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곧바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12류 면류관을 쓴 15세 남짓의 소년이 남청색의 곤복을 입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새 황제가 긴장된 표정으로 공지형이 대필한 교서를 받아 펼쳤다. 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짐이 이제 천명을 받아, 태조태황제께오서 건국하시고 고조태황제께오서 건원하신 이 600년의 전주 이씨 황조를 물려받아 이끄는 중책을 맡게 되었으니, 어찌 어깨가 무겁지 않으랴. 짐이 새 황제가 되어 새로운 연호를 반포하노니, 오늘부로 광만의 연호를 폐하고 경력(景力)이라 할 것이다. 경력 원년, 4월 20일.”


 찬의가 외쳤다.


 “산호!”


 “황제 폐하 만세!”


 “재산호!”


 “황제 폐하 만만세!”


 그렇게 대한 제정연합국의 7대 황제이자 전주 이씨 황조의 33대 군주, 경력제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경력제는 허울뿐인 황제였고, 당연히 실권은 모두 홍지아가 쥐고 있었다.




+ + +




 “배가 고프구나.”


 경력제가 편전에 들어서 처음 한 말은 그것이었다.


 “수라를 들여라.”


 그러자 내관들이 쩔쩔매면서 고개를 숙였다. 경력제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무엇 하느냐? 어서 수라를 들이라는데도. 지금 수라를 들여야 할 시간이 아니더냐?”


 “폐, 폐,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홍지아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그녀가 거침없이 들어와서 조아리기는커녕 서서 아뢰었다.


 “폐하, 지금 조정 예산이 몹시 부족하여 나라가 궁핍한데, 편전에 드시어 첫 하명을 하신다는 것이 수라를 들이라는 것이시옵니까?”


 “...그, 그것이 문제입니까?”


 “오늘부로 수랏간은 혁파되었습니다.”


 경력제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홍지아가 차갑게 말했다.


 “앞으로 폐하께서 드실 음식은 폐하께서 직접 구하셔야 합니다.”


 경력제가 기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궐 후원에 농사를 짓든, 내탕금(황제의 사유재산)으로 음식을 사든,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저는 통보를 해 드리러 온 것입니다.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홍지아가 그렇게 말하고 무책임하게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경력제가 소리쳤다.


 “누나!”


 홍지아는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누나. 홍지아는 광만제의 외조카딸이었으므로 경력제와는 사촌지간이다. 그녀가 돌아서면서 말했다.


 “부르셨사옵니까?”


 “그럼 그 수랏간 예산은 어디로 가는데?”


 “없사옵니다. 이미 5년 전부터 전대 황제 폐하의 내탕금에서 지출하고 있었사옵니다.”


 “허면 부황의 내탕금은 어찌하여 나에게 안 오는 것입니까?”


 “전대 황제 폐하의 재산은 모두 태후마마의 가산이 되었습니다.”


 아, 태후... 폐후될 뻔했던 광만제의 황후 말이다. 그렇겠네. 그 때 문이 열리고 내관이 들어와서 아뢰었다.


 “폐, 폐하.”


 “어찌 그러느냐?”


 “태후마마께서 승하하셨사옵니다!”


 홍지아는 전혀 놀라지 않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력제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어마마마께서?”


 “그, 그리고 태후마마의 유서가 발견되었사온데, 전대 황제 폐하의 유산은 모두 조카딸 영의정 홍지아에게 물려준다고 하옵니다.”


 홍지아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경력제가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면서 말했다.


 “자, 장례식은 어째야 하지요? 아직 부황의 입관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합동장으로 치르겠사옵니다.”


 홍지아가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경력제가 외쳤다.


 “누님!”


 “격식을 지키시옵소서. 폐하.”


 “내... 내탕금...”


 경력제가 불쌍한 표정으로 애원하듯이 말했다.


 “반씩... 나눠 가지면 안 될까요?”


 “어쩌면 좋습니까? 유서에 소신에게 전액 물려준다고 적혀 있는 것을.”


