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운 게임 - prologue 

크라운 게임 - 1
크라운 게임 - 2

크라운 게임 - 3






                                                                             

                                                                              - 왕도 인근 지도 -



                                                             


인생은 과감한 모험이던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 헬렌 켈러





가을의 끝 무렵에 마무리된 회의에서 어느덧 4개월이 지나 겨울의 추위가 끝나갈 무렵, 봄이 찾아왔다고 알리기라도 하듯이 미친듯한 폭우가 쏟아졌다. 

해안가 일대를 적신 빗방울은 하루 종일 내렸으나 그칠 기세를 모른 채로 땅 아래에 꿈틀대는 새싹을 깨우고 있었다.


"쯧..."


그리고 이런 날씨는 강연이 좋아하는 기후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닮아 반곱슬 머리를 가진 강연에게 있어서 비가 오는 날씨는 머리를 정리하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장소가 장소인지라 아침부터 머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던 탓인지 표정에서도 짜증이 보일 정도로 기분이 상해 보였다. 

강연은 가까스로 머리를 뒤로 넘기고는 빗소리가 흘러나오는 텐트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아아...


미친 듯이 쏟아지는 폭우가 바닥을 흠뻑 적시다 못해 텐트 근처의 배수로까지 차올라 진흙의 범위를 넓혀갔다. 지휘관용 텐트라 특히 신경을 써서 망정이지 일반 병사들의 텐트는 이미 텐트 안까지 비가 새어들어온 경우도 있어 곤혹을 치르고 있다는 보고가 들려오고 있었다.

강연의 고급스러운 구두가 발길을 재촉할수록, 진흙이 그의 신발과 바지를 더렵혔지만 이제는 의복 따위를 신경 쓸 겨름이 없었다. 


시저스 리제가 왕도 오르카의 지하 감옥에 구금된 이후로 곳곳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세바스티안의 총사령관에 대한 정보 통제는 아이가 없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많은 불만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 탓에 평소라면 그저 리제의 다소 무거운 사랑이라고 넘겨 짚었을 일이었으나 이전부터 흐르던 소문과 분위기들이 뒤섞여 불만의 씨앗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항의하기 위한 시위대를 조직하여 왕도 오르카의 근처까지 다가오는 사태로 발전하고 만 것이다.


강연은 저 멀리 보이는 회의용 텐트로 서둘러 걸어갔다. 허나 뻘과 같이 변해버린 진흙 바닥과 몸을 가리기 위한 장우산이 바닷바람에 휘날리면서 강연의 몸을 흔들어 놓았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바다 너머의 빗줄기에 가려 희미하게 보이는 금색의 다리를 향해있었다.


'저 다리만 건너면 모든 게 해결되거늘.'


루비콘 강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심정이 이러하였을까. 강연은 금색의 다리, [오르카 만 브리지]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르카 만 브리지는 왕도 오르카로 향하는 첫 번째 관문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와일드 컴패니언이나 카이저 게이트웨이를 뚫거나 스카이 나이츠의 견제를 거치는 험난한 길이었지만 강연의 계획이 잘 맞아떨어진 덕분에 모두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오히려 컴패니언 시리즈는 시위대가 다리의 앞까지 올 수 있도록 길을 비켜준 것도 모자라 함께 시위대에 참여하기까지 하였으며 스카이 나이츠는 왕도의 연락에 핑곗거리를 만들어 출전을 거부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는 데 한 손씩 거들고 있었다.


어느새 폭풍 같은 비바람을 뚫고 회의장의 앞에 도착한 강연은 표정을 바꿔지었다. 계획의 추진자였던 만큼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한 자태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몰아치는 비바람의 앞에 경비를 서고 있던 두 브라우니의 경례를 받들은 강연은 우산의 빗방울을 털어내듯이 흔들고는 회의가 열리고 있는 텐트의 입구를 열어젖혔다. 

강연은 텐트 안에서 흘러나오는 뜨뜻하면서도 축축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방수 기능만큼은 확실한 텐트였지만 비가 내리는 날씨가 주는 그 축축한 분위기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기분이 나쁜 것은 전혀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헛소리를..."


