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은 너희들도 알다시피 중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일제강점기의 무장투쟁 항목에서 반드시 나오는 사건임


ㄴ본인이 다니던 학교의 교과서임


학교 교과서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이렇게 서술되어있을 거임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후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여 중국 훈춘시에 있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한 후, 이를 조선인들에게 잘못을 덮어씌워 중국 영토 내로 일본군이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칠 빌미를 만들었다. 일본군이 독립군 근거지로 진군하자,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백두산 부근으로 후퇴하다가 결국 일본군과 10여 차례 교전하여 패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 규모는 1200명~2000명, 일본군 규모는 5000명이었으나 일본군은 1000명 이상이나 사망한 반면 독립군은 겨우 60명 사망, 90명 부상이었다."


일본군에 비해 숫적, 질적으로 모두 열세에 있었던 독립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10:1의 사상 비율을 냈다는 소식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줄 필요가 있었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단체들의 환호를 받음


그리고 이 기조는 독립 후에도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교과서에 '청산리 대첩'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야붕이들 중 상당수가 아마 청산리 대첩에 대해 처음 배운 순간 국뽕 치사량에 빠졌을 거임(솔직히 나도 그랬음)





























근데 여기서 의문점이 있어 


















1) 훈춘사건 


ㄴ조동걸 교수 


ㄴ한국 1세대 역사학자 조동걸 교수가 쓴 책 '1920년 간도참변의 실상'에서 일본군이 마적단을 고용해서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음 


근데 이와 같은 주장을 전면 반박하는 문서가 존재함 

















ㄴ위에 있는 책은 청산리 대첩 이후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이 이에 항의하여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근거로 제출한 문서를 번역한 내용임


근데 보면 알겠지만 훈춘시의 일본 영사관을 공격한 쪽은 마적단이 아니라 진짜 조선인들이 습격한 거라고 기록됨ㅋㅋㅋ


그리고 이 자료에 관한 교차검증까지 존재함 


















ㄴ독립운동가이자 청산리 대첩에 참여했던 독립운동가 이범석이 쓴 책 '우둥불'에서도 조선인들이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다고 저술함ㅋㅋ







당시 중국 신문 '신보'도 조선인들이 일본 영사관을 습격한 것이라고 보도함






다시 말해서 조선인들이 벌였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 '일본군이 마적단을 매수하여 독립군을 공격할 빌미를 만들려고 했다'라고 변형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지어 우리 학교 시험 대비 때 역사쌤이 버젓이 프린트로 나눠줌ㅋㅋㅋ


















2) 전투 결과


ㄴ해당 보고서


오늘날 교과서에서 흔히 말하는 '일본군 1000명 이상 사살, 독립군 피해 미미'라는 내용은 전투 후 북로군정서군이 임시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내용을 기반으로 함 


근데 이는 단순히 북로군정서군 쪽의 자료만 그렇지 일본측 사료 및 전투 교리를 고려해보면 상당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음 


우선 사망자 수에 대해 얘기하자면, 일본군 5000명 중 고위 간부를 포함한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나옴 

이는 손실율이 20% 이상인데,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도 전투 중 전체 병력의 10% 이상만 손실되어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20% 이상은 아예 전투 불능으로 판정됨


상식적으로 제아무리 정신나간 지휘관이었다 해도 아군의 5분의 1이 갈려나가는데도 계속 전투를 수행했을 가능성은 희박함


차라리 퇴각하고 손실을 보충받은 다음에 전투에 나섰다면 모를까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본군의 정신나간 행동은 경제가 어려워지고 전황이 불리해진 중일전쟁/태평양전쟁 때 나타난 현상이었고, 청산리 대첩이 발발한 1920년 때는 일본군도 나름 선진적으로 운영되던 군대였음


그런 군대가 아군이 1000명 이상이나 사살당했는데 기록을 안 남겼을 리가 없음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고서 위조 가능성도 의심스러운 게, 육군성에게는 보고를 안 했을지는 몰라도 직속 상관의 귀에는 반드시 들어가게 되있거든 


ㄴ위키백과 펌인데,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과의 직접적 교전에 참여한 병력 이외에도 주위 지역에 배치된 제 11/14/19/20사단 병력 총합 2만 이상이었음 


만약 일본군이 실제로 1000명 이상 사망했으면, 다른 부대가 와서 지원이라도 해줬을 텐데 그런 기록이 전혀 없음 




ㄴ한국독립운동지혈사


민족주의 사관 사학자로 유명한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일본 영사관의 비밀 보고에 따르면 대략 900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비밀 보고서의 실존 여부를 아무도 모름 



ㄴ장 연구위원이란 사람은 장세윤인데, 이 사람은 실제 전투에 참가한 안정근의 보고를 토대로 일본군과 독립군 각각 400명~500명 정도 피해를 봤다고 분석함


참고로 위에 보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김경천 장군조차 한민족이 허언증 오진다고 깜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박창욱 연병대 교수 또한 청산리 대첩 전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 







위 사진은 한국 네티즌들이 일본군이 대패했다는 증거로 청산리 대첩 이후의 일본군이라고 주장한 사진인데, 밀덕 야붕이들은 알겠지만 사진속의 일본군이 착용한 군모는 전투 발발 12년 후인 1932년에 채용된 모자임ㅋㅋㅋ 또한 부상자를 든 오른쪽 병사의 군복을 보면 어깨에 계급장이 없는데, 정작 1920년대에 일본군이 채용한 45식 군복에는 어깨에 계급장이 달려있었음 


다시 말해서 저 사진은 중일전쟁 발발 당시에 찍힌 사진임. 적어도 청산리 대첩 당시는 아니었음


이제 일본 측의 반박을 보자 


ㄴ일본군 보고서


당시 일본군 보고서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일본군 11명이 사망했다고 나오는데, 이들은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봉헌됨(얘네들 봉헌하는 건 난 문제 없다고 본다 단지 다치바나 요시오같은 싸이코새끼들까지 있다는 게 문제지)


실제로 북로군정서의 주장대로 일본군이 1000명 이상 사망했다면, 나머지 전사자들은 일본군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배제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유족들의 항의를 당연히 받고 공론화되었을 일인데 그런 거 없었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전략적으로 패배한 것은 맞음  


그러나 당시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던 민족주의 사관학자들에 의해 일본군의 피해 수치가 뻥튀기된 것도 맞음


문제는 아직까지도 교과서에서 독립군의 대승리라고 규정해둔 거임ㅋㅋㅋㅋㅋㅋ 




















이번에도 재앙이 빠질 수 없지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