 그 유서가 태후의 친필이라는 어떤 근거도 없었고, 태후가 왜 갑자기 비명횡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홍지아는 단숨에 광만제가 보유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사유 재산, 즉 내탕금을 꿀꺽 삼켜 버렸다.




+ + +




 이거명의 집 대문에서 하인이 사랑채를 향해 외쳤다.


 “자가(自家. 왕실 족친을 부르는 경칭), 자가를 뵙겠다는 자가 있사옵니다.”


 이거명이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여보내게.”


 문이 천천히 열리고, 대충 츄리닝에 블라우스를 걸친 여자 한 명이 걸어들어왔다. 그녀는 어깨에 가벼운 크로스백을 매고, 거기에 카메라 하나와 녹음기용 마이크를 삐죽 튀어나오게 넣고 있었다. 그녀가 이거명의 집 앞에 서자, 이거명이 천천히 걸어나와서 말했다.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자가, 소인은 DBC 인턴기자 안보결이라고 하옵니다.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명이 불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터뷰를 원하시는 것이라면 지금은 거절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상황이 상황이고, 그리고 언론들은 지금 아무 보도도 낼 수 없다고 영상이 못을 박았는데...”


 “드릴 말씀이 있사온데, 혹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사옵니까?”


 이거명이 뒤를 돌아보고 자기 방을 슬쩍 쳐다본 뒤 이내 대답했다.


 “지저분한데.”


 “괜찮습니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대화를 하고자 합니다.”


 곧 이거명은 자기 방 안에 자리를 펴고 안보결과 마주 앉았다. 안보결이 녹음기용 마이크를 꺼내 들자 이거명이 쏘아붙였다.


 “녹음할 거면 난 아무 말도 안 하겠소.”


 “아니요, 녹음 아닙니다. 녹취본을 들려드려야 해서요.”


 그녀가 버튼 하나를 누르자, 마이크로 녹음된 음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 DBC 인턴기자 안보결입니다. 예조참판 김경훈이 맞으시지요?

- 그렇습니다.

- 잠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대규모 조정 내각 교체는 어떤 까닭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 홍지아 정권에 대한 황제 폐하의 강경한 응징입니다.

- 황국민정당 측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인가요?

- 황제 폐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능가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도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희 황국민정당 따위가 어떻게 황제 폐하의 높으시고도 강력하신 힘에 개입을 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단지 대한정우회를 보고 나가라 하면 나가야 하는 것이고, 황국민정당을 보고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저희에게 들어오라 하고 계시고요.

- 황국민정당은 지금의 국정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신 젊은 스승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으시고요?

- 모른다고 해 두겠습니다.


 이거명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찌푸렸다. 안보결이 말했다.


 “제가 이 대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녹음한 것입니다. 이것이 황제를 시역하려는 자가 할 법한 말입니까?”


 이거명이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그럼 설마 역적이 나 역적이오 하고 말을 했겠습니까? 물러가세요.”


 “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분명 그대로 두었으면 황제께서는 홍지아 정권을 성공적으로 축출하고 황국민정당 천하가 열렸을 것인데, 황국민정당은 뭐가 아쉬워서 역적 모의를 했단 말입니까?”


 이거명은 벌써부터 짚이는 게 있었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질끈 감자 안보결이 보채듯이 말했다.


 “이것은 영의정 홍지아가 일으킨 자작극이 틀림없습니다. 폐하와 황국민정당 재상들을 모두 시역하고 한판 뒤집기를 감행한 것입니다. 공론화를 해야 합니다.”


 “그만하고 나가시오.”


 “자가, 이건 큰일입니다. 홍지아 같은 권신이 이제 섭정의 힘까지 거머쥐었으니 더 이상 견제가 불가능할 것이고, 조만간 있을 중추원 만민총선에서도...”


 “그만하고 나가라고, 이 역적새끼야!”


 이거명이 호통치자 안보결이 놀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거명이 눈을 뜨면서 쏘아붙였다.


