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던 조선시대, 전등사도 예외없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관리들과 토호들의 토색질이 심해서 젊은 스님들은 강화성을 쌓는 데 사역을 나가고, 늙은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어 바쳐야 했다. 거기에 더해 전등사에 있는 2그루 은행나무로 인해 매년 조정의 은행알셔틀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그마저도 싹 다 털어 진상으로 바치고 나면 남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이것 또한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관가에서 "조정에 진상할 전등사 은행알의 양을 크게 늘리겠다"며 20가마니를 요구했다. 안그래도 은행알을 있는 대로 다 털어도 10가마니밖에 안 될 판에 20가마니를 바치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은행알을 구해서 바칠 수 있을지 막막해서 전등사 안은 난리가 났다. 조정에 상소를 올려도 씨도 안 먹힐 게 뻔하고, 그렇다고 탁발해서 모자란 양을 보충하자니 "좋은 은행은 승려들이 다 먹고 탁발한 은행들만 진상했다"고 트집잡힐 게 뻔하니, 이래저래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신통력이 있는 백련사의 추송 스님을 불러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도착하자, 전등사 승려들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아두고 3일기도를 올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드디어 3일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전등사 안은 소문을 듣고 구경을 하러 온 강화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느샌가 관속 몇 명이 소문을 듣고 나타나서 구경꾼들의 틈에 끼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설마 공물 셔틀 하기 싫다고 저주 퍼붓는 거 아니냐"고 노스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스님은 "어허,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상감께 진상할 은행이 곱절로 열리게 기도하는 것이오."하고 답했는데 그 관속이 비웃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 ㅋㅋ 그런다고 은행이 더 열릴 것 같은가? 참 웃기는군." 하자마자 갑자기 "악"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감싸쥐고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그는 한쪽 눈이 팅팅 뿔어 실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소문이 퍼지자 구경꾼이 더 모여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3일째, 기도가 거의 끝나자 목탁과 바라 소리가 일제히 멈추고 염불 소리도 멎어 전등사에 적막이 흘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추송선사가 은행나무를 향해 "오늘 3일기도를 마치며 이 은행나무 2그루가 100년이 지나도 1000년이 지나도 영원히 열매 단 한 알도 맺지 아니하기를 축원하나이다."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도를 끝맺었다. 이를 듣고 있던 승려들과 구경꾼들은 "어 이거 뭥미? 은행을 곱절로 열리게 하는 거 아니었나?"고 어리둥절해 하는데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우수수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 비바람이 그치고 하늘이 개자 은행나무 쪽을 보니 추송 선사와 노승(老僧), 동승(童僧)은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날 이후 은행나무 2그루는 은행을 맺지 않게 되었고 관가의 탄압도 없어졌다. 하긴 진상으로 바칠 은행알이 아예 한 알도 안 열리게 되어버려서 먹고 죽을래도 없는 상황이니. 그리고 오늘날도 은행을 맺지 않고 있는 은행나무들은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