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표준 국어사전에는 등록조차 안 된 오타쿠 용어.


셀 수도 없는 서브컬처 매체들에서 전가의 보도와도 같이 쓰여진 설정이었지만, 지금 내가 목도한 상황을 표현하기엔 더없이 어울리는 단어였다.


처음에는 워낙 경우가 없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오고 가는 것이 단순한 해외여행도 아니고, 최소 1년은 두고 봐야 한다는 현지 관계자의 말에 나는 꼼짝없이 이곳의 생활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 두 개 떠 있고, 동물 귀 달린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옛날 기록영화에서나 보던 클래식 카와 마차들이 돌아다니는 세상.


처음엔 이게 꿈인가 싶다가도, 현지 적응 교육 담당관의 길쭉한 귀와 그 뒤를 따르는 정령들의 모습은 마치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물론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서류상으로 제안받은 건 두 가지.


먼저 나의 군 경력 일체 인정 및 현지 적응 교육 이수 후 주어지는 대위 계급, 그리고 1년 내 소령 진급 및 육군대학 입학 기회였다.


그때의 내 처지를 생각하면 그런 조건을 거부할 이유도 없었고, 설령 일하게 될 곳이 이런 다른 세상이라 해도 당장 먹고살 길이 해결됐으니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37번 교육생, 앞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오늘은 현지 적응 교육 수료일.


나를 비롯한 외지인들이 이 나라, 리에넨에서 일하기 위한 기초적인 교육을 마치고, 각자 일자리에 맞는 직책을 받아 해산하는 날이었다.


“대위 임관,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인자한 얼굴로 나의 어깨에 리에넨 육군에서 대위 계급을 나타내는 수평으로 늘어선 검정색 직사각형 문양을 달아주는 담당관이 한층 더 자애로워 보였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지는 쪽지 한 장.


[9시까지 임페리얼 호텔 카페테라스 5번 테이블로 가볼 것.]


임페리얼 호텔은 리에넨의 수도 아우구스타 유일의 5성급 호텔이었고, 이는 곧 비공식 석상 중에서도 꽤 높은 사람이 행차하실 자리라는 걸 의미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이런 누추한 나를 만나기 위해 귀한 행차를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이렇게 쪽지만 덜렁 받고 나니까 괜히 긴장부터 됐다.


담당관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옮겨 정해진 시간보다 10분 먼저 호텔에 다다르자, 어디서 많이 봐왔던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칠이 된 회전문부터 대리석으로 깔린 로비, 은은한 실내조명과 제복 차림으로 근무 중인 종업원들까지.


‘이런 건 또 한국에서 봤던 고급 호텔들하고 별 다를 게 없네.’


“여, 이쪽이야.”


그렇게 중간층의 카페테라스에서 서성이기를 잠시, 구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을 한 사람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고급 장교용 코트를 두르고 있던 그 사람의 계급은 육군 소장.


진짜로 날 만나기 위해 나온 사람이 맞나 싶어 쪽지와 테이블의 번호를 번갈아 봐도 지금 상황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대위! 유진영.”

“유진? 이름 귀엽네. 일단 자리에 앉아.”


거수경례를 붙이며 관등성명을 대니, 여인은 레몬티 두 잔이 놓인 테이블을 가리키곤 자리에 앉았다.


단정하게 정리된 옅은 레몬색의 머리칼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 그리고 훤칠한 체구.


‘분명 어디서 봤던 얼굴인데.’


“반갑다. 난 17보병사단장 워스파이트 소장이야.”


레나 에마리오 워스파이트. 가슴께에 오버로크된 명찰에는 분명 그리 적혀 있었다. 


나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는데도 이미 소장 계급을 단 건 어떻게 넘어가더라도, 성이 워스파이트라는 건…….


“혹시 군사고문단장님과─”

“내 동생인데, 걔 요즘은 잘 지내니?”

“예, 뭐, 나쁘진 않아 보였습니다.”

“혼자 타지 생활하는 애라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네.”


나를 이 기상천외한 나라로 불러들인 쥐색 양복 차림의 여인과 같은 집안이라는 말이 됐다.


대체 이 나라는 구조가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이렇게 젊어 보이는 인간들이 왕실 군사고문단장을 하고 사단장을 하는 걸까.


“그래서 어떻게, 그쪽은 고향 떠나 지낼만했어?”


그런 의문을 갖는 것도 잠시, 스스럼없이 질문을 던진 사단장은 앞에 놓인 레몬티를 홀짝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타향살이 자주 해서 금방 적응했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나도 군 생활 하는 동안 어디 한 지역에만 오래 머문 적은 없었기에, 달리 지내기 어렵고 자시고 할 일은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사단장이 원했던 대답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그런 애들이 있어. 향수병 걸려서 관두는 애들이.”

“저는 여기에 뼈를 묻을 각오로 왔습니다.”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네.”


나름 듣기 좋으라고 했던 말이었지만, 의외로 사단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뭐, 내가 한 말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좋든 싫든 간에 내겐 여기가 마지노선이었으니, 내 평가를 올리기 위해서는 앞으로의 행동에 달린 거겠지. 