곳곳에서 옥신각신 거리는 소음들이 들려왔다. 크기가 큰 텐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지휘관들과 그 부대의 사령관을 맡고 있는 자녀들이 모두 들어와있던 탓인지 좁아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도떼기시장처럼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이 더욱 텐트의 크기를 위축시키고 말았다.

강연은 구석에서 소란을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는 홍련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오늘도 고생하시겠군요."


강연이 다가온 것을 눈치챈 홍련은 한숨을 내쉰 게 부끄럽기라도 한 듯이 가볍게 기침을 뱉어내고는 강연을 맞이하였다.


"...크흠, 어서 오세요. 뭐... 저만 고생하겠나요?"


홍련의 말대로 강연은 어떻게든 이 모난 돌을 굴릴 책임이 있었다. 바지 사장이라고는 해도 이 계획을 추진한 사람 중 하나이니까.

강연은 머리 위로 손뼉을 치며 주위의 소란을 잠재우고는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다행히 크게 소리를 낸 덕인지 많은 눈길이 강연에게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오늘도 아침부터 열기를 띠고 회의에 임해주시는 모습을 보니 왕국의 미래가 밝은 것 같아 안심입니다."


가벼운 미소로 던진 농담이었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진짜 왕국의 미래를 생각해서 모인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이 앞이 밝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알고 있는 강연이었기에 사족은 그 이상으로 달지 않고 본제로 넘어갔다.


"그럼 오늘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야기를 진행해볼까요?"


지금 그들은, 다리 하나에 묶인 채로 이곳에서 4일간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오르카 만 다리의 앞에 세워진 회의장에서는 평소에 보기 힘든 면면들도 눈에 들어왔다. 지방에서 힘을 기르던 부대들이나 소규모 부대임에도 그 능력을 인정받은 부대의 지휘관들도 참석했는가 하면 오히려 보일 법 하거늘 보이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사태에도 여전히 총사령관의 안전을 믿거나 현재의 체계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부류들이었다. 혹은 어느 쪽이든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류도 있었다.


강연의 생각과 달리 모든 부대를 모으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의 바이오로이드들로도 충분히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무력으로 왕도를 밀고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계획임은 확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시위대를 조직하여 왕도를 견제하는 것이 목표였다. 워낙 격전의 시기를 보냈던 만큼 왕국에는 시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AGS는 사실상 병기였으며 바이오로이드들은 모두 적과 싸우기 위한 무력행위가 가능한 병기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전사라는 전례가 없는 왕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왕도의 앞에 바이오로이드들이 모여 시위를 벌인다는 것은 사실상 무력 시위나 다름없으며 거의 모든 국민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즉, 단순히 반란이나 폭도라는 이름으로 무력 진압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소리였다. 국민의 90%가 반란군이라며 무력 진압을 하는 순간부터 왕국은 그 뿌리를 잃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계획에도 흔들리는 뿌리는 있었다. 바로 지휘관들의 통합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초기에 왕도 진격을 계획했던 8명의 지휘관들과 달리 자녀들을 가진 지휘관들은 자녀들의 진출보다도 총사령관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녀들은 총사령관이 안전하다면 언제라도 치료가 마치고 캡슐 속에서 나와 자녀들을 이끌어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자녀들이 없는 부대에서는 왕도 오르카로 진격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아무리 총사령관의 안전이 의심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총사령관이 잠든 왕도에 흙 발로 침입한다는 것에 불만은 가지고 있었고 또한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는 것이 목표였던 탓에 왕도에 피해를 끼치는 것에 거리낌을 가진 부류들이었다.

이러한 탓에 아직까지 강을 건널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지휘관들과 사령관들이 모인 지 4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이어진 회의는 끝날 줄을 몰랐고, 온갖 병기와 군대를 이끌고 모인 부대들도 슬슬 지쳐가고 있던 참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내부에서 무너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는 수준까지 이르르자 강연은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모은 시위대라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 이상으로 이 쿠데타가 실패할 때 자신에게 돌아올 화살이 무서웠던 것도 있었으리라.

