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이 지났다.


 흰 옷을 입은 청년이 밭에 있다. 그가 밭의 땅을 호미로 파헤쳤다. 어머니 대자연의 품에서 영글고 자라난 고구마 덩이가 튀어나왔다.


 청년은 우울한 표정으로 그 고구마를 소쿠리에 던져 넣었다. 소쿠리에는 감자, 옥수수 등 구황작물들과 오이 몇 자루가 담겨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미어져도, 내 힘으로 뭔가 해냈다는 사실이 그는 즐거웠다. 그는 소쿠리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구마와 감자를 씻어서 불에 굽고, 옥수수는 커다란 솥에 쪄 냈다.


 아, 생활비가 떨어진 지도 어느새 어언 일주일. 통조림도 다 먹어 치운 이래 이틀만의 식사다.


 그가 허겁지겁 감자 껍질을 벗겨 소금도 없이 입 안에 우걱우걱 밀어 넣었다. 굶주린 청년의 목구멍에 뜨거운 감자 반죽이 우겨넣어지면서 내벽을 다 지져 버렸지만 고통스러워할 새도 없었다.


 굶주리고 가난하고 빈곤한 청년이 고구마로 손을 뻗었다.


 누가 봐도 가난하고 비참해 보이는 그 청년을 뒤에서 몇몇 여인들과 관을 쓴 남자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들이 흐느끼면서 중얼거렸다.


 "불쌍하신 우리 폐하..."


 "어쩌다가 황제가 궁 뜨락에 자기 먹을 걸 농사지어야 하는 나라가 됐을꼬..."


 내시들도 한탄해 마지않았다.


 그 청년이 바로 지구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극동의 제국, 대한제국의 지존 경력제였다. 극동의 천조질서를 지배하는 천자요 왕중왕이요 군왕이요 황제였다.


 그런 청년이 텃밭에서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어 먹어야 했다. 세금 횡령은 이제 황실의 기본 생활 예산까지 미쳐서 황제에게 지급되는 한 해 생활비가 일반인 남성의 한 해 생활비보다 적을 지경이었다.


 조정 예산이 탕진된 나머지 수랏간이고 소주방이고 몽땅 해체됐고, 2천에 이르던 궁녀와 내시들도 이제 150명만 남았다. 수랏상도 끊겼고, 황제는 자기가 다 해진 곤룡포를 꿰메 입을 지경이었다.


 그런 비참한 삶을 살던 황제는, 황권을 되찾는다던지 하는 거창한 목표는 다 잊어버렸다. 살아남는 것. 그게 곧 그에게 승리였고 성공이었다.




+ + +




 같은 시각, 홍지아 소유의 연회장.


 7층 누각으로 지어진 거대 연회장은 수백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사치의 정점이었다. 은을 바른 기와로 지붕을 얹고 처마마다 금칠을 한 그 눈이 부실 정도로 사치스러운 연회장에서, 홍지아가 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모름지기 인생은 짧으니 술에 자주 취하여야 하는 것, 삼한 역사를 통틀어 오늘과 같은 태평성대는 없었는즉, 다들 이 태평성대가 영원히 지속되기에 건배!”


 “건배!”


 모두 일제히 잔을 들어올리면서 그렇게 외쳤다. 그 중에는 류주영도 있었다. 고신으로 인해 입은 상처는 홍지아가 붙여 준 전속의사 덕분에 금방 나았다. 그녀가 고기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술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그래, 내까짓 게 뭐라고 이 빌어먹을 세상에 도전을 해?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거, 누릴 수 있는 거 다 누려 보고 죽어야지. 그녀가 잔을 들고 일어서면서 외쳤다.


 “사헌부 대사헌 류주영이 건배사 한 번 하겠습니다!”


 각료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류주영이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람이란 필히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 필멸의 존재이니,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리고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져 보지 않으면 후회밖에 없으리.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안겨 주시는 시대의 명재상 영상 홍지아 대감의 장수만세에 건배!”