“어디 보자, 군 경력이…, 12년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달랑 꺼낸 사단장은 그 말과 함께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고, 거기에 거짓은 없었기에 나도 달리 꿇릴 건 없었다.


12년. 병과 전문하사 복무기간 2년에, 장교 생활 10년을 합친 그 숫자는, 대학교 2년과 3사 생도 2년을 제외하면 내 젊음의 전부를 바친 기간이었다.


그렇게 조국에 충성을 다했던 결과물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기갑 장교라고 했지?”

“예? 예, 맞습니다. 기갑병과.”

“너 지금 딴생각 하냐?”

“아닙니다!”


잠시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예리하게 내 태도를 지적한 사단장은 의외로 별 감정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사단장 입장에선 나 같은 놈 상대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닐 테고, 아쉬우면 내가 먼저 노력해서 가치를 입증하면 되는 문제였다.


“됐고, 우리 사단 전차대대에 중대장 자리가 하나 비는데, 올 생각 있어?”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로 지금과 같이 말이다.


사단장은 나의 그런 대답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모자랐나 싶다가도, 담당관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여기로 보낼리는 없었기에 일단은 확신을 갖고 운명에 맡겨보도록 했다.


“가자.”

“잘 못 들었습니다?”

“대대 주둔지까지 걸어갈 거야?”


이건 일단 합격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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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과의 면담 아닌 면담이 끝나고, 앞으로 복무하게 될 전차대대의 주둔지로 향하는 길은 빈말로라도 순탄하다고는 하지 못할 자리였다.


개인적으론 그냥 기차나 마차를 타고 홀로 느긋한 여행길에 올라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대대 주둔지까지 데려다 주겠다니.


 사단장의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거니와, 주둔지에 도착해 장군 차량에서 내릴 경우 얻어갈 몇몇 이점들은 나를 사단장과의 드라이브로 이끌었다.


물론 그런 좋은 부분만 가져갈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사단 작전지역인 리에넨 동부 토르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까진 장장 여섯 시간에 이르는 긴 여정이 이어졌다.


“전차부대의 선결과제가 뭐라고 생각하지?”

“적 기갑전력 격멸 및 보병지원입니다.”

“아군 대전차전력이 있음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부분에 대해선…”


그리고 나는 그동안 잠시도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사단장의 질문 공세와 전술 토의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준비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했다.


…결과적으로 자대에서 어떻게 중대장 생활을 이어나갈지에 대한 계획은 사실상 백지와도 같은 상태에서 시작하게 됐다.


“영 대위, 듣고 있나?”

“예, 대대장님.”


그렇게 도착한 171전차대대는 대대장부터가 사단장을 능가하는 전형적인 야전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이마에서 왼쪽 뺨으로 이어지는 긴 흉터, 목소리는 중후했으며 시원하게 밀어버린 스킨헤드에 군복 위로도 드러나는 탄탄한 근육과 다부진 체격.


171전차대대의 대대장, 파웰 중령이 주고 있는 위압감은 마치 한 마리의 야수, 그 자체였다.


그나저나 영 대위라니, 호텔에서 사단장이 불렀던 것도 그렇고 '유 진영'이던 내 이름이 이곳에선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진 영'이 되어버렸으니, 참 묘한 기분이었다.


“이름과 다르게 별로 young해 보이진 않는구만.”

“아, 예….”

“핫하하! 농담일세.”


도대체 어디서 웃음 포인트를 잡으란 건지 알 수 없는 농담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대장을 비위를 맞추는 것부터가 고되게 느껴졌다.


생긴 거는 철판도 뜯어먹을 것 같은 야성적인 군인 상인데, 저런 재미도 감동도 없는 개드립을 칠 줄이야,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는구나.


“그보다도, 자네가 맡게 될 3중대는 지난달에 새 전차를 수령해서 신경 쓸 일이 많을 거야.”

“근시일 내에 차질없이 전력화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기대하고 있겠네.”


그다음은 뭐, 서로 인사치레나 다름없는 말을 주고받고, 이제 적당히 거수경례 올린 후에 중대 행정반으로 내려가면 되겠거니 했다.


그 꼴을 보기 전까지는.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 먼저 퇴근할 테니까 3중대장도 적당히 있다 퇴근해.”

“예, 알겠습니다.”


다급하게 대대장실을 나서는 대대장을 뒤로하고,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내가 교육받은 내용이 맞는다면 리에넨 육군의 표준일과 종료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는데, 지금 이게 뭔 상황인가 싶었다. 


워낙 어이가 없어 시선을 맞춘 당번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꼴 한두 번 보는 게 아니라는 반응. 


아직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남아있나 싶어 가방을 뒤져 규정집을 살펴봐도, 평시에 지휘관이 일과시간 이전에 퇴근해도 되는 사유는 없었다.


“근데 또 시설은 좋네.”


찝찝한 기분으로 주인 없는 대대장실을 나와 주둔지 내부 전경을 살펴보니, 시설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다.