왕도를 적으로 돌리고 두 다리를 쭉 펴고 자는 것은 너무나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적어도 강연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결국 그에게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 다리를 건널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소원은 바랄수록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회의는 여전히 바깥의 진흙탕과 같이 혼탁해져 있었다.

강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전히 반대파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역시, 저희 의견에는 변함이 없답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애니웨어 시리즈의 지휘관, 공진의 알렉산드라였다. 그녀는 자녀를 가진 지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왕도로 들어가지 말자는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인 반대파의 인물이었다.


"저희는 결국 주인님의 명령을 받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나쁜 학생으로 인해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바로잡기 위해 똑같이 그릇된 방법을 쓰는 것은 옳지 않아요."


그녀는 말을 이으려는 눈치였으나 그 전에 먼저 소리치듯이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고 말았다.


"헹! 그러니까 그게 글러먹은 생각이라는 거라고!"


부드러우면서도 여성스러운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숨겨진 힘은 짐작하기 어려운 고함이었다. 바바리아나는 자녀를 가진 바이오로이드는 아니었지만 대표적인 찬성파 중 하나였다. 동부의 현장 재건을 위해 파견된 비스마크르 코퍼레이션의 지휘관이었으나 그 속에 내재된 본능은 그녀를 이 자리까지 끌어내고야 말았다.

바바리아나는 붉은 쇠사슬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테이블 위로 던져올리고는 지도를 향해 손가락을 찌르듯이 날렸다. 쇠사슬 너머로 펼쳐진 지도에서는 다리 하나를 사이로 수많은 깃발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메이가 망상이라고 치부했던 그 그림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총사령관의 위기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의 고함소리에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보였다. 진심으로 총사령관이 걱정되는 자들도, 자신의 욕심으로 모인 자들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목적은 왕도에 숨은 세바스티안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 이후의 조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지 몰라도 오랜 시간을 총사령관의 수족이자 비선 실세로 활동했던 배틀 메이드 프로젝트의 끝을 보고 싶은 마음은 하나였을 것이다.


"그릇된 방법이고 나발이고, 이대로 시간만 보냈다간 불량 학생으로도 막지 못할 사태가 벌어질걸? 감당할 수 있겠어?"


그녀의 눈에 들어온 지도에는 오직 승리만이 펼쳐져 있었다. 바바리아나에게는 수만이 넘는 AGS도, 한때 최강이라던 배틀 메이드 프로젝트도, 그 휘하에서 춤추는 페어리 시리즈도 부숴버릴 자신이 있었다.

비록 규모가 큰 부대는 아니었지만 비스마르크 코퍼레이션은 사지를 넘으며 특공대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동부와 북부는 아직 레모네이드의 잔당이 숨어있는 유일한 전장이었다. 북부를 담당하는 발할라의 추종자들과 자신들, 좋게 봐줘서 사막의 기동대 정도만이 현재 남아있는 전사였다.

몇 년의 평화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나태해지는 동안에도 그녀들은 여전히 멸망 전쟁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이 살기 힘든 외지에 숨어든 잔당들은 신출귀몰하게 튀어나왔고 한순간의 방심은 죽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지였다.

그녀의 눈에는 이 자리에 모인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양 떼나 다름이 없었기에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이었으리라.


"그런 발언이야말로, 감당할 수 있겠소?"


이번 목소리는 알렉산드라의 뒤에서 튀어나왔다. 굵직하면서도 무거운 중저음은 듣는 이에게도 긴장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부여하였다. 어느새 앞으로 튀어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깊게 팬 눈으로 바바리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보고 있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으나 그의 분위기가 자아내는 중압감 탓에 그렇게 느끼는 자들이 많았을 뿐이다. 알렉산드라의 아들, 세르게이는 그런 사내였다.

알렉산드라를 이어받은 금발은 두피를 가까스로 덮는 짧은 머리카락에 남아있었으며 그녀를 따라 받은 와인색의 눈은 어두운 그늘로 가려져 제대로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특히 알렉산드라를 넘어서 190cm가 넘는 신장은 세르게이가 정말로 알렉산드라의 아들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물론 바람을 피울 상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알렉산드라의 아들이라는 점은 변함없으나 그만큼이나 자신의 어머니와 다른 외견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바바리아나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감당? 무슨 헛소리야?"


