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병사들은 언론 인터뷰 권한이 없기 때문에, 키이우 인디펜던트(Kyiv Independent)는 병사들의 풀네임을 공개하지 않겠다.


도네츠크주 – 러시아군이 아우디이우카 남동쪽의 우크라이나군 포위망에 접근하자, 보병 올레흐(Oleh)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또렷하게 들었다 : “후송은 없을 것. 300(부상자를 뜻하는 은어)을 남기고 떠나라.”


올레흐는 2014년부터 아우디이우카(Avdiivka) 남쪽 방향에서 러시아군 진격을 막아왔던 핵심 거점, 제니트(Zenit)가 포위될뻔한 위기에 처하자 마지막으로 도망쳐나온 사람 중 하나였다.


올레흐와 그의 나이 많은 동료 바실(Vasyl)은 구 방공기지 제니트의 벙커에서 부상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올레흐는 바닥에 누워있던 여섯 사람 중 이반(Ivan)과 특히 친했는데, 올레흐는 이반을 가리켜 곧 가족을 만나고 싶어하던, 젊고 성실한 남자였다고 말했다.


시계가 똑딱거리고 있었다. 2월 15일 오전 6시, 러시아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30분 정도 대화를 나눈 후, 올레흐와 바실은 소그룹을 이뤄 벙커를 떠났다.


(제니트로부터)함락 직전의 산업 소도시였던 아우디이우카까지 2.5km의 여정을 통해 부상자를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도망갈 수 있는 포위망을 불과 120미터 정도만 남겨두었기 때문에, 올레흐 자신의 생존조차도 불확실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생존에 집중한 하르키우주 출1신의 청년, 올레흐는 포위 직전의 아우디이우카를 향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며칠 뒤 최전선에서 더 멀리 떨어진 도네츠크주의 한 마을에서, 올레흐는 키이우 인디펜던트에 "우리는 (지도부에 의해)그냥 방치됐다"고 밝혔다. “우리는 (제니트를)끝까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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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5일 파괴된 아우디이우카 시가지 건물들의 전반적인 뷰. (Kostiantyn Liberov/Libkos/Getty Images)


2월 17일, 우크라이나의 신임 총사령관 올렉산드르 시르스키는 러시아 점령하 도네츠크시 바로 외곽에 있고 한때 약 3만 5천여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아우디이우카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러시아에게 잠시 점령당하긴 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은 소련 시절의 거대 코크스 공장이 위치한 전략적 허브, 아우디이우카를 2014년부터 방어해왔다. 러시아는 2023년 두 차례에 걸쳐 아우디이우카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고, 10월에 시작된 두 번째 공세는 결국 도시의 함락으로 이어졌다.


우크라이나군은 수적으로 열세(outnumbered)였고 화력도 열세(outgunned)였으며, 러시아군이 많은 병사들에게서 이때까지 본 사상 최대 규모라 회자될 정도로 큰 정면 기갑공세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우디이우카를 치열하게 지켜냈다.


러시아군은 2023년 5월 바흐무트 전투에서 적용했던 익숙한 전술을 사용,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아우디이우카 외곽으로 진격해 우크라이나군을 천천히 포위했다.


110 독립기계화여단 소속 병사 4명은 아우디이우카에서의 철수는 늦었고, 무질서했던 바람에 수많은 병사들이 (러시아군의)강력한 포격을 받아가면서 도보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키이우 인디펜던트에 밝혔다.


서방측 군사전문가들은 아우디이우카 방어가 다른 곳에서 사용될 수 있는 러시아의 공세능력을 약화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이 너무 늦게 퇴각했다고 비판했다. 군사분석가들은 우크라이나군이 바흐무트, 솔레다르 및 셰볘로도네츠크 등지에서 희생이 크고 유사한 실수를 여러번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불가능한 탈출(impossible e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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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디이우카에 배치됐던 우크라이나군 병사 다수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부상자들을 두고 떠나야만 했다고 밝혔다

(그림 : 카롤리나 굴샤니)


올레흐는 2024년 첫 두 달이 제니트를 지키는 병사들에겐 극도로 힘든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러시아군은 아우디이우카로 향하는 주보급로에 가까워지면서 도시를 3면에서 포위하고, 내부 병력을 증강시키려고 지나가는 차량을 상대로 공격강도를 높였다.


올레흐는 1월쯤 되자 남아있던 병력이 소총 및 기관총탄, 식량, 식수까지 배급(ration)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올레흐 씨는 “1.5리터짜리 식수 한 병을 가지고 3명이서 최소한 나흘은 나눠먹었다”며 열악한 생존 환경을 회상했다.


러시아군이 지속적으로 유도폭탄, 집속탄 및 기타 무기를 사용하면서 제니트 일대의 진지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2월까지 러시아군은 아우디이우카 점령을 완료하기 위해 주변 공세를 강화했다.


올레흐에 따르면 2월 13일 오후 9시쯤, 제니트에 남아있던 병사들은 “알아서(on their own)" 아우디이우카를 향해 도망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부는 소그룹을 이뤄 도망치기 시작했고, 올레흐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방어를 위해 머물렀다. 다른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러시아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동안, 올레흐는 무전을 통해 동료들이 아우디이우카로 가는 도중에 차례차례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하는 소리를 들었다.