리에넨은 기본적으로,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내가 살던 세계의 1세기 전 모습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대 인원 전체를 수용하는 3층짜리 통합형 막사와 제법 깔끔한 외관의 독신자 숙소, 지붕까지 달린 전차호는 내가 한국에서 군 생활할 때 지냈던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부대, 차렷!”

“됐어, 그냥 일들 봐.”


참고로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앞으로 중대장 직무를 수행하게 될 3중대 행정반.


막사 2층 좌측 구석에 자리한 행정반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제식 구호를 만류하고 내부를 한번 쓱 둘러보자, 다들 행정작업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아마 대대장 말대로 신규 장비 전력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거겠지.


상석에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중위 하나에 그 옆에 붙은 소위가 하나, 행보관으로 보이는 상사와 중사 계급의 통신 반장, 잡무를 보는 일병에서 상병 사이의 병사가 넷. 


중대급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부족함은 없어 보였지만, 문제는 그 업무에 사용하는 장비가 두벌식 타이프라이터와 깃펜이라는 것이었다.


이거 오늘 임관 첫날부터 야근 각이네.


“야, 부중대장아.”

“중위! 조지 퍼시우스 웰링턴! 부르셨습니까!”


나의 부름에, 상석에 앉아있던 곱상한 인상을 주는 금발 벽안의 청년이 몸을 일으키며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를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이는 갓 스물을 넘겼을까. 이름을 보면 평범한 집안 출신 같지는 않았고, 계급이 중위라는 건 임관 이후 적어도 1년 이상을 복무했다는 얘기가 됐다.


물론 리에넨 왕국 육군사관학교의 시스템이 어떤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 자제라는 이유 하나로 이제 겨우 초등교육만 마친 애를 4년간 군사교육 시키고 장교로 써먹는 건, 실무자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목소리 좀 낮추고, 작업 얼마나 됐어?”

“이제 절반 정도 했습니다.”


아무튼, 부중대장의 호구조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똥을 치우는 게 급선무.


타이프라이터가 한국에서 행정작업 할 때 곧잘 썼던 두벌식 자판에 아라비아 숫자와 영어가 나열된 물건인 걸 생각하면 별로 어려울 건 없었다.


“나도 일거리 좀 줘봐.”

“네‥, 네?”

“속기 정도는 할 줄 아니까 일거리 좀 달라고.”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당황하는 와중에도 깃펜으로 정리한 초안과 작성양식을 같이 넘긴 걸 보면, 기본적인 일머리는 있는 듯했다.


타이프라이터 상단에 누런 용지를 끼우고, 첫줄 중앙에 개요, 한 줄 띄우고 소속 부대, 또 한 줄 띄우고 작성날짜.


부족한 부분이나 알아듣기 어려운 건 전입 올 때 가져온 핸드북 타입의 대륙 공용어 사전을 뒤져가며 해결했고, 기본적으로 영문 350타를 칠 줄 아는 보편적인 능력이 의외로 여기서 빛을 발했다.


“중대장님, 빠르시네요.”

“나 있던 데에선 이게 평균이야.”


순식간에 초안 네 장 분량을 타이핑한 나를 바라보며, 웰링턴 중위는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로 그리 읊조렸다.


그리고 나의 그런 모습이 어지간히도 의외였는지, 행정반 안의 다른 간부들도 놀란 눈치로 이쪽을 기웃거렸다.


신경 쓰지 말고 자기 할 일이나 하라는 의도로 했던 말에도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거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중대장 직인 나 주고, 타이핑도 혼자 할 테니까 부중대장은 소대장 끼고 초안 작성해.”

“예, 중대장님.”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그런 시선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행보관님은 제가 바로 타이핑 올릴 수 있게 검수작업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난 임관 첫날부터 야근하고 싶지 않았고, 무얼 해도 지금 잡힌 업무체계보단 나을 거라는 판단하에 짬 순으로 끊어 작업을 배정했다.


“그리고 병사들, 괜히 남아서 커피 타고 잡일 할 거면 그냥 내무실 복귀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업무에 참여하지 않고 괜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병사들을 돌려보낸 건 덤.


내가 12년 짬을 똥꼬로 처먹은 것도 아니었고, 어딜 가나 이 바닥은 항상 머리가 빠릿빠릿하지 못하면 매일이 무지성 야근 확정이었다.


“우리 퇴근 시간 전까지 일 끝내면, 오늘 중대장이 맥주 쏜다.”


그래서 내놓은 타개책이 이거였다.


내가 전입오기 전부터 쭉 행정작업 하느라 지쳤을 중대 간부들에게 적당히 발라 줄 윤활유.


마침 교육 수당으로 받은 돈도 넉넉하겠다, 이럴 때엔 빠른 부대 장악을 위해서라도 현금술로 간부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다.


“자, 중대장님 말씀 들었으면 빨리빨리 좀 합시다!”

“““알겠습니다!”””


현금술 성능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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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그날 맥주를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필요한 과정의 생략과 최적화된 업무 분담, 적절한 업무의욕 고취는 FM 필사 및 번역 최적화라는 막대한 업무량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거짓말과도 같이 날 포함한 중대 간부 전원은 8시에 퇴근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