"아버지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주장으로 아버지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자니, 이런 모순된 주장으로 아버지에게 피해가 생길 경우에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이오."


"하, 그래서 나온 결론이 총사령관이 더 위험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의견인가?"


"...왕도에 좀 더 의견을 피력해보자는 의견이었소."


"그렇게 4일을 기다리는 동안 어떤 연락이 왔었지? 아니면 이 상황을 이해하기에 눈치가 모자란 거야?"


점차 대화가 격해지자 주위에 서있던 다른 지휘관들의 말도 오고 가면서 회의는 개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격양된 말투들은 더 이상 토론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운 무언가로 변질되도록 만들고 있었다. 

결국 이 이상의 다툼을 빙자한 회의에는 의미가 없으리라고 판단한 강연이 중재에 나서기로 하였다.


"오, 진정들 하시죠. 영웅들께서 너무 격양되신 것 같군요."


강연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 내면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결국 의견이 통합되지 않으면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취약한 연합은 안에서부터 무너질 것은 뻔한 이야기였다.

강연은 살짝 눈을 돌려 찬성파의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자신의 친구, 마틴을 바라보았다. 마틴은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었는지 잠시 시선을 마주했지만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런... 역시 앞으로 나서지는 않겠다는 뜻인가?'


마틴은 이 계획의 최초 입안자였으나 그 역할을 강연에게 인계하였던 인물이다. 위태위태한 계획이었지만 강연은 어떻게든 마틴의 계획대로 굴러보내왔으나 마틴은 이 계획을 책임질 의향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저 어머니에게 물러 받은 갈색 머리를 손으로 꼬느며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조정은 강연의 몫이었다.


"...왕도로 함부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의견도 이해하고 있으나 이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강연은 다시 한번 마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지만 마틴은 여전히 붉은 눈을 강연에게로 보일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강연은 가슴속에서 서운함이 피어올랐지만 그 감정을 피력할 여유는 없었다.


"결국 어떻게든 해결은 해야 하지만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대표자를 정해서 강을 건너는 것은 어떻습니까? 직접 찾아가 저희의 의견을 전달하고 답을 받아오는 것입니다."


강연이 그리던 그림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어떻게든 색을 칠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더 미루었다가는 물감이 굳어 색을 칠할 방법조차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게 그나마 현실적인 타협안이라고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사실 이 안건은 처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틀째 저녁에 한 번 제시되었던 안건이었지만 대표자를 정하는 것에 논쟁이 일어나 사장되었던 안건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양측이 이해할 수 있었던 안건이었기 때문에 강연으로서는 선택지 없이 고를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문제는 이제부터 다시 대표자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일 저녁은 되어야 어떻게 후보자라도 좁혀지겠구먼...'


부대를 이끌지 않고 소수로 왕도에 들어간다는 것은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꼴이었다. 부대를 이끌고 무장을 해서 들어가도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운 마당에 비무장 상태로 혼자 왕도로 걸어간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혹시라도 총사령관이 치료 중이며 치료가 끝나고 나왔을 때, 앞장서서 왕도에 시위를 했다는 소식이라도 총사령관의 귀에 들어갔을 때, 밉보이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자들도 있었다.

결국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서로에게 대표의 자리를 양보하는 광경이 펼쳐지기 마련이었다.


강연은 어떻게 지휘관들을 설득시킬지 머릿속으로 고민을 이어가던 와중에 누군가가 손을 들어 올리며 앞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내려온 금발 머리카락의 벽안을 가진 남성, 불굴이라는 이명을 가진 스틸라인의 지도자 마리의 아들인 마르틴이었다.

평소에 쉽게 의견을 내지 않던 사람이었던 탓에, 다른 지휘관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와 입을 여는 마르틴을 지켜볼 뿐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게 대표자 자리를 양보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마르틴은 평온하다는 표정으로 주위의 지휘관들에게 제안을 던졌다. 몇몇 지휘관들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하는 표정이었으며 오직 그의 어머니, 불굴의 마리만이 결심을 한 표정으로 뒤에 서서 그의 등을 지키고 있었다.


