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소설 링크

세계관 정리글


이 글은 바닐라 이야기 이전편과 예쁜 인형 아가씨를 보고 오면 좀 더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님 말고


-이젠 어제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어-

 

주인님, 일어나시죠”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늘 보던 방 침실의 천장이 아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쫓자 자신의 주인이 바로 옆에 엎어져있었다. 평소라면 주인이 잠을 잘 때에는  내버려두고 아침식사를 준비했겠지만 바닐라의 가슴에 들어찬 복잡한 감정은 기댈 곳이 없었기에, 결국 자신의 주인을 흔들어 깨운다.

무슨 바람이 들었던 걸까? 지난 밤, 입에 잘 대지도 않던 술을 마시겠다고, 자기는 집에 내버려둔 채 편의점에 가서 커다란 맥주캔들을 잔뜩 사왔다. 거기에 치킨까지 한 마리 튀겨왔던 양혼은, 그때만 해도 정신이 멀쩡해보였다. 언제나와 같은 평범했던 일상이 유지 될 것만 같았다. 그래, 분명 그랬었다.

 

주인님, 할 말 있습니까?”

응?”

자기 주인 먹기 편하라고 비닐장갑을 낀 채 치킨의 뼈를 하나씩 발라내던 바닐라가 양혼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마디 한다. 양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바닐라를 쳐다보지만, 바닐라에게는 이미 평소와는 다른 점이 수 십가지 넘게 보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기름진 음식에 환장하던 사람이, 자기가 발라놓은 치킨에는 손도 안대고 벌써 맥주를 깡으로 두 캔째 비웠다는 점이다.

눈동자는 이리저리 굴리고 있고, 치킨은 드시지도 않고 연신 맥주만 들이키는게, 꼭 죄 지은 사람처럼 보여서 그렇습니다”

하하…그랬었나?”

바닐라가 자신의 이상한 점을 지적하자 약지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긁다가 젓가락으로 발라진 닭다리 한 조각을 집는다. 뼈를 다 발라낸 바닐라가 기름이 잔뜩 묻어 반들거리는 비닐장갑을 벗고는 자신의 맥주캔을 하나 깐다. 푸식 하는 시원한 소리에 이어 하얗고 부드러운 거품이 딸려나오자 바닐라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져다댄다.

뭐 잘못 한 거 있으면 눈치보지 말고 그냥 말씀하십시오. 만에 하나 주인님이 어떤 사고를 쳤다고 해도 전 주인님 편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무엇을 말할지는 몰라도 편하게 말하라고 바닐라가 판을 깔아준다.

할 말…있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바닐라였지만 정말 2년간 봐왔던 모습 중 제일 이질적인 양혼의 모습에 새삼 걱정이 되기도 한다. 심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지한 목소리, 언젠가 자신이 리제에게 죽을 뻔 했던 그 순간에도 볼 수 없었던, 무거운 표정이었다.

순간이나마 바닐라의 머릿속에 온갖 혼란한 생각이 차오른다. 사기를 당했나? 빚을 졌나? 아니면 내가 싫어졌나? 헤어지자는 말을 하면 난 어떡하지?

양혼이 말을 하기 직전의 1초도 안되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바닐라의 머릿속이 검은 상념으로 가득 들어찬다. 살짝 머뭇거리던 양혼의 입술이 떨어지고, 바닐라의 귓가에 양혼의 한 마디가 들린 그 순간, 터질 듯 복잡하게 들어차던 바닐라의 머릿속이 일순간 백지로 변한다.

네? 주인님 방금 뭐라고…”

결혼하자”

어떤 면에선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한 마디, 장난끼가 넘치는 양혼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표정은 저 말이 정말 진심일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들게 했다. 하지만 최소한 이야기를 들은 바닐라는 그 저의까지는 알 수 없었어도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질 듯 말 듯한 표정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싫어?”

마치 양혼의 그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흔든 바닐라가 평소의 진지한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는다.

주인님은 언제나 그게 문제입니다”

어?”

뭔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오고 닭이 튀겨지는 동안 수 십번을 시뮬레이션 했던 결과와는 다른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양혼의 속은 실시간으로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양혼의 속을 알리 없는 바닐라는 평소의 진지한 표정으로 한 마디 한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남이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죠…제가 지금…”

맥주캔을 들고 그대로 얼어버렸던 바닐라가 맥주캔을 앉은뱅이 탁상에 내려놓는다.

집에서 맥주 마시려다가 청혼을 받아버리면…도대체 어떤 반응을 해야하는겁니까…”

양 손으로 얼굴을 뒤덮은 바닐라에게선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가쁜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이미 술이 좀 들어간 양혼과 그때부터 술을 연신 들이킨 바닐라는 서로 무어라 한참을 이야기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둘다 앉은자리에서 잠들어버렸다.

 

잠자리가 바뀌면 예민해지는 양혼이 바닐라가 몇 번 흔들자 그대로 눈을 뜬다. 자기 집 거실이다. 눈을 뜨자마자 끄지도 못했던 티비에서 아침 뉴스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찬 바닥에서 자서 그런가 일어나려는데 몸이 부르르 떨린다.