 “건배!”


 그녀가 잔을 입에 대고 한 번에 넘겨 버렸다. 눈물이 흘렀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안보결이 쓸쓸하게 컴퓨터 앞에서 타자를 쳤다. 그녀가 한숨을 쉬고 본문 마지막에 [DBC의 안보결 기자]라고 적고 엔터를 친 다음, 인쇄기로 다가가서 버튼을 눌렀다. 본문이 A4용지에 누덕누덕하게 찍혀 나왔다.


 안보결이 그 본문을 들고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DBC 편집장이 의자에 반쯤 기대서 자고 있었다.


 “편집장님.”


 “아우... 조금만 더 잘래.”


 “편집장님, 초고 가져왔습니다.”


 편집장이 번개를 맞은 듯 번쩍 일어나서 책장에 머리를 박고 도로 의자에 처박혔다. 안보결이 A4용지 두 장을 내밀었고, 편집장이 그 용지를 받으면서 말했다.


 “좀 쉬면서 하라니까. 어차피 열심히 해도 아무도 관심 없어.”


 “그래도 기자의 본분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세상을 동생에게도 물려주고 싶진 않으니까요.”


 “동생 있었나?”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편집장이 원고를 잠시 읽다가 도로 내밀었다.


 “사헌부 대사헌 류주영을 까고 있잖아. 여기 일곱 번째 줄에서.”


 “딱 한 번 들어간 언급입니다. 이 정도는 상관없잖아요.”


 그러자 편집장은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치켜세워서 벽에 대문짝만하게 걸린 팻말을 가리켰다. 팻말에는 시뻘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대한제국 언론에서 일하는 사람 중 그 귀절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연산군이 자신에게 직언하는 대간을 모조리 쳐 죽인 뒤 대간들의 신언패에 새겼던 말이다.


 편집장이 말했다.


 “정말로 여동생을 위한다면, 그 기사 고쳐 와.”


 안보결이 터덜터덜 초고를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 +




 곽대진이 뚜벅뚜벅 홍지아의 거대한 누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각 아래에는 매일같이 열린 연회로 인해 쌓인 엄청난 음식물 쓰레기들이 가득했는데, 빈민 어린아이들이 그 쓰레기더미에 모여서 연회장에서 버려진 음식들을 먹어대고 있었다. 곽대진이 눈을 찡그리면서 외쳤다.


 “얘들아, 그런 거 먹으면 병 걸린다!”


 그러자 아이들이 자기들이 사는 마을을 가리키면서 대꾸했다.


 “저희 마을에서 먹는 것보단 이게 더 건강해요.”


 곽대진이 그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은 그야말로 빈민가 그 자체였는데 온갖 석면과 쓰레기더미로 대충 지은 집에서 빈민들이 비틀비틀 좀비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홍지아의 부동산 독점으로 살던 집에서까지 쫒겨난 이들이나, 일자리를 찾아 식민지에서 대한제국 본토로 올라온 이들이 몰락한 경우 저런 곳으로 나앉는다. 최근 빈민가, 그들 말로는 “운치굴”이라 불리는 저 참혹한 슬럼들은 지난 몇 달간 400배 가까이 늘었고, 1억 2천만 명이 사는 대한제국 본토에서 무려 2,000만 명 이상이 저런 빈민촌으로 나앉았다.


 곽대진이 처참한 표정으로 다시 누각으로 향했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누각에서는 정말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의 극치인 황금으로 만든 용 위에 수많은 산해진미를 올려 먹고 있었으며, 지하의 어두운 방들에서는 홍지아 같은 여성 권신들이 남창을, 남자 권신들은 창녀를 끼고 음란한 행각을 일삼고 있었다.


 곽대진이 6층에 도달하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연회장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최상석에서 무려 용상을 똑같이 따라 만든 의자에 앉아, 혁파된 수랏간 나인들을 그대로 고용해서 차리게 한 황제의 식사를 하고 있던 홍지아가 외쳤다.