"아까 의견이 나왔듯이, 저희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에 모인 지도 4일이 넘었습니다. 멀리서 오신 분들은 더욱 걸렸을 테지요. 업무들도 밀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 텐데 언제까지고 여기에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평소라면 소란이 이어져야 할 대목이었으나 그 어떤 지휘관들도 반박을 이어가지 않았다. 모두가 피해자를 뽑기 위한 토론을 하던 찰나에 스스로 피해자를 자처하는 자의 등장은 생각하지도 못 했던 것이다.

결국 이곳저곳에서 가벼운 동의의 의견만이 흘러나오자 강연은 기회가 되었음을 느꼈다.


'이미 결정을 하고 온 모양이군.'


강연은 불굴의 마리의 표정을 읽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모두 체념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오랜 이야기 끝에 나온 결론이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강연에게 있어서는 놓칠 수 없는 찬스임은 틀림없었다.


"하하, 훌륭하군요! 스스로 자처하는 희생정신과 도전정신은 제 가슴을 울리게 만드시는군요. 제 형제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무척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사족으로 붙이며 그는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 짓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강연은 회의실 구석에 있던 무전기 하나를 꺼내들어 마르틴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왕도까지는 닿을 수 있는 무전기입니다. 혹시라도 안전에 위협이 생긴다면 불러주시죠.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통신을 받더라도 도움을 줄 이유도,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녀들은 본능적으로 서로가 라이벌임을 느끼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다리 건너 왕도에서 위협을 받는 자신의 형제를 무슨 수로 구해낼 것인가?

결국은 조금이라도 안심하라는 의미에서의 부적이나, 자신은 뭔가 하려고 했다는 자기 위안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틴은 이해한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무전기를 받아 쥐었다.


"고맙군요. 혹시라도 아버님의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무전을 보내겠습니다."


강연은 자연스럽게 대표자로 마르틴이 정해진 것처럼 행동하였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오늘은 회의가 빨리 끝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뿐이었다. 오직 불굴의 마리만이 걱정에 휩싸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행 방향이 정해지자 행동으로 옮기는 것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부대가 협동하여 다리까지 마르틴을 호위하고 안전을 점검하자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다리를 건널 준비를 마쳤다.


모든 지휘관들과 사령관들이 마르틴을 배웅하기 위해 오르카만 브리지의 앞에 모여들었다. 여전히 쏟아지던 빗방울은 회의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점차 얇아지고 있었다.

검은 우산을 쥐어든 마르틴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뇌부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인사를 건넸다.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소식 가지고 올 수 있도록 노력해보죠."


그리고 이 말을 마지막으로, 마르틴은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졌던 무전기에서 통신 두절을 의미하는 잡음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사람인 기준 7436자입니다.

2주간의 치료끝에 이제 손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야후!

물론 조심해야한다는 꼬리가 붙기는 했습니다만... 이제는 좀 속도가 붙여서 글을 쓸 수 있겠군요!

저번주와 저저번주가 짧았던 만큼, 이번주는 조금 길게 적어봤습니다.


원래라면 2주에 걸쳐서 회의가 진행되도록 글을 써두었는데 자르기가 너무나도 애매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토론따위를 보고 싶으시지는 않으리라 생각이 들어서 조금 빠르게 넘겼습니다. 

결국은 강연은 총사령관의 안전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시위대를 조직하였고, 왕도의 앞까지 갔으나 내부분열로 인해서 그 이상 진격을 이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있으며 왕도는 자신들의 앞에 시위대가 무력으로 점거하듯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고 이해하시면 될 듯 합니다.


한 2,3천자 정도 잘라냈는데 조금 이야기가 급박하게 진행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을까 걱정되네요. 

읽어주시고 날카로운 의견 보내주시면 다음에 글을 쓸 때 발전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번에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발전하는 글이 되도록 힘내보겠습니다.


p.s 약 3주간 몽구스 팀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혹시 보고 싶은 팀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의견 주시면 화자를 바꿔볼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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