씻고 오시죠.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어…그럴게”

맥주캔과 그릇으로 어지럽혀진 탁상은 잠시 내버려두고 바닐라가 주방으로 향한다. 눈을 뜬 직후엔 뭔가 꿈 속의 일 같다고 느꼈는데, 주방에 다시 혼자 서니까 어제의 그 일이 너무도 선명히 떠오른다. 꿈 같은 내용이지만 분명한 현실이다.

청혼을 받아버렸다.

새삼 자신의 주인이 뭘 좋아했는지부터 떠올린다. 사실 뭐든 잘 먹는 주인이 언제나 편하다고 생각했었다. 특히나 아침에는 차려주면 차려주는대로, 가끔 편식하면서 툴툴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뭐든 잘 먹어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의 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뭘까, 한참을 고민하던 바닐라는 확실히 자신의 주인이 제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나온 양혼이 주방으로 걸어온다. 불이 들어온 오븐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바닐라의 모습과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음식냄새, 잠깐 하늘쪽을 쳐다보던 양혼이 그 음식의 정체를 맞춘다.

너 피자 만들고있니?”

네? 네, 주인님”

아침부터?”

그…주인님이 좋아하잖습니까”

확실히 피자가 그의 잊을 수 없는 원 픽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침부터 먹을 음식은 아니었다. 엄밀히는 양혼은 아침부터 피자를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바닐라가 아침부터 그런 기름진 음식을 먹냐고 핀잔을 주는게 이 집의 일상이었다.

조금 있으면 만들어집니다”

조금 기다리라는 듯, 바닐라가 냉장고에서 캔 콜라를 하나씩 꺼낸다.

아, 이따가 어디 갈거야”

네?”

젖은 머리를 다 털어낸 양혼이 수건을 멀리 햇빛을 쬐고있는 세탁바구니에 던진다. 어림도 없는 골은 바구니의 왼쪽 멀리로 빠진다.

우리 집”

지금 집에 있는데 집을 간다고 하는 이상한 소리를 바닐라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인다.

집…여기잖습니까?”

아, 내 친가, 그래도 결혼인데, 부모님한테 인사는 해야지”

아…그, 가족 입니까?”

바닐라에게는 아직 생소한 단어이다. 예빈이 가족이란 것을 끔찍이 여기는 것을 보긴 했지만, 가족이란 게 없는 그녀에게는 사실 그 단어의 무게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결혼할 때에도 만나야 하는 그런 관계인걸까? 바닐라는 속으로만 생각한다.

응, 내 가족. 너는 본 적 없으니까. 이 참에 인사도 해야지”

바닐라를 데리고 서울 자취방에서 지내던 그가 취직을 하고 이사를 하는 동안, 그녀를 두고 집에 몇 번 내려간 적은 있어도 그녀를 데리고 간 적은 없었다. 아마 부모님에게 바닐라를 처음으로 보여주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 순간이 결혼 허락 구하는 순간이 될 거라곤 양혼도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결혼…맞는겁니까?”

바닥에 널브러진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집어넣고 오는 양혼에게 바닐라가 조용히 묻는다.

응?”

저 정말 주인님과 결혼하는겁니까?”

어린아이처럼 뺨을 붉힌 바닐라의 표정이, 귀엽지만 귀여움 이전에 색다르단 느낌을 준다. 꿈을 걷는 듯한 신비한 감정이 빵빵하게 들어찬 바닐라의 양 뺨을 가볍게 손으로 감싸쥔다. 달아오른 뺨의 온기가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키가 작은 바닐라에 맞춰 고개를 살짝 낮춘다.

긴장한 바닐라가 눈을 살짝 감는다. 잠자리에서 수 십번도 더 해본 행위, 너무나 일상적이었던 것 같은 그 행위, 입술과 입술을 맞춘다는 그 행위가 다시 이토록 설렐 수 있을까, 첫키스보다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바닐라와 양혼에게 전해진다.

됐지?”

네…”

다 들어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바닐라의 달아오른 양 뺨이, 가라앉을 생각을 않는다.


아마 명목상의 완결편이 될 바닐라 이야기 5


사실 바닐라 이야기는 나에게 되게 큰 의미를 갖고있는 글인데

내가 19년 7월에 처음 쓴 라오SS가 바닐라 이야기였고, 항상 글에 현타가 올때면 제일 먼저 고려하던 소재가 바닐라 이야기였음

그리고 지금이 가장 글에 현타가 세게 오는 타이밍이어서, 마지막으로 바닐라 이야기를 꺼내봄


내가 그동안 글을 쓰고, 반응이라곤 남들 다 올라가고 별들 사이에서 몇시간 뒤에 가는 념글, 가끔 달리는 댓글이나 아카콘이 전부인 이유가


내가 그냥 글을 생각없이, 존나 못써서 그렇다는걸 직감하니까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보단, 지난 10년간 내가 아마추어로써 글을 쓴게 다 허무한 짓 처럼 느껴지더라고


반응이나, 내 스스로의 잘쓰고 못쓰고 평가를 떠나서

바닐라 이야기를 쓰면서 글쓰는 게 재미가 없고, 이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들면


그냥 글은 접으려고


뭔가 다시 처음부터 배우기엔, 그동안 내가 써온 것들이 너무 많고, 그것들이 무의미한 시간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면

그냥 글 따위 안쓰고 말거같다.



그건 그렇고 연애도 못해본 모태솔로가 바닐라 데려오는 것 부터 시작해서 연애에, 이젠 청혼하고 결혼하는 글을 쓴다.

이런 부조리가