에 이쪽을 향하던 적기가 검은 꼬리를 그리며 그대로 스쳐 지나가 바다에 처박히는 걸 보고 그 아이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나도 정상은 아니라는 증거겠지.


옆에서 내 몸을 흔드는 탄약수와 귀가 떨어져라 의무병을 부르짖는 관측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이대로 끝인 걸까.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의 소중함을 깨닫는 건 왜 항상 마지막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대답을 듣던 간에 그 아이에게 내 마음을 전해 둘걸….


죽음의 문턱에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심상은 고향의 산천초목도 가족의 얼굴도 아닌, 그저 눈부실 정도로 미소짓고 있는 그 아이의 얼굴이었다.


아아, 그대여. 가까이 있었기에 더욱 그리운 그대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더 이상 바라마지 않을 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

한창 벽람할때 썼던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