올레흐는 "후퇴하는 동료들을 엄호하고 방어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포격을 당했다. 믿기지가 않았다."고 말했다.


올레흐와 전우들은 제니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부상병 6명을 벙커로 대피시켰다. 올레흐는 목숨을 걸고 나머지 사람들을 계속 엄호하면서 벙커에 있는 부상자들을 대피시킬 희망이 아직 남아있기를 바랐다.


그러한 희망은 전쟁의 현실로 인해 곧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2월 15일 이른 아침, 올레흐는 지휘관이 벙커에 있던 동료들에게 그 어떤 차량이나 장비도 그곳에 갈 수 없다고 통보하는 걸 들었다.


올레흐는 “그들(부상자 6명)은 후송되리라 믿으며 15일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15일이 되자 후송작업이 없을 것이란 말만 들었다.”


110여단 대변인 안톤 코츠콘은 당시 러시아군이 아우디이우카로 향하는 주도로를 뚫고 넘어와 탈출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전차와 포병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고 밝혔다. 코츠콘에 따르면 철수 이전에도 주보급로를 따라 아우디이우카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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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아우디이우카 방향으로 포격하는 제71 예거여단의 포병들.


탈출해서 살아남기(Making it out alive)


제니트 벙커에서 나오자마자 올레흐는 도망치다가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처음으로 봤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시신이 보였다.


올레흐는 부상자를 돕거나 전사자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고 걸어가는 지역은 러시아군 포병, 전차, 로켓포, 항공폭탄, 드론 등의 공격을 무수히 받은 뒤였다.


올레흐는 “우리도 살고 싶었기 때문에, (시신을)수습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올레흐는 아우디우카로 가는 길에 셀 수 없이 많은 시신을 봤다고 한다.


포격이 떨어지자 올레흐는 그전에 남은 포탄 구덩이에 뛰어들었다.


올레흐는 조심스럽게 아우디이우카를 향해 걸어갔고, 이 시점이 되자 지휘관은 더이상 응답을 하지 않았고 완전히 "알아서" 해야만 했다고 한다.


5시간 후 올레흐와 살아남은 동료들은 마침내 아우디이우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또 서쪽에 있는 세볘르네(Sevierne)나 토넨케(Tonenke) 마을을 향해 걸어서 포위망 근처로 도망쳐야만 했다.


110연대 대변인 코츠콘은 제니트를 탈출하는 병사들이 연결이 되는 한 상공에서 드론의 도움을 받아 아우디이우카에 도착한 후, 탈출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코츠콘은 제니트에서 병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모든 것”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올레흐와 바실은 포위되기 전 원래 있던 병력 수를 밝히기를 거부했지만, 중대 인원 40%만 살아남았다고 밝혔다. 전쟁의 현 단계에서 보병중대는 일반적으로 60~80명으로 구성된다.



코츠콘은 제니트에서 탈출한 병사들의 숫자를 밝히진 않았지만, 대규모 철수작전이 "매우 어려운"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손실은 "최소"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남동부 전선 일대를 담당하는 타우리아(Tavriia :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를 가리키는 말) 작전전략집단 대변인 드미트로 리호비(Dmytro Lykhovii)에 따르면 "특정 수(A certain number)"의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아우디이우카에서 철수하는 동안 포로로 잡혔지만 그 숫자가 "수백(hundreds)"은 아니며 처음에 실종됐다고 여겨진 인원 일부가 도시를 탈출했기 때문에 변동이 심했다고 한다.


제니트 거점의 생존자들은 기적적으로 아우디이우카에서 탈출했지만, 충격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들의 시체 여러구를 보여주는 러시아군의 선전영상이 온라인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며칠 뒤 제110기계화분리여단은 성명을 통해 "몇몇" 중상을 입고 쓰러진 병사들이 제니트에서 탈출하지 못했다고 확인했다. 대피로에 총격이 가해졌기 때문에, 생존자들에게는 목숨을 건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제니트 110사단은 제니트의 '완전한 포위' 때문에 전쟁포로를 담당하는 정부기관과 접촉, 부상자를 후송하는 대가로 러시아와 합의했다고 밝혔다.


110여단은 성명서를 통해 영상을 언급하며 "우리는 적 소식통을 보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고 밝혔다.


영상 속에 등장한 사망자 3명의 신원은 친지들이 확인했다고 부대측은 전했다. 올레흐의 친구 이반도 포함됐다. 110부대 정보에 따르면 벙커에 남아있던 다른 병사 2명도 숨졌다. 마지막 병사의 운명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포로 살해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범죄에 해당하지만, 러시아군은 최전선에서 여러 차례 국제법을 위반한 바 있다.


올레흐는 제니트에 남겨진 군인 6명과의 마지막 대화를 기억하며, 자신이 살아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얘기해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올레흐와 바실은 자신들이 버림받은 과정을 되돌아보며, 자신들의 생명이 지도부에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전을 통해) 알아서 (탈출지점으로)가라는 말을 들었다." 라고 올레흐는 말했다. “(아우디이우카에)탈출 같은 건 없다. 알아서 선택해야만 한다. 죽거나 살아남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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