 “어이쿠, 이게 누구셔, 대한제국 최고의 명장 곽대진이 아니십니까?”


 홍지아는 곤룡포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15류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곽대진이 비틀비틀 홍지아 앞으로 나아가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영상 대감, 어찌...”


 “어떻게 여제 폐하를 영상 대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곽대진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술에 만취한 벼슬아치가 외쳤다.


 “홍지아 대감께서는 우리의 여제이신데, 이곳에서는 그분을 폐하라 부르는 것이 예의일세!”


 “그 무슨 망령된 소리인가!”


 “어서 삼궤구고두례로 속죄하시게!”


 관복을 입었다는 자들이 일제히 술잔을 집어던지면서 우기기 시작했다.


 “속죄하라!”


 “속죄하라!”


 “여제께 대감이라 한 것을 속죄하라!”


 홍지아가 깔깔 웃어대다가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그리고 황금 그릇에 황금 탁자로 차려진 수랏상을 손으로 확 밀어 모조리 바닥에 엎어버리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에이, 그래도 다들 그러시면 아니되지요. 이분이야말로 대한제국에서, 제일가는 장수가 아니시겠습니까!”


 홍지아가 곽대진의 오른팔을 잡고 마치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운동선수와 코치처럼 들어올렸다. 그러자 모든 이들이 술병을 집어던지고 음식을 땅에 던지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광기다. 이곳은 완전히 미쳐버린 광기의 장이다. 곽대진이 두려운 마음에 눈을 찌푸렸다. 홍지아가 물었다.


 “그래,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대감. 분명 일전에 소장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군 인사권 일부는 소장에게 남겨 주시겠다고요. 헌데 이번 군 내각 변경을 보니 소장이 천거한 이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다른 곳에서 등용을 하셨더군요.”


 “아, 그랬지요.”


 홍지아가 취한 목소리로 손을 뻗자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근육질의 남성이 일어섰다. 홍지아가 외쳤다.


 “황근출 조방장! 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 친구도 나름대로 군에 일가견이 있는 친굽니다.”


 곽대진이 부들부들 떨다가 돌아서서 누각을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뒤에서 황근출이 술병을 던져 곽대진의 뒤통수를 맞혔다. 그리고 소리쳤다.


 “기열땅개가 어딜 기어오르는가? 아, 기열땅개니까 기어오르겠구나! 그러니 저렇게 말으로 못 이기겠다 싶으면 바로 역돌격이지!”


 곽대진이 부들부들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돌아서서 저 황근출이라는 자를 누각 난간으로 밀어버리고 싶으나, 그랬다간 소장파 무신 전체에 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곽대진은 피 흐르는 뒤통수를 붙잡고 비틀비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새 70을 바라보는 노구는 그의 뜻대로 쉽게 움직여 주지 않았다. 누각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 다섯 걸음도 못 가서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 + +




 곽대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병원이었고, 의사들이 열심히 그의 심박을 체크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김세환이 곽대진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곽대진이 김세환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고혈압이시라고 합니다. 게다가 간암 말기이시라고... 이런 실정이신데 어찌 병원을 한 번도 오질 않으셨습니까.”


 김세환이 원망스럽게 소리쳤다.


 “소장이 나가서 대감의 진단서를 받으니 의사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이다. 대체 어쩌자고 그리 사셨습니까.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시면서. 황제 폐하께 배신당하고, 홍지아에게 배신당하시면서.”


 “...그대가 있질 않은가.”


 곽대진이 김세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힘겹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세환이... 이 나라를 꼭 지켜주시게. 내가 이제까지 본 어떤 무장보다 그대의 무용이 더 뛰어나니, 능히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일세...”


 “예. 꼭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곽대진이 부들거리면서 말했다.


 “정치인을 믿지 말게...”


 김세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곽대진이 신음하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절대로... 정치인을 믿지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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