 “누굴 죽이려고 그따위 소리를 꺼내느냐. 홍지아가 보내던? 내 충성심을 떠보라고 우리 집에 기자인 척하고 들어가라고 명령을 하던?”


 “아,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자가.”


 “아니면 당장 나가라. 그리고 다신 내 집에 기어들어오지 마라.”


 이거명의 경고성 짙은 말에 안보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터덜터덜 나가야 했다.




+ + +




 교복을 입고 압구정의 정자에 선 12세의 김민현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서안을 두고 깍지를 낀 채,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탕건을 쓴 홍지아가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었다. 노비가 옆에서 말했다.


 "영의정 홍지아 대감이시니, 어서 예를 갖추십시오."


 김민현은 책에서 본 대로 가볍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홍지아가 찻잔을 따르면서 물었다.


 "네가... 그 김경훈의 아들이더냐. 전대 황제께서 숨기시던 젊은 스승."


 "...네. 맞습니다."


 홍지아가 담배를 내리고, 옆에 있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를 탄핵한 상소를 올린 장본인이기도 하다지?"


 김민현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홍지아가 태연하게 질문했다.


 "아직 열둘이니 술은 못 마실 것이고, 코코아 좋아하느냐?"


 김민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홍지아의 얼굴 위쪽에 그어진 흉터와 그걸 가린 반창고가 섬뜩하게 12세의 김민현에게 다가왔다. 김민현은 덜덜 떨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홍지아가 코코아 잔을 내밀며 말했다.


 "내 너를 죽여버리려 했으나 명분이 없었다. 12세면 연좌에도 걸리지 않고... 해서 생각했다. 나는 너의 부친이 가졌던 재산, 너의 부친이 가졌던 신분, 다 네가 넘겨받게 놔둘 것이다. 그러니까 조용히 지내라. 나의 놀이터가 된 이 제국을 어지럽히지 말란 말이다."


 승자의 여유였다.


 "정치는 주고받는 것이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것이다. 내 너를 살려주었고 재산을 가지게 놔두었으며, 앞으로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말하거라.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


 김민현이 덜덜 떨면서 코코아 잔에 가득 담겨 있던 향긋한 단물을 모조리 흘려 버렸다. 그가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저 여자는, 대한제국의 18성 132도 어디에 있는 누구든지 손짓 한 번에 죽일 수 있었다. 당장 김민현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명분이 있든 없든 사실 그건 중요치 않았다. 적당히 죽여버리고 아무 포졸한테나 책임을 덮어씌워서 파면시키면 그만이니까.


 잘 모르겠다는 김민현의 말을 들은 홍지아가, 자기 이마의 흉터를 덮은 반창고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바로 그것이다."


 "...네?"


 "잘 모르도록 하거라.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더 알려 하지 마라. 철저하게 어리석게 지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너를 살려 주는 대가다."


 홍지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김민현에게 다가와 그의 교복 넥타이를 덥석 움켜쥐고 말했다.


 "검정고시로 이미 12세에 고등학당 과정까지 완료한 것으로 아는데, 이 교복은 어디서 났느냐?"


 셔츠 너머로 가느다랗고 차가운 뱀 같은 홍지아의 손가락을 느낀 김민현이 겁에 질려서 새파랗게 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노, 높으신 대신이 부른다기에 새로 사서..."


 "예를 아는구나. 그래, 너 같은 미성년자에게는 교복이 정장이다."


 홍지아가 눈을 찌푸리며 강요했다.


 "그리고 동시에, 교복은 배우는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 배우지 않는 것은 오늘 내가 너에게 유일하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복은 벗어 놓고 가거라. 열다섯이면 어른이다. 이제부터는 도포에 갓을 쓰고 다니도록 해라. 그리고 철저하게 한량처럼 살아라. 그게 내가 너를 살려주는 대가다."


 잠시 후, 속옷 바람이 된 김민현이 팔로 몸을 감싸고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압구정에서 내려왔다. 홍지아가 김민현의 교복을 바닥에 팽개치고 불붙은 담배꽁초를 떨어뜨려 태워 버렸다. 김민현이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